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군정서 3 의사 사건
「1924년 4월 7일 저녁 11시, 하얼빈시 신기여관에서 조선독립당 성원 3명과 일본 경찰대와 중국경찰대로 이루어진 적군 200여명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밤새껏 벌어져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삼의사는 김만수(金万秀)(1894.-1924) <경상북도 안동군 풍산면 오미동>, 류기동(柳基东)(1892-1924) <안동군 임동면 수곡동>, 최병호(崔炳镐) <강원도 출신> 세 사람을 말한다. 이들은 서로군정서(西路军政署)에 참가하여 헌병으로 활동하였다.
세 사람은 하얼빈시 신기여관 2층에 투숙하고 있었다.
때마침 독립군과 애국지사 체포를 전문으로 하는 일본인 특별형사 경찰부장 구니요시 세이호(国吉精保)를 위주로 하는 특별형사대가 며칠 전 하얼빈에서 북로군정서의 독립투사 2명을 체포하였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3의사는 일본 형사대를 습격하기로 합의하고 여관에서 거사계획을 토론하고 있을 때 이들의 비밀이 일본 형사에 탄로 되었다. 밤 11시경에 일본 특별형사대와 하얼빈주재 일본총령사관 경찰 및 중국경찰 200여명이 동원 되여 신기여관을 첩첩이 포위하여 격전이 벌어졌다. 독립군의 세 용사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응전하였다. 적들은 조선인 통역을 내세워 투항하라고 고함을 지르며 권고하였으나, 용사들은 복수의 사격으로 적의 두목인 특별형사부장 구니요시 세이호를 쏘아죽였고, 계속해서 일본형사 마쯔시마(松岛) 등 10여명을 사살했다. 세 용사는 완강하게 싸웠으나 적과의 수적(數的)대비가 너무도 현저했고, 탄알까지 떨어진데다가 중국경찰이 던진 폭탄이 폭발하여 삼의사(三義士)는 현장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 1924년 4월 16일 ‘조선일보’ 는 ‘독립당원 하얼빈에서 비장한 최후를 고함’이란 제목으로 보도했다., ※ 여기에서 류기동(柳基東)의 본명은 류동범(柳東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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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는 이 사건을 ‘3의사사건’이라 한다.
당시에는 안중근의사의 이또오히로부미 저격사건 다음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던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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