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글/遺事

선고부군 유사

록야綠野 2011. 6. 5. 23:01

 

                     

先考府君 遺事

   부군(府君)의 휘()는 동탁(東鐸), ()는 경필(警必)이시다. 우리 류()씨의 본관(本貫)은 전주(全州)이며 완산백) () ()을 시조(始祖)로 한다.

   그 3() ()은 영흥(永興)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를 지내시고,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완원군(完原君)의 군호(君號)를 받으셨고, 돌아가신 후에는 어명(御名)으로 릉()을 봉()했는데, 영주(榮州)의 종릉(鐘陵)이다. 4() 의손(義孫), () 회헌(會軒)은 집현전(集賢殿) 제학(提學)으로 당시 집현전 3선생의 1인으로 칭송(稱訟)되셨다. 9() 복기(復起), () 기봉(岐峯)은 무실(水谷)에 터를 잡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안동(安東)에서 의병(義兵)을 최초로 창의(倡義)하여 계사년 정월 초하룻날 밤 함창의 당교에서 왜군의 병참기지를 기습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으며 그후 4개월에 걸쳐 게릴라전을 펼쳐 많은 전과(戰果)를 거두었으며, 정유재란(丁酉再亂)(1597) 때는 향중에서 사사(死士)를 모집하셨는데 아들 5형제(兄弟)분께서 같이 가겠다고 하여 의()로움을 가상(嘉尙)하게 여겨, 6부자 분이 방어사(防禦使) 곽재우(郭再祐) 장군 휘하에서 1598년 승전(勝戰) 때까지 창령의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수성(守城)하는데 공헌(貢獻)하셨다. 전란(戰亂) 후에 기양서당(岐陽書堂)을 창건하여 후손(後孫)이 공부하는 터전을 만들고 많은 덕업(德業)을 쌓으셨다.   贈 吏曹參判이시다.

  부군(府君)5대조 휘()는 소휴(韶休)이며 성균관(成均館) 생원(生員)이시고, 고조(高祖)의 휘()는 혼문(渾文), ()는 한수당(閑睡堂)이시고, 증조(曾祖) 의 휘()는 치덕(致德), ()는 근암(近庵)인데, 일찍이 우뚝한 실력을 갖추어 한들에서 문중의 대문(大文)으로 명망(名望)을 얻으셨다. 조부의 휘()는 진호(震鎬), ()는 대졸재(大拙齋)이시며, ()는 휘()를 효연(孝淵), ()는 묵와(黙窩)이시, ()는 안동권씨(安東權氏) 병곡선생 구()의 후예로, 처사(處士) 준국(準國)의 따님이시다.

  부군(府君)은 3형제 중 둘째로 임자(1912)년 음력 218일 생이며, 한들에서 평생(平生)을 사셨다.

이하(以下) 先考府君人品에 관한 부분은 先 伯父府君께서 先考府君小祥 時에 남기신 祭文에서 옮긴 것임.

마음이 깊고 무게가 있었으며, 과묵(寡黙)했고, 유희(遊戱)를 즐기지 않았으며, 양지양능(良知良能) 하고, 어버이를 사랑하고, 형을 공경했다. 얼굴 모습이 덕성(德性) 스럽고, 성품이 너그러웠다. 한 마디 말과 한 가지 행동도 어른들의 사랑을 받지 않음이 없었다.

여덟 살 때부터 족숙(族叔) 야사(野史) ()(諱 承春)에게 배웠는데 소미통감절요(少微通鑑節要)를 시작하여 대학(大學)」 「중용(中庸)」 「논어(論語)」 「맹자(孟子)를 섭렵(涉獵) 하고, 시경(詩經)을 읽었느데, 분별하고 민첩하게 깨달음은 조금 늦었으나, 깊이 파고들어 연구하는 데는 여유가 있었다.

글을 짓고 발표하는 데는 능하지 못하였으나, 행동으로 옮기고 실천하는 데는 어김이 없었다. 이는 어버이 섬기는 일에서 잘 나타났다.

몸단장하는 것을 일삼지 않고, 오직 몸을 지키는데 힘썼다. 의복이 많아 여유 있는 것 보다는 마음속으로 꿈꾸어 이루고자 한 바에 어긋남이 있을까 두려워하였다. 일상의 행동을 공손하게 했고, 신체발부(身體髮膚)를 손상함이 없어, 어버이가 근심하지 않게 했다.

