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가의 출입을 삼간 기봉 류복기
17C 초 영의정 춘호(春湖) 류영경(柳永慶)(1550-1608)은 기봉공의 집안 10촌 형님인데 기봉 공의 명성을 듣고 여러 번 불렀으나 공은 권문(權門)에 출입하는 것은 영의정인 형님에게나 아우인 저에게도 온당치 못하다는 편지를 보내고 마침내 가지 않았다.
이와 같은 기봉 공의 처사는 정도(正道)이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권력자의 도움을 받지 않겠다는 정도(正道)를 실행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려운 특별한 선행(善行)인 것이다.
이를 들어 한강 정구(寒岡 鄭逑)는 말하되 “류복기는 가히 심성(心性)을 논할 만하다.”고 하였고, 식암(息庵) 황섬(黃暹)은 안동부사로 갔을 때 부내(府內)의 현사(賢士)들을 추천하는데 첫째로 공의 이름을 말하고 “화살같이 바른 고사(高士)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식암 공께서는 일찍이 경연(經筵)에서 「기봉의 행적을」 임금님께 아뢰었고, 류 문충공, 김 문정공, 이 송와 공도 각기 아뢰었다. 인품을 내세워서 그 시대 사람들이 신망하였는데, 일찍이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자기 집에 한 번도 오지 않았다는 담대멸명(澹臺滅明) 에다 바로 비했으니, 옛적에 높은 관직에 계시던 분들이 어찌 엿본바가 없으면서 임금님께 그런 말을 하였겠는가?
아아 !! 중국의 한나라 때 유학자 동중서(董仲舒)는 말하기를 “선비란 의(義)를 바로잡고 이(利)를 꾀하지 아니하며, 도(道)를 밝히고, 공(功)을 따지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기봉공이야말로 진정한 선비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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