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글/번역

선친 제문

록야綠野 2011. 5. 31. 11:15

 

제   문

 

 슬프다 나의 둘째 아우 류경필(柳警必)<諱 東鐸의 字>은 갑인(1974)년 11월 15일에 살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 이 달 이 날은 소상이다. 가형(家兄) 동수(東銖)는 눈물을 닦으며, 평생 동안 의지하고, 명을 보전한 일들을 엮어 전일(14일) 저녁제사에 인하여 통곡하면서, 영결<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영원히 이별하는 것>을 고한다.

 참으로 괴롭고, 참으로 괴롭다. 이 세상에 살면서 무슨 잘못을 하늘에 얻었기에 오늘 군을 통곡하는데 이르게 되는가?  옛 달관자<사물의 진실을 꿰뚫어 봄으로서 세속을 벗어나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의 말에 「이미 이 세상에 왔다가 누가 저승으로 돌아가지 않겠느냐? 이 세상에 먼저 온 자가 뒤에 가고, 이 세상에 뒤에 온 자가 먼저 가기도 하는데 이것 또한 이치다」고 하였다. 슬프다.

 나는 나이 14세에 관(冠)을 쓰고 장가들어 처가에 가서 있다가 집으로 돌아오는데, 채거리<임동장터>에 이르러 아우가 태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한 걸음으로 달려가 어머니께서 구로(劬勞)<자녀를 출산>하신 이불 속에서 군의 얼굴을 보았다. 불러보고, 어루만지며, 중하게 여기고 어렵게 여겼으며, 내가 세상에 태어난 후 처음 있는 지극히 즐거운 일이었다.

 군이 웃으며 엉금엉금 기어 다닐 때에 이르러 양지양능(良知良能)<교육이나 경험에 의하지 않고 선천적으로 사물을 판단하고 행할 수 있는 뛰어난 정신적, 신체적 능력>하였고, 가장 어버이를 사랑하고 형을 공경하였다. 또한, 의용<얼굴의 모습>이 풍후<덕성스러움>하고 성도(性度)<성품의 정도>가 화완(和緩)<화합하고 너그러움>하며, 한 마디 하는 말과 한 가지 행동도 어른들의 사랑을 받지 않음이 없었다. 매양 집에 온 모든 빈객<손님>들은 아우가 형보다 낫다고 하였는데, 나도 이를 감수<달게 받아드림>하면서 진실로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대개 실상이기 때문이었다.

 군이 공부할 나이에 이르러 우리 가정의 규범에 따르며, 새로운 것, 옛 것을 따르지 않았다. 처음 소미통감절요(少微通鑑節要)를 시작하여 대학ㆍ중용ㆍ논어ㆍ맹자를 섭렵<널리 읽음>하고, 시경을 다 읽었다. 분별하고 민첩하게 깨달음은 조금 늦었으나 궁구<깊이 파고들어 연구> 함은 여유가 있었고, 발휘<떨치어 들어냄>와 성장(成章)<글짓기>에는 능하지 못하였지만 실천과 이행<행동으로 옮김>은 적합<꼭 들어맞음>하였는바 이는 사친(事親)<어버이 섬김>에서 증험 할 수 있었다. 빗질하고 댕기 매고 비녀를 꽂는 수식<몸단장>을 일삼지 않고, 오직 수족과 두목(頭目)<머리와 얼굴>을 지키는 데 힘썼다. 선반에 의상이 넉넉하게 있을 것보다는, 오히려 심지(心志)<뜻한 바의 마음>와 원욕(願慾)<소원과 욕망>에 어긋남이 있을까 두려워하였다. 나아가고, 물러나고 대답하는 것을 공손하고 삼가 함을 살피지 않아도 좋았으며, 신체와 발부<피부와 모발>가 손상됨이 없었는데 이는 공경이 사랑보다 나음이 있어서이며, 어버이로 하여금 자신을 잊게 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수세(需世)<세상살이>에 이르러서는 사무에 응할 적에는 매양 행위를 차라리 진실(眞實) 되게 하다가 이루지 못함이 있더라도 교묘하게 허식<겉치레>으로써 기도(企圖)<어떤 일을 이루려고 기획함>를 하지 않으며, 무능(無能)하다는 기롱(譏弄)<실없는 말로 농락함>을 당하더라도 자랑하고 현혹 시켜 덕에 손상됨이 없었다. 비록 이해(利害)<경제적으로 덕 되고 손해됨> 사이에는 소홀<대소롭지 않게 여김, 엉성하게 생각함>하지만, 완급(緩急)<조용하고 급함>한 일은 반드시 자세히 살피며 얼굴에는 포만(暴慢)<포악하거나 거만함>한 빛이 없고 행실은 사맥(邪麥)<간사하거나 바보스러움>하지 않으며, 풍설(風說)<근거 없는 이야기>에 동요되지 않고 속상(俗尙)<시속에서 숭상하여 좋아하는 일 즉 유행>에 달려가지 않으며, 무사하다고 일을 발생시키지 않으며, 모르는 것으로 안다고 말하지 않으며, 상고할 수 없는 말은 극히 조심하였다. 특히 쓸 수 없는 말은 싫어하였다. 의(義)로운 것이 아니면 비록 얻은 것이지만, 소유하지 않으며, 인(仁)을 당 하여는 비록 허비함<경제적 손실>이 있더라도 이를 교계(較計)<계산하여 비교>하지 않았다. 군의 일생 이력을 생각해 보면 자신은 남을 용서함이 있지만  남에게 용서받음이 없었고, 남이 차라리 자신을 저버릴지언정 자신이 남을 버리지 않았다.