세상살이에서 어떤 일을 처리할 때는, 진실(眞實)되게 하다가 이루지 못함이 있더라도, 교묘하게 겉치레로 그 일을 이루려고 획책하지 않았으며, 무능하다고 놀림을 당할지언정 자랑하고 현혹시켜 덕에 손상됨이 없었다. 경제적으로 이득(利得)이 되고 손해(損害)되는 것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엉성하게 생각하는 면이 있어도, 일의 완급(緩急)은 반드시 자세히 살피며, 얼굴에는 포악하거나 거만한 빛이 없고, 행실에는 간사(奸邪)하거나 바보스럽지 않았다. 근거 없는 일에 동요(動搖)되지 않았고, 유행(流行)에 달려가지 않았으며, 무사(無事)하다고 일을 발생시키지 않았고, 모르는 것을 안다고 말하지 않으며, 상고(詳考)할 수 없는 말은 극히 조심하였고, 특히 쓸데없는 말을 싫어했다.

()로운 것이 아니면, 비록 얻은 것이라도 소유(所有)하지 않았고, ()을 당하여서는 비록 허비(虛費)함이 있더라도 이를 계산하거나 비교하지 않고 쫓았다. 자신은 남을 용서(容恕)하면서도 남에게 용서 받음이 없었고, 남이 자기를 저버릴지언정 자신이 남을 버리지 않았다. 도량(度量)이 넓고, 경직(硬直)되지 않고, 너그럽고 진밀(縝密)한 인간관계를 가짐으로서 모범(模範)이 되었다. 생활이 넉넉지 못했으나 지정(至情) 간에는 서로 나누었다.

  무진(戊辰)(1928)년에 영덕군 신안면 묘안(山內)平山 申氏 처사(處士) 세휴(世休)의 따님 후남(後男)을 배우자로 맞이하여 갑술(甲戌)(1934)년 봄부터 분가(分家)할 집을 지을 흙벽돌을 찍었는데, 그해 7월에 자친(慈親) 상을 당하고 어린 아이가 젖을 잃은 듯 애처로웠고, 장사(葬事)를 지낸 뒤에 두 누님은 시댁으로 떠나고 동생은 멀리 만주(滿洲)로 떠나고, 가끔 동생의 편지를 받아 눈물로 읽었다.

  이듬해 분가(分家)하였으나, 홀로계신 아버님을 위하여 조석(朝夕)으로 반찬을 만들어 보내고, 계절(季節)이 바뀔 때는 의복(衣服)을 마련하였는데, 안타깝게도 己卯(1939)8월 추석에 불의(不意)의 교통사고(交通事故)로 엄친(嚴親)을 잃었으니, 그 슬픔은 형언(形言)할 수가 없었다. 유월장(踰月葬)으로 1019일에 장사(葬事)지낼 때까지 계속 빈소(殯所)를 떠나지 않았으며, 조석(朝夕)으로 신흥곡(晨興哭)을 하였고, 3년 동안 상복(喪服)을 벗지 않았으며, 삭망(朔望)에는 묘소(墓所)를 살폈다.

  1939년 맏아들 대영(大榮)이 소아마비 증상이 가볍게 생겨서 동분서주(東奔西走)하며 치료했으나, () 성과가 없어서 간장(肝腸)을 조였는데, 8월엔 친상(親喪)을 당하시고 상중(喪中)不肖가 나서 겨우 첫돌 지나고 아직 수유기(授乳期) 인데, 1941년에는 어머니께서 큰 병이 나시어 반년(半年)이 넘도록 활동을 못하셨는데, 부군께서 성심(誠心)으로 약을 써서 다행(多幸)히 치료를 하셨다.

  그 후로는 오직 백씨(伯氏)와 형제분이 의지하면서 풍상(風霜)日帝의 압박(壓迫)에 엎어지고 넘어지면서 살아야 했다.

을유(乙酉)(1945)년 광복의 기쁨도 잠간, 국토는 두 동강이 나고 좌익(左翼)과 우익(右翼)의 권력(權力) 쟁취(爭取)의 피비린 싸움이 계속되면서 기축(己丑) 경인(庚寅)(1949~50)년에는 백씨(白氏)께서 무장공비(武裝共匪)의 야간(夜間) 습격(襲擊)을 피하여 안동읍(安東邑)으로 피난(避難)을 떠나시고 홀로 고향(故鄕)을 지키셨다.

