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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교사부터 군대생활까지

록야綠野 2015. 8. 20. 12:44



                                 초보교사부터 군대생활까지

                                                                                                                      류중영

 

1. 향토개발지도교사 시절 이야기

 

1961년 내가 안동사범학교를 졸업했으나 교사 자리가 없어서 농사일을 하면서 발령을 기다리고 있을 때 봇물을 관리하는 공동 작업을 하러가서 5.16 군사혁명이 일어난 것을 알았다. 그때는 전 동네에 라디오 한 대가 없던 시절이니 생활이 말이 아니었다. 그날도 무실의 상희 씨는 당시 무실 한들 박실에서 유일하게 대학을 졸업한 청년이었으나 직장이 없어 농사를 짓고 있었다. 나와 같이 강바닥을 파서 물을 모아 보 도랑으로 보내는 작업을 했다. 그 후 중앙정보부 이사관 퇴임

 

당시 혁명정부에서는 국가의 경제를 일으켜야 한다는 목표를 제시하고 국가재건을 외치면서 재건국민운동 본부를 발족시키고 조국근대화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그때 우리 마을(한들)에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놀고 있는 청년이 넷이나 있었다. 그때만 해도 중학교에도 못간 사람이 많았고 중학교는 나오고 고등학교에 못간 사람도 많았다.

 

우리가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은 4H클럽을 조직하고 회원에게 智 德 勞 體 4H 정신을 강조하여 일깨우며, ‘좋은 것을 더욱 좋게라는 4H 금언을 실천하는 야간학교 운영이었다.

국민학교에 가서 헌 칠판을 하나 빌려서 근암정 방에다 걸고 4H회원을 모아놓고 노래도 가르치고 체육도 하고 가사실습도하고 영농교육을 하는 것이었다. 그때 한들 4H 회장은 택영 군이 맡았고, 나는 자원지도자의 일을 했다. 마을에서 중학교에 못간 청소년에게 한자와 영어교육도 실시했다.

 

나는 그해 820일자로 임동국민학교에 교사 발령을 받았고 낮에는 출근하여 학생을 지도하고 밤에는 4H 지도와 청년회와 부녀회원 교육을 실시했다.

 

면내와 군내의 지도자를 만나서 협의하고 좋은 계획을 마련하여 마을에서 실천하는데 원동기 역할을 자임했다.

 

먼저 마을 안길을 넓혀서 리어카를 이용하니 농사일의 능률이 엄청 높아졌다. 개량된 종자를 보급하여 생산량과 질을 향상시키고, 초가지붕을 개량하고 가축을 기르며 절미운동을 실시하고 밤으로는 가마니를 짜며 마을에서는 절대로 화투를 못하게 청년회와 부녀회가 앞장섰다.

 

안동군 4H 경진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고, 우수마을 대통령표창을 받으면서 상금 100만원은 마을회관을 짓는 자금이 되었다. 그때 지은 마을 회관은 진흙으로 흙벽돌을 찍어서 청년회원들이 직접 쌓아서 회의실 과 창고 한간을 회장댁 뒤뜰에 세운 토담집이었다. 그래도 이 회관은 우리들의 집회장이며 교육장소로서 대단히 많고도 소중한 구실을 했다.

 

한들 4H는 자체 경진대회를 열고 작품전시회와 웅변대회도 하고 마을 체육대회도 열었다. 회관 마당에 배구대를 세우고 운동을 하는 모습. 각종 조직에서 갖는 회의와 교육으로 매일 석유램프에 불을 밝혔으니 한들 사람은 말 그대로 국가재건의 선봉이었다.

임동 면내 동 대항 체육대회에서 장터마을인 중평동을 꺾으니 참관자들의 눈이 둥그레졌다.

챗걸이 장터라면 개성상인들도 안다고 할 정도로 유명하다. 이들은 주변마을 사람들의 주머니를 자기네 주머니로 생각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이들을 꺾었으니 ---

 

나는 학교에서 향토개발 지도교사를 자원하여 ’62년에는 안동교육청에서 주관한 군내 향토개발 지도교사 연수회가 안동농림고등학교 강당에서 열렸다. 그 때 나의 실천사례가 우수하다고 하여 사례를 발표하고 참석자들의 칭찬을 받았다. 또 경상북도 도청 회의실에서 도내 향토개발 지도교사 연수회가 열렸고 도내에서 우수사례 4편이 선발되어 발표를 했는데 거기에서도 나의 실천사례가 발표되어 경상북도 각 시군에 나의 이름과 얼굴을 알릴 수 있었다.

