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글/번역

초유일도사민문

록야綠野 2011. 5. 31. 10:59

 

    초유일도사민문(招諭一道士民文) 

     鶴峯 金誠一 선생은 1592년 5월 4일 초유사의 명을 받고 함양에 당도하니 고을은 비었고 수령과 늙은 아전 몇 사람이 있는데 즉석에서 붓을 들어 ‘초유일도사민문’을 草하였다. 그 원문은 한문인데  감동을 주는 명문이다. 그러나 안동에서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은 한문으로 된 글이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 초유문 이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의병창의의 바탕이 되었다고 느끼면서 쉽게 풀어서 여기에 싣는다.     - 1992년   綠野     柳 仲榮 -

 

 일찌기 경험하지 못한(未曾有) 국란(國亂)을 당하여, 방어용 장애물과 간성이 바람결에 달아나고 무너졌으니, 우리 백성은 누구를 믿어 흩어져 도망가지 않겠는가!

 이때가 뜻있는 선비(志士)는 창을 베개 삼을 때다. 충신(忠臣)은 국가를 위해 죽을 날임에도 끝내는 아무런 호신(護身)의 보장이 없는 산골에 숨었으니, 설사 적을 피해 몸을 보전한다 해도 열사(烈士)는 오히려 부끄러이 여길진대, 군신대의(君臣大義)는 하늘과 땅의 참된 기강(天經地義)이며, 떳떳한 백성의 길(民彝))이 아니던가?

 임금님(君父)께서 몽진(蒙塵)길에 오르시고 종묘사직(宗社)이 거꾸러지려 하고 만백성이 썩어문드러지고 나라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이때에 머리를 싸매고 쥐 숨듯 하지 말고, 떨쳐 나와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함께 살아남을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찌 백성의 도리(民彝)를 다한다 할 것인가?  

 영남은 본시 인재(人材)의 창고라 일컬어 왔으며 근래에 퇴계退溪와 남명南冥이 한 때에 나서 도학을 밝히고(彰明) 인심을 맑게 하니, 사람의 기강을 바로잡는 것으로 자신의 책무를 삼았고, 선비 된 자의 가르침으로 사숙자(私叔者)<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으나 은근히 존경하고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가 점점 많아졌으며, 평일에 성현의 글을 많이 읽어 스스로 넉넉하다고 자부하였다. 옛날 충신열사는 성패(成敗)로 뜻을 바꾸지 않았고 강약으로 기가 꺾이지 않았다. 마땅히 할 바 정의라면 비록 백번 싸워 백번패하더라도 오히려 빈주먹으로 시퍼런 칼날과 맞서 만 번 죽어도 후회치 않았는데,  적이 비록 강하다고 하나, 이미 깊이 들어와 전술상 불리한 위치에 있으니 어찌 쉽게 돌아갈 수가 있겠는가! 

 우리가 비록 겁탈 당하였다 하더라도  어찌 한 결같이 당할 수는 없지 않는가!

충의가 격하면 약함이 오히려 강하여 지고, 적은 것으로 많은 것을  대적할 수 있으니, 이때 뜻을 한번 움직임(一轉)에 달렸다.

 격문(檄文)이 도착하는 날에는, 수령은 일읍(一邑)을 효유(曉諭)<알아듣게 일러줌>하고, 변장(邊將)은 사졸(士卒)을 격동(激動)시키고, 문무조관, 아비와 늙은이와 선비(父老儒生) 등은 각기 사람에게 서로 전하여 동지(同志)를 불러 모으고, 충의(忠義)로 굳게 뭉쳐라. 돈이 있는 백성(富民)은 수레로 곡식을 나르고, 용사(勇士)는 충갑(冲甲)의 병(兵)과 같이 분연히 일어나면 무리(群)의 함성이 크게 떨쳐 용기백배되어 괭이 고무래도 예리한 무기로 바뀔 것이다.

 당직(當職)은 한 낱 썩은 선비(腐儒)에 불과하다.  비록 군(軍)의 기예는 못 배웠으나, 군신대의(君臣大義)는 조금 들었으니 일도(一道)가 전복(顚覆)되려는 때에 소임을 받아 옛 충신열사의 뜻을 높이 추모하는 바이니, 의사(義士)들은 힘을 내어 빨리 공을 세우기 바라노라. 조정의 상격(賞格)이 뒤에 있을 것이니 마땅히 잘 알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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