 항상 내가 단서(短緖)<부족한 점>가 많음을 근심하기도 했다. 나는 편협한 성격이 있었으나 군의 넓은 도량에 힘입었고, 경직(勁直)<굳세고 곧음>한 행실이 있었으나 군의 교정에 힘입었고, 급히 성냄이 있었으나 군의 완화함<화합하고 너그러움>에 힘입었고 소활(疏闊)<사귀는 모습이 친밀하지 못함>한 병통이 있었으나 군의 진밀(縝密)<친밀한 인간관계>에 힘입었다. 구구한 문자를 짓는 일에 매양 내가 많이 고생함을 생각하였고, 지정 간 혐의 없는 곳에는 혹 베틀에서 나온 것<길삼에서 생산된 물자>으로 넉넉하게 일상의 수용으로 삼았다. 풍부함이 있지 않은 형편에서 어찌 생각 없는 사람이었겠는가?

 슬프다. 내가 군과 더불어 동기 동포로서 한 번 이 세상에 태어나 형제가 된 지 육십삼 년에 이르렀다. 지난 갑술년<1934년>에 우리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셨다. 이 때,  아!  우리 삼남 이녀는 어린아이가 젖을 잃은 듯이 애처롭고 애처로운 정상을 형용할 수 없었다. 장사를 지낸 뒤 얼마 되지 않아 두 여동생이 각각 시가로 돌아갔다. 또, 다음 군이 집을 지어 분가하고, 계군(季君)<끝에 동생>이 먼 만주로 떠났다. 이는 모두 나의 우애 없는 소치<탓>였다. 계군의 풍상(風霜)<바람과 서리 즉, 어려운 세상살이>과 경과(經過)<살아가는 모습>를 적은 서신을 받으면 군과 함께 눈물을 머금고 읽은 것이 몇 번이나 있었다. 우리 편친(偏親)<홀로 계신 아버지>을 봉양함에 있어서 항상 군의 집에서 조석으로 맛있는 음식을 보내왔고 추울 때나 더울 때에 적절하게 지낼 수 있었는데 진실로 군의 지성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어찌 능히 할 수 있었겠는가? 이로써 콩을 먹으며 물을 마시는 엷은 봉양을 할 수 있어 팔천세의 높은 향수를 원하였다. 그런데, 일기(一紀)<12년>에 반도 되지 않아 하늘이 또 벌을 내렸다. 슬프다. 나의 쇠잔한 명의 길이 먹이 찾는 굶주린 고기처럼 되었다. 계군은 만리 밖에서 분상(奔喪)<멀리서 친상을 당하고 집으로 급히 돌아가는 것> 으로 하늘을 우러러 부르짖으면서 왔다가 며칠 후에 떠나 삼년 동안 몇 번이나 환산(桓山)<(마을의 어귀에 나무를 심어 쉼터로 만든 장소>에서 이별하며 울었다.

 이후부터 인간의 고로(孤露)<외롭고 의지할 데 없는 이슬 같은 모습>가 되었고 오직 나와 군이 서로 명(命)을 유지하며 풍상(風霜)과 세겁(世劫)<외부로부터의 압박>에 전도<엎어지고 넘어짐>하면서 지내왔다.