  1950625일 북한군(北韓軍)의 남침(南侵)으로 전면전(全面戰)이 발생 하여 719일 안동역(安東驛)에 폭격(爆擊)이 시작되어 백씨(白氏)와 계씨(季氏)가 안동에서 한들로 돌아오셨으나, 큰집에는 전시(戰時) 산촌(山村)주민(住民) 소개령(疏開令)에 의하여 산골에서 소개를 당하여 4 가구가 살고 있는 형편이어서, 기거(寄居)할 집이 없어 셋집 식구가 모두 우리 집에서 기식(寄食)을 하셨으니 더위와 모기 파리 디딜방아로 보리방아 찧기 등의 고난이 대단히 심했다.

밤낮으로 인민군(人民軍)들의 밥해주기와 수곡동 인민위원회(人民委員會) 부위원장(副委員長)을 억지로 하라고 하니 거절(拒絶)했다간 어떤 불이익(不利益)을 당할까 두려워 직무(職務)를 회피(回避)하려고 다리에 상처를 내고 붕대를 감아 거짓환자가 되기도 하셨으며, 맏아들 대영(大榮)은 의용군(義勇軍)에 차출(差出)되었는데 재치(才致) 있게 도망처서 화를 겨우 면했으며, 부군(府君)께서는 군량미(軍糧米) 운반(運搬)에 노무자(勞務者)로 동원(動員)되어 청송 - 포항 경계까지 무거운 짐을 지고 가시는 등 당시의 생활은 표현하기조차 어려운 모습이었다.

그해 912UN군의 인천(仁川) 상륙(上陸)작전이 성공하면서 925(추석)에는 한들에도 인민군(人民軍)이 북쪽으로 퇴각(退却)하였으나, 부군께서는 인민군 점령(占領) 당시에 맡기 싫은 수곡동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했다고 해서, 안동경찰서 옥상에서 며칠 동안 구금(拘禁)되는 수모(受侮)를 겪어야 하셨다. 이때 안동읍(安東邑)은 온통 잿더미로 변했고 파괴(破壞)와 오염(汚染) 그 자체(自體)였다.

. 1951 ~52 양년에는 가뭄이 심하여 먹을 식량(食糧)이 없어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겨우 연명(延命)하면서 자식 교육(敎育)도 포기(抛棄)해야하는 참혹(慘酷)한 일을 당했다.<당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

  1960년에는 너무나 불편하게 기거(寄居) 하시던 토담집을 헐고, 존고종(尊姑從) 이세령씨의 사유림(私有林)을 산판(山坂) 하는데 현장(現場)감독(監督)을 하신 대가(代價)로 재목(材木) 한 차()를 얻어 가역(家役)을 시작하여, 5간 반침의 반듯한 목조(木造)시멘트 기와집을 지어 입택(入宅)하셨다.

  19615.16 군사혁명(軍事革命)이 일어나고, 재건국민운동(再建國民運動)이 활발(活潑)하게 움직이고, 이어서 새마을운동이 농촌(農村)경제성장(經濟成長)에 큰 힘이 되었다.

남의 토지(土地)를 얻어 소작농(小作農)을 하시면서, 일군을 고용(雇用)하여 마늘농사를 하셔서 목돈을 쥐었고, 아들 형제가 직장(職場)을 얻으면서 가사(家事)가 조금 여유(餘裕)를 얻었고, 농지(農地)를 매입(買入)하여 영농(營農)규모(規模)를 조금 늘였다.

  1963년 불초(不肖) ()에 입대(入隊)하여 이듬해 병()이 나서 6개월간이나 육군병원(陸軍病院)에 입원(入院)하고, 수술(手術)을 하고나서야 원대복귀(原隊復歸)를 했는데 그간의 마음고생이 심히 크셨다.

