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종택(定齋宗宅) 이야기
* 임동면 한들에 있었는데 임하댐으로 만우정과 함게 산소 곁으로 이건했다.
*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1777~1861)은 퇴계의 적전(嫡傳)을 이어받은 대학자(大學子)다. 본관은 전주(全州)요 자는 성백(誠伯), 호는 정재(定齋)로 한평(寒坪) 류회문(柳晦文)의 아들이다.
선생은 1805년(순조5)에 문과에 급제한 뒤 지평, 정언을 거쳐 대사간을 지냈고,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1855년 (철종6) 장헌세자를 추존(追尊)하는 문제로 상소했다가 탄핵을 받아 8개월 동안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가의대부에 올랐고 1857년 제자들이 지어준 만우정(晩愚亭-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7호)에서 후진 양성을 하다가 85세에 졸하였다.
* 현직 부사로 암행어사를 꾸짖다!
공이 초산부사 재직 시에 어사 심승택(沈承澤)이 초산 고을에 들어왔다. 온 고을이 놀라고 두려워했지만 정재는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어사를 맞았다. 그런데 어사가 용무를 마치고 부사에게 훌륭한 정사를 들어 치하하는 인사를 하고 떠난 후에 이방(吏房)이 부사에게 달려와서
“영감! 큰일 났습니다. 어사를 따라온 상도의 금품요구가 있습니다.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보고를 받은 정재께서는
“그를 형틀에 묶으라.” 그리고
“어사가 멀리 가지는 못했을 터이니, 모시고 오라.”고 명하였다.
산천초목도 벌벌 떤다는 어사의 관속(官屬)을 부사(府使)가 형틀에 잡아매는 것은 그 예를 찾아보기 힘 드는 일이다.
그러나 정재는 부당하다고 판단되었을 때는 거침없이 집행 하신 것이다.
어사 심승택이 불려왔고, 부사는 어사와 함께 형틀에 묶인 상도의 앞에 나란히 자리를 한 후에 이방의 보고내용에 대한 사실여부를 공식적으로 심문 확인하고는
“풀어주라” 명하고 어사를 관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어사의 행차는 고을 수령의 불법을 살펴 공직의 기강을 바르게 세워야 하는 막중한 책무를 수행해야 하지만, 자신의 수족과 같은 상도의 바른 행실도 지도해야 마땅하거늘 상도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와서야?”
라고 꾸지람을 내렸다. 이에 어사 심승택은 솔직히 시인하고
“돌아가면 정치를 잘 하심을 포상하여 상달하겠습니다.” 라고 했다.
(영남학맥에는 장형을 치는 형벌을 가했다고 썼으나, 우리 문중 어른들의 이야기에는 위의 내용과 비슷하고, 사리에도 맞는 것 같아서 영남학맥의 기사를 객관적인 자료로 제시하고, 문중 어른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기록 하였음)
* 초산 백성들이 공이 떠난 후에 초상화를 사당에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이를 생사당이라 한다. 뒷날 공이 폐하라 하였으나 결과는 미상이다.
* 공은 학자로서 동암 류장원에게 수학하였고 뒷날 손재 남한조에게 나아가 학문을 넓혔다. 문하생 600여명이 문인록에 올랐고, 한주 이진상, 면우 곽종석, 회봉 하겸진, 서산 김흥락, 서파 류필영, 동림 류치고, 근암 류치덕 등 유수한 제자를 길렀다. 사후에 상여 줄을 잡은 이가 900여명 이라 하니 정말 대단한 학자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저서로 ⟪독서쇄어⟫, ⟪예의총화⟫, ⟪가례집해⟫, ⟪주절휘요⟫, 와 ⟪정재집 27책⟫을 남겼다.
* 가세영언의 일화
초산에서 회가할 때 진지 지을 쌀이 없어서 아랫마을 망지내 댁에서 쌀을 꾸어 밥을 지었다.
정부인께서 모시치마를 입고 싶어 했는데 초산부사로 가시게 되자 사랑에서 지금 만금태수를 가시니 모시치마를 입어 보겠다. 하셨으나 원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심에 관 속에 모시치마를 썼다.
* 삼대 독립운동가 5인을 배출, 협동학교를 유치함
정재의 아들 세산 류지호는 김도화, 김흥락과 을미의병을 주선하였으며 그의 아들 수촌 류연박은 참모장을 담당했고, 파리장서에 서명했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병합되자 내앞의 협동학교가 문을 닫았다. 이를 한들의 정재종택에 유치하여 무상 대여하고 청송으로 이거했다. 협동학교는 이곳에서 7년간 5회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1919년 삼일 운동 후 강제 폐교되었다. 수촌의 아우 류연성은 챗거리 만세운동 주관자로 7년 형을 받고 대구감옥에서 고문사 했다. 수촌의 아들 일창 류동시는 챗거리 만세운동을 주선했고 류동저는 민족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 송화주(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 20호)의 본가
국화와 솔향기를 머금은 기품 있는 양반가의 전통주 200년 이상 역사를 가진 명주 – 현재 종부 김영한 여사가 대를 이어 빚고 있다.
자료제공 - 류중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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