 

’63820일에는 경상북도의 주선으로 내가 지도한 한들에 도내의 향토개발 지도교사들이 현장견학을 왔다. 각 시군에서 향토개발교사 1명과 장학사 1명씩 그리고 안동 군에서는 초,,고등학교의 향토개발교사가 모두 참석하여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고 우리 집 마루에서 총회를 하는데 둘째 종숙(東穆)께서 마을의 변화된 과정과 현황을 말씀하셨으며 간소한 음식을 접대하고 ---- 좋은 평가와 많은 박수를 받았다.

 

그러고는 826일 군에 입대했다.

향토개발지도교사는 대체로 연령이 높은 교사가 많았으며 도내에서 내가 가장 젊은 나이었다.

 

나는 이 경험이 경상북도와 안동군내 선배 교사들의 신망을 얻을 기회가 되었으며 우리 마을을 위한 봉사활동으로 마을 사람들의 인정도 받았고 나 스스로 보람도 느꼈다.

나는 이 일을 계속 하고 싶었으나 군대에서 30개월, 그 후에 복직이 다른 학교로 나면서 사실상 짧은 기간의 활동이어서 아쉬움이 많다.

 

그해 1214일자로 경상북도지사의 표창장이 나왔다. 당시에는 교육청이 도지사 산하에 있었다.

 표창 내용이 나를 위하여 작성되었기에 인쇄된 표창장이 아니고 붓으로 정성스럽게 쓴 것이어서 더욱 값진 것이다.

 

그 내용을 여기에 기록한다.

 

 

 

 

 

 

3454

 

                  표 창 장

 

                                                                                                         임동 국민학교

 

                                                                                                  류 중 영

 

  위의 사람은 향토개발 지도교사의 사명을 자각하여 가난과 낙후 속에서 허덕이고 있는 내 고장 건설에 불타는 의욕으로 낮이면 학교 교육에 충실하고 밤에는 마을로 부락 회관으로 파고들어 야간교육의 실시와 영농법의 개선 그리고 부인회 청년회 4H클럽 등 부락 조직체의 육성 지도에 헌신 노력하여 뛰어난 업적을 거양하였으며 향토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가 크므로 이에 표창함

 

                                                19631214

 

                           경 상 북 도 지 사    박  경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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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군대생활

 

1. 입대와 훈련병 시절

나는 중학교 입학을 3년이나 늦게 했기 때문에 안동사범학교 입학원서를 낼 당시 중학교 선생님의 주선으로 나이를 3년 줄였다.

따라서 군에 입대한 나이도 25살 되던 해였다.

 

논산 훈련소 수용연대에서 신체검사를 하는데 나의 체중이 48kg이었다. 내가 이런 몸으로 군대생활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고민했고 불합격을 받아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검대로 이동하는 시간에 일등병 하나를 잡아서 나를 도와줄 수 있겠느냐? 고 했더니 신검대에 가서 하사 한사람을 소개해 주었다. ㅇㅇ하사는 이비인후과 보조자로 있는데 이비인후과에 오면 무조건 귀 코 목에 이상이 있다 하고, 별도 검사를 받으라.”는 것이다. 나는 시키는 대로 해서 무종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그날 점심을 먹고는 소지품을 챙겨서 귀향소대로 갔다. 17:00이 되자 귀향소대에 모인 오늘 불합격자는 전원 재검을 받으러 오라는 것이다. 재검 장에는 대대장이 임석하고 신체검사를 했던 각과 과장이 배석한 자리에 불합격자 1명씩 호명하여 부대대장이 면담하는 형식으로 진행하였다. 내가 호명되어 부대대장을 대면하니 왜 갈려고 했느냐?” “불합격 판정은 이비인후과에서 받았으나 사실은 위장이 나빠서 몸무게 48kg으로 군대생활을 못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기록을 보니 직장생활을 한 것 같은데 6개월 후에 또 영장을 받게 되면 직장에도 지장이 있으며 입대를 하면 규칙적인 훈련과 식사로 병을 호전 시킬 수 있고, 악화 될 경우 군 병원에서 치료도 가능하고 제대 할 수도 있으니 자네는 지금 입대하는 것이 좋을 것일세.”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날자로 입대를 했다.

 

훈련병은 고단하고 매일의 교육훈련은 교육과정에 의하여 진행되었다. 사격훈련을 받은 후에 1,000인치 사격장에서 실탄 사격을 하는데 실탄 1발을 쏘고 나니 총의 노리쇠가 탈출하는 고장이 생겼다. 조교가 손을 봤으나 고장은 해결되지 않았다. 옆의 전우가 사격을 끝내고 그 총을 빌려서 사격을 했는데 정신안정이 못되는 상황에서 실탄이 바로 맞을 수가 없었다. 채점표를 가지고 탄창을 확인해 보니 점수가 말이 아니다. 최소한 110점은 받아야 합격이 되는데 74점으로 불합격선이다. 나는 기록표에 점수를 높게 올려서 113점을 만들었다. 옆에서 조교가 그러면 안 된다고 했으나 불합격으로 기합을 받으나 기록표 조작으로 기합을 받으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뒷일은 내가 책임질 것이니 가만있으라 하고 그대로 제출했다. 그날 불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은 없었다. 불합격자들은 합격자의 총을 모두 모아서 한 사람이 5정씩을 메고 구보를 하면서 같은 길을 갔다가는 뒤로돌아서 또 뛰는 기합을 받았다. 내가 생각하기엔 위급할 때는 변칙이라도 해서 위기는 면하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했다.

