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암공 사적(龍巖公 事蹟)
公의 諱는 지잠(知潛) 자(字)는 락지(樂之)이며 號는 龍巖이다.
선계(先系)는 전주(全州)에서 나왔다. 고려조(高麗朝)의 완산백(完山伯) 휘(諱) 습(濕)은 시조(始祖)이며, 그의 子 諱 극서(克恕)는 직제학(直提學)이며, 그의 子 諱 빈(濱)은 직제학(直提學)이며 증 이조참판(贈 吏曹參判)이다. 그의 子 諱 의손(義孫)은 호(號)가 회헌(會軒)이며 집현전제학(集賢殿提學)인데 端宗이 손위(遜位)할 때 병(病)을 핑계로 全州에 돌아와서 소와정(笑臥亭)을 짓고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으며, 아우인 일집의(逸執義)로 참판(參判)에 증직(贈職)된 휘(諱) 말손(末孫)의 제삼자 휘 계동(季潼)을 양자(養子) 하였다. 휘 계동(季潼)은 증(贈) 도승지(都承旨)이며, 그의 자 휘(諱) 식(軾)은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으로 증(贈) 이조참판(吏曹參判)이니 바로 공의 고조(高祖)이다. 증조(曾祖)의 휘는 윤선(潤善)으로 인의(引儀)이며 조의 휘는 성(城)이며 사복시정(司僕寺正))인데, 안동 수곡에 터를 잡았으며 일찍 돌아가셨다. 숙인(淑人) 김씨(金氏)가 순절(殉節)하니 나라에서 정려(旌閭)가 내렸다. 아버지의 휘(諱)는 복기(復起)로 예빈시정 (禮賓寺正)으로 좌승지(左承旨)에 증직(贈職)되었는데 임란창의(壬亂倡義)의 공적으로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재차 증직되었다. 외숙(外叔) 학봉(鶴峯)선생에게 배웠으며 號는 기봉(岐峯)이다. 어머니는 영덕정씨로 참봉(參奉) 진(晉)의 따님이다.
공(公)은 1583년 3월 7일 수곡에서 태어났다. 6형제 중 셋째이며 체격(體格)과 용모(容貌)가 헌칠하고 생각의 폭이 심히 깊고 효도(孝道)하고 우애(友愛)하는 정도가 돈독(敦篤)하여 어버이와 형을 섬김에는 어떤 일에서나 직분(職分)을 다하였다. 아버지 기봉공(岐峯公)이 돌아가신 뒤에 당연히 분가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큰댁 앞에 집을 지어 함께 살았다.
1597년 丁酉再亂이 일어났을 때 공의 나이 겨우 열다섯 살이었다. 기봉공(岐峯公)이 사사(死士)를 모집하여 화왕상성(火旺山城)으로 출병(出兵)할 때 두 형이 따라갔다. 그 때 公도 몸을 떨치고 일어나 남아있고자 하지 않으니
기봉공(岐峯公)이 義롭게 생각하시어 허락(許諾)하였다.
진중(陣中)에는 영남(嶺南)의 이름난 의병장(義兵將)들이 모두 모였는데 公은 어린 나이에 참여(參與)하여 같은 일을 하였으니, 수성록(守城錄)을 살펴보면 그 일을 잘 알 수 있다.
1617년에 아버지 상을 당하고, 1623년에 어머니 상을 당하였는데 전후(前後) 거상(居喪)에서 례(禮)를 따라서 어긋남이 없었다.
만년(晩年)에 향내(鄕內)의 동지(同志)들과 함께 여씨향약(呂氏鄕約)에 따라 절목(節目)을 만들어서 집안에서 시행(施行)하였다.
1653년 8월 16일에 향년 71세로 서거 하여, 숲당 산 축좌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배위(配位)는 연안이씨 인의(引儀) 벼슬을 한 응(應)의 따님으로 연안군(延安君) 인문(仁文)의 현손(玄孫)이다. 1582년생으로 1667년에 서거(逝去)하여 공의 묘(墓) 합장(合葬)하였다.
2남 3녀가 있으니 남(男)은 간(檊)과 은(檼)이며 여(女)는 김희진(金希振)과 이담(李潭)과 권뢰(權賚)다. .......<以下 族譜 參照>.........
우리 기봉(岐峯) 도헌(陶軒) 父子分이 학문(學問)을 가전(家傳)하셨고, 효도(孝道)와 우애(友愛)로 法을 삼았는데, 公 이 훌륭한 資質을 타고나서 날마다 훌륭하신 아버지와 형을 모시고 학문(學問)을 닦아 가르침을 익히고 이를 행동으로 옮겼으니 모두 연원(淵源)이 있는 까닭이다.
효도(孝道)와 우애(友愛)가 가정(家庭)에서 들어나고, 충의(忠義)가 향토(鄕土)와 나라에 나타났으며, 만년(晩年)에는 다시 옛 사람의 일에 뜻을 두고 풍속(風俗)을 두텁게 하는 일을 책무(責務)로 삼았다. 비록 공(公)의 자세한 행실(行實)과 범절(凡節)은 세월이 오래되어 알 수 없으나, 큰 줄거리만 보아도 공의 평생의 뜻과 과업(課業)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當時)의 제문(祭文)을 살펴보면 효우(孝友)하고 순박(醇朴)하고 정직(正直)함과 풍류(風流)와 후덕(厚德)함은 모두가 인정(認定)하는 바이다.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은 “학봉(鶴峯)의 家法이 여기에 있다.”고 하였으며,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는 “조상의 전형(全形)을 그대로 본받았다.”고 하였고, 별좌(別座) 김규(金煃)는 “넓고 깊은(宏深) 재능과 도량(器局)이 뭇사람에 뛰어났다.”고 하였으니, 이 여러 君子가 어찌 아부의 말을 하였겠는가?
명(銘)하노니
효(孝)를 미루어 충(忠)을 하였으니, 행실(行實)이 성(盛)한 것이오.
가법(家法)을 미루어 향리(鄕里)에 미쳤으니, 교화(敎化)에 힘쓴 것이다.
근원(根源)이 깊고,적덕(積德)이 두터우니, 앞으로 후손에게 복록(福祿)이 있으리라.
從 七代孫 晦文 謹撰
※ 6대손 건휴(健休)는 號가 대야(大埜)인데 文學으로 先代를 이었으며, 소휴(韶休)는 생원이다.
7대손 락문(洛文)은 호가 방곡(方谷)이며,
8대손 치구(致球)는 생원이고, 치덕(致德)은 號가 근암(近庵)이며 學文을 했다.
1793년에 立碣하다.
※ 정신문화연구원 류점기가 1차 번역한 것을 2011. 7.12. 12대손 仲榮이 2차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