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진사 류소휴 이후 6

대야(大埜)류건휴(柳健休)

류건휴(柳健休) (1768~1834) [정의] 조선 후기 안동 출신의 유생.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강(子强), 호는 대야(大埜). 아버지는 류충원(柳忠源)으로 안동의 수곡[한들]에서 거처하였다. [활동사항] 류건휴(柳健休, 1768~1834)는 18세가 되던 1785년(정조 9) 족숙인 류장원(柳長源)에게 수학하였다. 스승이 세상을 떠나자 손재 남한조(南漢朝)에게 수학하였다. 만년에도 학문에 전심하여 강회가 있을 때는 반드시 좌장으로 추대되었다. [저술 및 작품] 동유사서해집평 東儒四書解集評 柳健休 編, 石版本, 6卷3冊, 크기:28.8×18.6㎝, 表題:四書集評, 序:柳必永, 識:柳健休(壬子), 跋:柳淵龜(1934)·柳淵昌 류건휴가 류장원의 사서주석 연구를 계승하여 만든 것이다. 『회재..

소과(小科) 또는 사마시(司馬試)

소과(小科) 또는 사마시(司馬試) 소과(小科) 또는 사마시(司馬試)라고도 한다. 고려시대 국자감시(國子監試)와 승보시(陞補試)를 계승한 것으로, 진사시는 전자를, 생원시는 후자를 계승하여 성립된 제도이다. 생원·진사시는 생원시와 진사시로 나뉘어져 있었다. 생원시는 오경의(五經義)와 사서의(四書疑)의 제목으로 유교경전에 관한 지식을, 그리고 진사시는 부(賦)와 시(詩)의 제목으로 문예창작의 재능을 각각 시험하였다. 그리하여 합격자에게 생원 또는 진사라고 하는 일종의 학위를 수여하였다. 한 사람이 같은 해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응시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양시(兩試)에 다 합격한 사람을 역시 양시라고 하였다. 생원·진사시에는 3년에 한차례씩 정규적으로 실시하는 식년시(式年試)와 국왕의 즉위와 같은 큰 ..

조부 묵와 류효연 유사

祖考府君 遺事 府君의 諱는 효연(孝淵), 字는 순여(舜余) 호는 묵와(黙窩)다. 우리 柳씨의 본관은 전주이며, 완산백 휘 습(濕) 을 상조로 한다. 그 3세 휘 의손(義孫) 호 회헌(會軒)은 집현전 학자로 뽑혀서 당시 집현전 3 선생 중 1인으로 칭송됐다. 9세 휘 복기(復起) 호 기봉(岐峯) 은 무실(水谷)에 처음으로 터를 잡아서 덕업을 쌓았다. 14세의 휘 화현(和鉉) 호 송음(松陰)은 은덕 (隱德) (숨은 덕)을 쌓았다. 두 아들 중 장자 충원(츙원)의 차자 소휴(韶休)는 성균관 생원인데 후사가 없었다. 숙부 민원(敏源)이 재종숙부 지현(至鉉)의 양자로 갔는데 그의 아들 정휴(廷休)는 종숙부 연원(淵源)에게 양자 가서 그의 아들 혼문(渾文)이 또 우리 집 生員公의 양자로 되돌아왔다. 그의 아들 휘 ..

柳渾文 墓誌

柳渾文 墓誌 족숙(族叔) 관호(觀鎬)씨가 일찍이 슬픈 낯빛으로 나에게 말하였다. “왕고부군(王考府君)은 우리 집안에서 기업(基業)을 열고, 넉넉함을 드리운 은택(恩澤)이 있으시네, 게다가 숨은 덕망(德望)과 심오(深奧)한 행실(行實)이 있어서 민멸(泯滅)되어서는 안 되는데도, 불초배(不肖輩)가 끝내 한 편의 사적(事蹟)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 적요(寂寥)한 묘표(墓表)나 묘지(墓誌)로 구릉과 골짝이가 뒤바뀌는 근심⟦陵谷之虞⟧에 대비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며, 또한 병필가(秉筆家)의 가문(家門)을 장대(長大)하게 하려하지 않으니, 자네는 어찌하여 힘쓰지 않는가?” 나 연집(淵楫)은 감당할 수 없어 사양하였으나, 질책(叱責)이 더욱 부지런하여 마침내 감히 손을 씻고 아래와 같이 대략 서술한다. 공은 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