  1973년 고혈압(高血壓)과 당뇨(糖尿)와 변비(便秘) 등이 악화(惡化)되어 몸이 몹시 불편하셨다. 안동성소병원(安東聖蘇病院)에 입원 치료를 5회나 받고 한의원(韓醫院)의 처방(處方)도 다방면(多方面)으로 받았으나 병을 치료하지는 못하고, 갑인(甲寅)(1974)년 동짓달 보름날 향년(享年) 63세로 생()을 마치시고. 같은 달 19일 선대의 정자(亭子) 뒷산 조부(祖父) 산소(山所) 계하(階下) 유좌(酉坐)의 언덕에 장사(葬事)지냈다.

  오호 통재라! 부군(府君)께서는 祖國이 일제(日帝)의 무력(武力)과 강압(强壓)으로 합방(合邦)3년 후에 출생(出生)하셔서, 유교경전(儒敎經傳)을 중심으로 공부를 하셨는데, 큰선비가 되지는 못하셨으나, 인성(人性)이 너그럽고 온화(溫和)하며, 부모(父母)에 효도(孝道)하고 형제(兄弟)의 우애(友愛)가 돈독(敦篤)하셨다.

초년(初年)부터 농사(農事)에 전념(專念)하지도 않아서 전문 농사군도 못되고, 일군을 두고 상속(相續)받은 좁은 농지(農地)에다 소규모(小規模) 농사를 하시니 경제적(經濟的) 여유(餘裕)는 없었으나, 문중(門中)과 집안의 조상 받드는 일에는 빠지지 않으셨다.

  광복(光復) 후에 농지개혁(農地改革)으로 큰집 농토(農土)가 많이 줄어들어. 큰댁에도 여유롭지 못하셨고, 농력(農力)도 없어서 큰집 조카 후영(厚榮)이 성인(成人)이 될 때까지 큰집농사의 대부분을 주관(主管)하시다 보니 일만 많고 실속은 없는 모습이었다.

  선대(先代) 묘소(墓所)에 상석(床石)을 놓는 일, 정자(亭子) 건물(建物)의 노후(老朽) 된 부분을 보수(補修)하는 공사 에도 앞장서서 추진(推進)하셨고, 매년 겨울에 짚자리를 짜서 큰집 안방에 깔아 드렸다. 조상의 제수(祭需)준비(準備)나 손님의 반찬을 걱정하셨고, 수박 한 덩이 국수 한 그릇도 큰집에 먼저 보내 드리고 나서야 잡수셨다.

  슬프다! 일제 때 어머님의 고종(姑從)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선생께서 상해(上海) 임시정부(臨時政府)의 초대 국민대표자회의(國民代表者會議) 의장(議長)을 하셨고, 伯父府君의 장인(丈人)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 선생은 영양(英陽) 영해(寧海)의 의병대장(義兵大將)을 하시는 등 항일(抗日) 정신이 남달라서 일제(日帝)의 탄압(彈壓)과 감시(監視)가 심했으며, 신식(新式 공부를 못하셨기 때문에 광복(光復) 후에 사회활동(社會活動)을 하실 기회(機會)를 얻지 못하신 것은 오히려 떳떳한 결과라 하겠으나, 억울(抑鬱)함 또한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애닲도다의료기술(醫療技術)이 오늘의 수준(水準)으로 발전(發展) 했다면, 그렇게 빨리 돌아가시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답답함을 느낀다.

  나의 선비(先妣)는 영덕(盈德) 뫼안의 평산신씨(平山申氏), 처사(處士) 세휴(世休)의 따님으로, 모든 일에서 판단(判斷)이 명석(明晳)하셨으며, 부덕(婦德)을 훌륭하게 갖춘 분이셨다 . 음식 솜씨와 길쌈 솜씨가 우수(優秀)하셨고, 자녀교육(子女敎育)과 가사(家事) 제반(諸般)의 방향(方向)을 바로 잡는데 크게 기여하셨으며 선친(先親)께서 효도(孝道)하고, 우애(友愛)하고, 화목(和睦) 하는 일에 크게 내조(內助)하셨다. 1912815일에 나시어, 200694일 향년(享年) 95 세로 서거(逝去)하셨다. 장지(葬地)는 부군(府)과 합장(合葬)이다.

   23녀를 두셨는데 남()大榮 仲榮이고, ()貞基 信基 淑熙 .

