내가 쓴 글 29

선비 평산신씨 유사

先妣 孺人 平山 申氏 遺事 어머님(先妣)의 姓은 申氏이고, 휘(諱)는 후남(後男)이시다. 본관(本貫)은 평산(平山)이며 고려(高麗) 개국공신(開國功臣) 신숭겸(申崇謙)을 시조(始祖)로 한다. 13代 孫인 문정공(文正公) 신 현(申 賢)은 운곡(耘谷) 원천석 (元天錫) 선생의 스승이며, 영해군(寧海君)으로 봉(奉)한 분인데 이 분을 중시조(中始祖)로 한다. 고조(高祖)의 휘(諱)는 목(睦)이며, 증조(曾祖)의 휘(諱)는 두진(斗鎭)이며, 祖의 諱는 태영(泰永)이고 조모(祖母)는 영양(英陽) 남씨(南氏) 곤수(崑壽)의 따님인데. 일남(一男) 칠녀(七女)를 출중(出衆)하게 길러 명문대가(名門大家)로 출가(出嫁) 시키고, 칠녀가(七女歌)를 지어 후세(後世)에 남기셨다. 考의 諱는 세휴(世休)이며, 호(號)를 학..

선고부군 유사

先考府君 遺事 부군(府君)의 휘(諱)는 동탁(東鐸), 자(字)는 경필(警必)이시다. 우리 류(柳)씨의 본관(本貫)은 전주(全州)이며 완산백伯) 휘(諱) 습(濕)을 시조(始祖)로 한다. 그 3世 휘(諱) 빈(濱)은 영흥(永興)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를 지내시고, 증(贈)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완원군(完原君)의 군호(君號)를 받으셨고, 돌아가신 후에는 어명(御名)으로 릉(陵)을 봉(奉)했는데, 영주(榮州)의 종릉(鐘陵)이다. 4世 휘(諱) 의손(義孫), 호(號) 회헌(會軒)은 집현전(集賢殿) 제학(提學)으로 당시 집현전 3선생의 1인으로 칭송(稱訟)되셨다. 9世 휘(諱) 복기(復起), 호(號) 기봉(岐峯)은 무실(水谷)에 터를 잡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안동(安東)에서 의병(義兵)을 최초로 창의(倡義)하여..

선친 제문

제 문 슬프다 나의 둘째 아우 류경필(柳警必)은 갑인(1974)년 11월 15일에 살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 이 달 이 날은 소상이다. 가형(家兄) 동수(東銖)는 눈물을 닦으며, 평생 동안 의지하고, 명을 보전한 일들을 엮어 전일(14일) 저녁제사에 인하여 통곡하면서, 영결을 고한다. 참으로 괴롭고, 참으로 괴롭다. 이 세상에 살면서 무슨 잘못을 하늘에 얻었기에 오늘 군을 통곡하는데 이르게 되는가? 옛 달관자의 말에 「이미 이 세상에 왔다가 누가 저승으로 돌아가지 않겠느냐? 이 세상에 먼저 온 자가 뒤에 가고, 이 세상에 뒤에 온 자가 먼저 가기도 하는데 이것 또한 이치다」고 하였다. 슬프다. 나는 나이 14세에 관(冠)을 쓰고 장가들어 처가에 가서 있다가 집으로 돌아오는데, 채거리에 이르러 아..

초유일도사민문

초유일도사민문(招諭一道士民文) 鶴峯 金誠一 선생은 1592년 5월 4일 초유사의 명을 받고 함양에 당도하니 고을은 비었고 수령과 늙은 아전 몇 사람이 있는데 즉석에서 붓을 들어 ‘초유일도사민문’을 草하였다. 그 원문은 한문인데 감동을 주는 명문이다. 그러나 안동에서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은 한문으로 된 글이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 초유문 이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의병창의의 바탕이 되었다고 느끼면서 쉽게 풀어서 여기에 싣는다. - 1992년 綠野 柳 仲榮 - 일찌기 경험하지 못한(未曾有) 국란(國亂)을 당하여, 방어용 장애물과 간성이 바람결에 달아나고 무너졌으니, 우리 백성은 누구를 믿어 흩어져 도망가지 않겠는가! 이때가 뜻있는 선비(志士)는 창을 베개 삼을 때다. 충신(忠臣)은 국가를 위해 죽을 날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