군대 밥그릇을 한 번도 비워 보지 못하면서 6주 기본훈련을 마치고, 서울 보광동에 위치한 통신보안부대에 가서 12주 암호조립 암호분석 KL7과 통신보안 교육을 받게 되었다. 이때 나에게는 왼쪽 늑골에 이상한 병반이 보이면서 만지면 아프고 조용한 시간에는 약간의 통증을 느끼곤 했다. 나는 수도육군병원에 매주 1회씩 외래진료를 받았다. 늑골부위의 통증은 외과적 관찰로 분류하여 대수롭지 않게 취급했고 주로 위장병 치료에 노력했다.

 

19641월 초순에 화천군 사창리에 있는 7사단 보충대에서 2주간 교육이 있었는데 눈이 많이 내렸으며 날씨가 몹시 추웠다. 나는 생각했다. 이제 최전방에 왔으니 대책은 입원을 하는 것이라 판단하고 의무대에 가서 늑골의 아픈 부위에 칼을 댔다. 상처부위에서는 계속해서 진물이 흘렀고 두꺼운 꺼즈를 붙여서 진물을 받아냈으나 훈련병은 입원이 안 된다. 2주 훈련은 의무대에 가서 치료에만 신경 쓰고 7사단 통신 중대로 배치되어 점심 한 그릇 먹고는 의무중대로 가서 입원하고 치료를 받았다. 이어서 화천에 있는 제 11 이동외과병원을 거쳐서 춘천에 있는 육군 제 1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는데 나는 군의관과 휴게소에 가서 커피도 마시고 떡국도 먹고 바둑도 두면서 나의 위장병을 고쳐 달라고 부탁했다. 군의관은 경북대학교 의대 출신인데 나의 청을 받아줘서 신경안정제 프로반사인이란 미국제 약을 처방했다. 이 약은 직경이 3mm정도의 보라색 당의정인데 그 표면에 frobansine이란 청색 글자가 쓰였는데 보기에도 좋은 약이구나!! 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약으로 많은 효과를 봤다.

 

야전병원에서도 늑골의 병이 어떤 것인지 X-ray를 그동안 4번이나 찍었으나 병의 근거가 판정이 안 되어 원주 121후송병원으로 후송 되었다.

 

후송병원에서도 X-ray를 찍고 검사를 추진한 결과 결핵균이 뼈에 침범해서 생긴 병으로 진단이 나왔고, 육군병원 후송 대상자로 지정되었다. 인사담당 한ㅇㅇ상사가 말하기를 육군병원에서 잘 하면 제대가 될 수 있는 병이라고 했다. 그러던 중에 형님께서 면회를 오셨다. 임동 면사무소 이ㅇㅇ의 형이 헌병 중사로 원주에서 근무 중이라면서 그분을 찾아보고 가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다음날 외과부장이 나의 병상을 찾아와서 현황을 살펴보고는 후송자 명부에서 내 이름을 빼어버렸다. 자기가 수술하겠다는 것이다. 결핵약을 투약했고, 상처에는 진물이 없어지고 새 살이 돋아서 아물기 시작했다. 정확한 진단과 투약은 5개월이나 고생했던 늑골의 병을 금방 치료한 것이다. 수술을 하지 않고 약물치료를 하면 완치가 안 되느냐고 질문했더니 뼈에 붙은 결핵균을 깨끗이 죽이는 약은 없고 수술을 해서 병든 부분을 잘라내는 것이 최선의 지료법이란다. 수술날짜가 잡히고 수술은 부분마취로 진행되었는데 의사와 환자가 대화를 하면서 진행되었다. 뒷날 한ㅇㅇ상사가 말 했다. 외과부장이 면회 오신 형님께서 자기를 찾아보지 않고 갔기 때문에 오해가 생겨서 후송명단에서 뺐다는 것이다.

수술 후 3주가 되면서 퇴원하여 1군사령부 암호실로 배속되었다.