   장남(長男) 대영(大榮)은 마골의 재령이씨(載寧李氏) 병인(秉仁)을 배우자로 맞이했고, 면사무소(面事務所) 촉탁(囑託)을 시작으로 중고등학교 행정실장(行政室長)과 안동교육청安東敎育廳) 학생도서관장(學生圖書館長)을 역임하고, 녹조근정훈장(綠條勤政勳章)을 받고 정년퇴임(停年退任)하셨다. 그의 아들 기정(基正) 은 성균관대학(成均館大學)에서 사서(司書) 자격증(資格證)을 받고, 숭실대학교(崇實大學校) 사서(司書) 팀장으로 있으며, 정산(井山)의 안동김씨(安東金氏) 태숙(台淑)을 배우자로 맞이하여 아들 종윤(鍾允) , 딸 수연(秀蓮), 수민(秀慜)(한양대학교 교육공학석사(碩士))이 있다. 수연(秀蓮)은 동복오씨(東福吳氏) 구용(求鏞)(會社員)을 배우자로 맞이하여 아들 승록(丞祿). 윤록(胤祿)을 낳았다. 맞딸 애진(愛辰)은 원촌(遠村)의 진성이씨(眞城李氏) 문성(文聲) <한솔 참마루 社長>을 배우자로 맞이하여 아들 윤룡(胤龍)(會社員), 딸 윤결(胤慶)(中等 日語敎師)을 낳았다, 둘째딸 옥규(玉奎)는 공주(公州)의 덕수이씨(德水李氏) 종봉(種奉)을 배우자로 맞이하여 아들 경렬(慶烈), 딸 승희(承嬉)(看護士)를 낳았다. 셋째 딸 영예(英藝)는 경북대학교(慶北大學校) 사범대학(師範大學)을 졸업(卒業)했고, 대구(大邱)의 안동권씨(安東權氏) 오균(五均)<會社員>을 배우자로 맞이하여, 아들 기민(奇敏), 딸 기은(奇恩)을 낳았다. 넷째 딸 미예(美藝)는 중등(中等) 한문교사(漢文敎師)이고, 김천(金泉)의 경주정씨(慶州鄭氏) 성식(聖植)<哲學博士 敎授>을 배우자로 맞이하여, 아들 호경(昊庚), 딸 나연(那淵)을 낳았다. 다섯째 딸 오진(五辰)은 학사(學士)로 국세청(國稅廳) 공무원(公務員)이다. 

   차남(次男) 중영(仲榮)은 영해(寧海) 상원(上元)의 진성이씨(眞城李氏) 대생(大生)을 배우자로 맞이했고, 초등학교(初等學校) 교사(敎師)를 시작으로 교감을 거쳐 장학사(獎學士)와 교장(校長)을 역임하고, 황조근정훈장(黃條勤政勳章)을 받고 정년퇴임(停年退任) 했다. 맏아들 기한(基漢)KAIST에서 이학박사(理學博士) 학위(學位)를 받고, 영국(英國) 런던의 Imperial College ()에 있는 Molecuer Vision 연구소(硏究所) 책임연구원(責任硏究員)이고, 서울의 안동권씨(安東權氏) 오경(五慶)<中等 國語敎師>을 배우자로 맞이하여. 아들 민석(旻錫)을 낳았다. 둘째아들 기현(基絃)은 서울대학교(大學校)에서 공학박사(工學博士) 학위(學位)를 받고, 미국(美國) 전자회사(電磁會社) AVAGO의 서울 연구소(硏究所) 수석연구원(首席硏究員)이며, 대구(大邱)의 안동권씨(安東權氏) 진숙(瑱淑)(韓醫師)을 배우자로 맞이하여. 아들 지석(枝錫), 딸 희진(喜瑱)을 낳았다. 셋째아들 기혁(基赫)KAIST에서 이학박사(理學博士) 학위(學位)를 받고, 대전(大田) 대덕연구단지(大德硏究團地)의 엔지노믹스EnzynoMics 여구소장(硏究所長)으로, 안동(安東)에서 안동권씨(安東權氏) 혜영(慧英)(碩士 中等敎師)을 배우자로 맞이하여, 아들 범석(範錫), 딸 혜성(惠星)을 낳았다. 맏딸 기주(基珠)는 수간호사(首看護師), 간호학(看護學) 강사(講師)이며 서울에서 울진장씨(蔚津張氏) 인영(仁榮)<檢察公務員 法務士>을 배우자로 맞이하여. 딸 지윤(智允) 지예(智睿)를 낳았다, 둘쨋딸 은영(恩英)은 망천의 의성김씨(義城金氏) 병권(炳權)<대한제당 次長>을 배우자로 맞이하여, 아들 시욱(時彧), 딸 예지(叡志)를 낳았다.