 기축 경인년<1949, 1950년> 혼란할 때 내가 잠시 안동으로 옮겨가 살았고, 군은 혼자 고리(故里)<고향 마을>에서 살았다. 왕래하면서 완급<급하거나 여유로움>이 있을 때 군으로 하여금 초심전려(焦心煎慮)<심히 애태움>케 한 사실을 다 헤아릴 수 있겠느냐. 불의<생각지도 못한 상태>에 포성<포탄, 폭탄 터지는 소리>이 한 번 나니 사람들이 풍비박산<사방팔방으로 흩어지는 모습>하였다. 그리하여 나도 동쪽으로 귀환하여 내 집에 가지 않고 군의 처소에서 하루, 이틀, 몇 순삭(旬朔)<10일과 초하루>동안 지냈다. 싸움이 조금 완화<여유 있게 변화>될 때에 이르러 죄가 없는 데도 죄가 군에게까지 미쳐 한꺼번에 모든 가족을 떠나서 여러 날과 밤을 가석(嘉石)<시멘트 바닥>에서 지냈다. 이 때, 읍내 경색을 멀리서 한 번 바라보니 잿더미로 변해 버렸고 잠시도 머무르면서 몸을 의지할 곳이 없었다. 나는 혼자 황허(荒墟)<황폐하고 폐허>한 터에 가서 있자, 군이 용마루<옥상> 모퉁이에 나와 서서 서로 바라보고 손을 흔들어 각각 가고 온 것을 알았다. 이날 정경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이미 이 세상에 명을 붙이고 산다면, 생명을 보전할 사업이 없을 수 없다. 나는 전지가 있으나 누구의 손을 빌어 농사를 지으며, 손은 있으나 누구를 빌어 경작할 것인가. 내 어린아이<후영>가 밭을 갈면 군이 소를 몰고 와 밭을 갈아주어 십여 년 동안 먹고 마실 수 있었다.

 사소하고 미세한 것에 이르러 한 가지 옷을 입는 것, 한 가지 맛있는 음식도 내가 입거나 먹지 않으면 군이 먼저 하지 않았다.

 손이 와서 대접할 것이 없으면 군이 반드시 제공해 주었고 손이 갈 때 행자를 줄 것이 없으면 군이 반드시 행자를 보내 주었다.

 조상의 봉사(奉祀)<제사 받드는 일>에 있어서 우리 부와 모의 제사가 모두 칠ㆍ팔월에 있는데 이 때는 새것과 옛 것이 교체되는 시기이다. 제수를 내가 근심하지 않도록 마련해 주었는데 이렇게 한 지 사십 년이나 되었다. 흉년을 만나 할아버지, 아버지 이상 팔구 위(八九位)의 시사 제수도 군이 혼자 담당하였다.

 선대 정자를 수리하고 선산에 석물<비석이나 상석>을 세운 것에 이르러 사람들이 내가 경영하여 이루었다고 말하였지만 실은 군의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 세상을 돌아 보건대, 누가 군과 같은 아우를 둘 수 있겠느냐. 슬프다.

 내가 금일에 가장 한이 되는 것은 군으로 하여금 소시에 두루 명산(名山), 대천(大川), 웅도(雄都), 거진(巨鎭)<이름난 관광지>을 유람하여 조금이라도 가슴속에서 울적함을 씻게 하지 못하고 시골에서 자신을 관리하는 궁핍하고 힘 드는 일민(逸民)<학식과 덕망을 갖추었으나 벼슬은 하지 안은 사람>을 만든 것이다. 군으로 하여금 부지런히 공부를 하게 하였다면, 일찍이 삼분(三墳), 오전(五典), 팔색(八索), 구구(九丘)<각종 철학>에 힘을 크게 베풀지는 못하더라도 신상의 명성은 크게 얻었을 것인데, 전원을 관령(管領)<관리 경영>하고, 한산한 천방(天放)<하늘 변두리>에 던져진 사람이 되었을 뿐이다.   군의 오래된 병을 일직이 전문 명의에게 진찰 받게 하였더라면 다행히 불가사의한 기이한 기술을 얻어 생을 연장하는 한 방법이 되었을 것인데, 오륙 개월 연속되는 동안에 어찌 행하지 못하였던가! 이런 이를 군의 형이라 말할 수 있으랴. 슬프다.

 전에 군이 발병하여 처음으로 자리에서 누운 날, 위태한 증세로 보아 치료할 방법이 없었는데, 질아 형제가 무방(無方)<방법이 없음>의 치료를 위하여 어제는 동으로 갔다가 오늘은 서쪽으로 가고, 아침에 김가, 저녁에는 이가에게로 가서 약을 얻어 만방(萬方)으로 쓰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정신이 착란(錯亂)<심히 어지러움>하고 기거<일상생활>가 무상<일반적인 모습이 아님>하였다. 매양 집을 나설 때는 반드시 나의 집으로 지향하여 와 방에 들어와 조금 누워 휴식하다가 돌아가곤 하였는데 단단한 나를 향한 일념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이 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슬퍼하면서 군이 오고 감을 살펴보았다. 진실로 미련한 목석과 같지 않은가? 어찌 군보다 먼저 가려고 하지 않았겠으며, 이를 알지 못하랴.