 

 

 

 

2. 암호병 시절

암호실에 배속된 것이 ‘94. 5월이다. 수술 후의 안정기간이 짧아서인지 내무반 생활에 피로감이 있었고 취침점호시간 부동자세로 서서 기다리는 시간에 빈혈이 생겨서 쓰러지는 일이 생겼다. 내무반에는 후배들이 먼저 와서 일등병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내무반장은 소대원에게 선포했다. “류중영은 수술관계로 배속이 늦었지만 너희들 보다 선배다. 일등병 계급장을 먼저 달았더라도 선배 대우를 하도록 하라.” 첫 달이 가고 익월 1일자로 나도 입대하여 9개월이 지나서 일등병이 되었다. 군에서는 소위 군기를 잡는다면서 졸병을 상대로 단체기합이란 것이 있었는데 상병이 주로 앞장을 서고 일병이 당하는 모습이었으나 일병인 나는 열외가 되었다.

 

중대장께서 나를 불렀다. 자기도 교원출신이라면서, 병원에서 여러 달 고생이 많았다고 위로하고, 하계휴양소에서 한 달 동안 휴양을 하도록 배려해 주셨다.

그해 겨울에는 군사령부 통신참모 자녀들의 방학기간에 가정교사를 해 달라는 주문을 받기도 했다.

통신참모는 대령인데 사택에는 당번병이 있었고 서울에 있는 학생은 아직 오질 않았다. 그때 여동생 혼인날이 잡혀서 연락이 왔다. 나는 10일간 휴가를 얻어 집에 왔다가 귀대하니 가정교사 자리에는 다른 사람이 갔고 나는 암호실 근무를 하게 되었다.

 

암호병은 학력이 고졸 이상인데 대학생이나 대학원생이 많았다. 그래서 2~3단의 바둑을 두는 친구,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 시를 잘 쓰는 친구, 운동을 잘하는 친구 노래를 잘 부르는 친구등 재주꾼이 많기로도 유명했고, 1. 2. 3급의 비밀문서와 2급 비밀로 분류된 암호자재를 취급하다 보니 무장헌병이 24시간 보초를 서고 2중철조망을 친 사무실에서 출입 유권자가 군사령관 정보참모 작전참모 통신참모만이고, 대대장 중대장이 출입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사실상 암호 병들만 출입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로운 행동이 허용되기도 했다.

 

암호병의 업무는 군에서 교신하는 전문을 유선이나 무선으로 보낼 경우 적의 도청으로 아군의 비밀이 적에게 그대로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평문을 숫자로 변형하고 이것을 중앙정보부에서 만든 2급비밀로 분류된 암호자재에다 기록하여 뺄셈을 해서 얻어지는 숫자로 된 전문을 만들어서 통신병에게 넘기면 그것은 적이 도청을 해도 무슨 내용인지 해석을 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조립업무이고, 통신병이 다른 부대에서 받은 암호화 된 전문을 접수하여 암호자재를 활용하여 평문으로 만들어서 문서실로 보내는 작업을 하는 것이 암호분석업무인데 셈이 빨라야 분석이나 조립이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되는 것이다. KL-7이라는 미군이 사용하는 암호자재로 조립이나 분석 작업을 해야 하고 문서 전체를 파악하고 문장을 매끄럽게 다듬을 수 있어야하기 때문에 타자를 치고 영문을 이해하는 수준의 기초학력이 필요했다.

 

내가 상병 때다. 사무실에서 선배가 암호분석을 하다가 도저히 해석이 안 된다면서 나에게 해석을 부탁했다. 같이 노력을 했으나 난해한 부분이 있어서 몇 번 재송을 받아서 첨부를 하고 해석이 되는대로 기록하여 내 도장을 찍어서 보낸 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휴가를 다녀와서 사무실에 나가니 소대장님 왈 류중영이 너 상등병 놈이 건방지게 육군 대령을 이동 시키고, 이번에 영창 갈 뻔 했다.” 하는 것이다. 그 연유인즉 내 도장을 찍어준 전문電文이 사단포병참모에게 이동의사를 물어보는 인사부 문서의 답신인데 전문 원본은 불희망함인데 ‘( 희망함이라 분석하여 보냈으니 군단 직할 포대장으로 이동발령이 났고 포대장은 이의를 제기하여 암호장교의 감사를 받은 결과 암호자재에 잘못이 있었다는 감사보고를 내고 사건이 해결되었다는 것이다.

 

병장이 되고나서는 CPX, FTX, 기동훈련 이 있으면 자원하여 참여하곤 했다. 현대전의 모습은 어떠하며 무기는 어떤 것이 투입되는지 알아보고 싶어서이다.

 

나의 군대생활에서 특징은 입만 열면 욕설이 남발하는 군대사회에서홀로 용설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제대를 할 때에 내무반장 윤 하사는 우리 내무반에서 욕 안 하는 전우도 류중영 하나뿐이고, 나에게 매 안 맞은전우도 류중영 하나뿐이었다.”라는 말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