 

   장녀(長女) 정기(貞基)는 임하(臨河)의 의성김씨(義城金氏) 시일(時鎰) <地方書記官. 安東市 保健觀光局長>을 배우자로 맞이하여, 맏아들 종훈(鍾勳)은 공학박사(工學博士)로 동양대학교 교수(敎授), 동대학원장(大學院長)이며 김황주(金璜珠)를 배우자로 맞이하여, 아들 경수(璟洙), 딸 효진(孝珍)(碩士)을 낳았다. 둘째아들 종성(鍾成)은 공학박사(工學博士)로 교수(敎授)이며 이윤정(李侖貞)(中等敎師)을 배우자로 맞이하여, 딸 은진(恩珍) 근영(瑾永)을 낳았다.

딸 명숙(明淑)은 반남(潘南) 박씨(朴氏) 경춘(敬春)(農協員)을 배우자로 맞이하여, 아들 헌익(憲益) 헌진(憲震), 딸 혜연(慧娟) 을 낳았다.

 

 

   차녀(次女) 신기(信基)는 영주(榮州)새내(砂川)의 달성서씨(達城徐氏) 중구(重九)를 배우자로 맞이하여, 맏아들 승용(承鏞)會社員이고, 이진(李珍)(首看護)을 배우자로 맞이하여, 아들 정원(正源), 딸 정인(貞仁)을 낳았다. 둘째아들 태용(兌鏞)은 학사(學士)로 무용(舞踊) 학원장(學院長)인데, 김영랑(金鈴朗)(舞踊士)을 배우자로 맞이하여 딸 지우(智優)를 낳았다. 맏딸 명순(明淳)은 간호과장(看護課長)이며 여흥민씨(驪興閔氏) 진기(鎭基)(KT 課長)를 배우자로 맞이하여, 아들 경록(景綠), 딸 지현(志賢)을 낳았다둘째딸 인숙(仁淑)은 석사(碩士)로 간호과장(看護課長)이며 해주오씨(海州吳氏) 세일(世一)(會社員)을 배우자로 맞이하여, 아들 원석(元錫), 딸 나영(娜英)을 낳았다.

 

   삼녀(三女) 숙희(淑熙)는 영해(寧海)의 안동권씨(安東權氏) 호기(虎基) <漢文學者成均館大學校 존경각(尊經閣) 次長, 아시아學術院 部署長>를 배우자로 맞이해서, 아들 재현(在鉉)과 딸 윤희(允姬) 명희(明姬)가 있는데 모두 학사(學士), 회사원(會社員)이다. 재현(在鉉)은 영양남씨(英陽南氏) 동희(東熙)를 배우자로 맞이하여 딸 지원 시원을 낳았다.

 

   오호 통재라! 세월이 흘러 부군께서 돌아가신지 36년이나 지났다. 돌아가시던 날 미세(微細)한 말소리로  

  “형님(伯氏)의 문집(文集)을 내 손으로 만들고 싶었는데......” 라고 안타까움을 말씀하셨는데, 1997년 큰댁 종형(從兄)께서 주선(周旋)하여 上 下 두 권의 문집(文集)을 만들어서 지정가(至情家)에 배포(配布)하였으니, 만약 구원(九原)에 계시는 부군(府君)께서 이 사실을 아신다면 무척 기뻐하실 것이라 사료됩니다. 말씀은 안 하셔도 하시고 싶었던 일이 어찌 그일 뿐 이었겠습니까?

 

  세월이 점점 멀어지고 날로 잊어버려서 기록할 자료를 찾던 중, 선백부부군(先伯父府君)께서 남기신 제문(祭文)을 살피고 가느다란 기억을 살려 평상시(平常時)에 보고 들은 만분지일(萬分之一)이라도 우리 동기(同氣)와 자질(子姪)들에게 비슷하게나마 전()해지기를 바라면서 불초(不肖) 仲榮은 눈물을 삼키면서 삼가 씁니다.   - 2011 현충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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