 창연(脹然)<어렴풋이 보일 듯 말듯>히 생각해 보니, 지난 날 내가 외출하였다가 하루만 늦게 돌아와도 군이 반드시 타전을 보냈고, 이틀 늦게 돌아오면 반드시 사람을 보냈으며 내가 돌아오도록 간절히 바라고 울적해 하였다. 그런데, 지금 군은 어디를 갔으며, 지연됨이 일년 열두 달에 이르게 되었으나 내가 장차 어느 곳에 타전을 치며, 어느 곳에 사람을 보내야 하는가? 이를 생각하니 뼈대가 차가워지고 흐르는 눈물이 뜨거워지며 만사가 그만이다. 어찌할 수가 없구나. 슬프다.

 군의 유택(幽宅)<묘 자리>은 우리 왕고(王考)<조부>묘 계하에 있고, 또 우리 부모 묘 상하에서 서로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 있다. 알 수 없구나, 유명이 다르지 않아 구천에서 천고에 자천(慈天)<하늘같은 자애>이 덮어주는 아래에서 유희하고 유락(唯諾)<순종하여 응락 함>할는지? 이것이 혹 군의 평생  동안 효사(孝思)<효도함>의 만분의 일이라도 위로가 되는 것이다.

 군은 네 어린 손자를 두었다. 이 중 기정은 비록 성동<15세>이 되었지만 다년간 집을 떠나 있어서 어른을 섬기는 절차를 보고 익히지 못하였다. 그러나 지난날 군이 입원하던 날에 제반 간호의 일을 직접 다 하였는데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또, 군의 상중에 뛰면서 슬피 울기를 예를 아는 자와 같이 하였다. 기한은 무지한 어린아이라 할 수 있는데, 흐느껴 울어 영구를 보낼 때 곁에 있는 사람을 감동시켰다. 이는 천부의 비상한 것이었다. 두 어린 손자 기현, 기혁 또한 비범하다. 이는 군이 물 주어 가꾼 뿌리에서 보답하는 것이리라.

 슬프다. 밤이 어찌 이렇게 길며, 잠들기 어렵구나. 죽지 않은 외로운 몸이 전전반측<누워서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함>하면서  몸을 어루만지며 탄식만 하게 된다. 괴롭고, 괴롭다. 이제 누이동생 이(李)ㆍ김(金)실은 처지가 대략 같고, 나이 칠십에, 반 천리밖에 살고 있다. 음신(音信)<전화통신>은 계속 듣고 있지만 사는 정황은 말할 만한 것이 없다. 슬프다. 계군은 타향에서 살고 있다. 살아가는 일이 절박하고, 여러 해 동안 겪어온 천식으로 명이 조석에 어떻게 될 상태에 있다. 이는 군이 당일에 목격한 현황이었다. 지난 날 군이 낙지(落地)<세상에 태어남>한 날<2월 18일>에 계군이 겨우 병든 몸을 이끌고 왔다가 돌아갈 때 군의 빈소에서 크게 통곡하면서 영결을 고하기를 「이 쇠잔한 목숨으로 또한 몹시 추운 겨울, 내달에 오게 될지 기약할 수 없습니다. 알 수 없습니다. 소상 때에 오게 될지 못 오게 될지?」고 하였다. 인정이 이에 이른 것을 말하게 되니 정신이 어지러워 넘어진다. 군이 세상을 떠난 뒤 금년 초하<첫여름>에 우리 조씨 숙모가 작고<돌아가심>하였고, 또 며칠이 지나지 않아 효석(孝錫)<柳東胤의 字>동갑이 작고하였다. 내 동갑으로는 이 늙은이만 살아 있었는데, 밖에 나가 보았으나 갈 데가 없고 집에서 함께 모여 말할 사람이 없다. 슬프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기러기는 서리 내리는 하늘에서 울부짖으며, 할미새가 언덕에서 울고 있구나. 우우양량(踽踽涼涼)<외롭고 처량함>하도다. 내가 이와 같지 않기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다. 군이 만약 나의 이런 회포<가슴속에 품은 생각>를 안다면, 군이 나를 슬퍼함이 내가 군을 슬퍼하는 것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다. 괴롭고 괴롭다. 눈물을 마시며 마음을 억제하기 어렵다. 천고(千古)<대단히 오랜 옛날부터 지금까지>에 인간에 있어서의 형과 아우의 이런 영결이 있단 말인가?

 군이여, 군이여, 와서 흠향하라.

                                         1975.11.14.               [형: 류 동 수]

 

 

프리지아 - 엄마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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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先親께서 평소에 어떤 모습으로 사셨는지를 伯父主께서 한문으로 소상히 표현하셨다.

 妹夫 권호기 君이 번역하였으나 용어가 어렵다기에 내가 <  > 안에 쉬운 말로 풀어서 썼다.

 

 

                           2003년   3월    3일         류 중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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