成均 生員 柳韶休遺事
군(君)의 휘(諱)는 소휴(韶休)요, 자(字)는 자의(子義)다. 초휘(初諱)는 영휴(英休)요, 초자(初字)는 실보(實甫)다.
우리 류씨(柳氏)는 전주(全州)에서 나왔다. 중세(中世)에 휘 의손(義孫)은 호가 회헌(檜軒)으로, 집현전(集賢殿)에 선발되어 들어가셨으며 당시 선생(先生)<회헌선생, 집현선생>으로 일컬어 지셨다. 단묘(端廟)(端宗)가 손위(遜位)<임금의 자리를 양보>함에 이르러 전주의 황방산(黃方山)으로 물러나 거주하시다가, 대총재(大冢宰)(吏曹判書)에 제수(除授)<추천이 없이 임금이 직접 벼슬을 내림>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으셨고, 유명(遺命)<임금이나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남긴 말씀>으로 묘갈(墓碣)<묘비에 새긴 글>에는 예조팜판(禮曹參判)이라 쓰게 하셨다.
아우인 일집의(逸執義)<벼슬 이름>휘(諱) 말손(末孫)<1403~1468 사헌부집의 증이조참판 > 의 아들 계동(季潼)을 후사(後嗣)로 삼으셨다.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다.
대대로 한양(漢陽)의 묵사동(墨寺洞)<서울 남산 아래 필동 충무로 근처>에 거주하셨다.
7대조(七代祖) 휘 복기(復起)가 비로소 안동(安東)의 수곡(무실)에 거주하기 시작하셨는데 조실부모(早失父母)하고 내구(內舅)(外叔)인 학봉선생을 따라가 공부하셨고, 호는 기봉(岐峯)이다.
임진왜란 때 창의하셨으며 예빈시정(禮賓寺正)에 제수되었다. 손자 지(榰)의 귀(貴)로 좌승지에 추증(追增)되셨고, 안동에서 창의(倡義)하여 크게 공을 세웠으므로 이조참판 (吏曹參判)으로 증직(贈職)되셨다.
증조부는 휘 영시(永時)이고, 조부는 휘 화현(和鉉)으로 호가 송음(松陰)이며, 고(考)는 휘 충원(忠源)으로, 은둔(隱遁)하며 세상에 드러내지 않으셨다. 비(妣)는 안동 권(權)씨 통덕랑(通德郞) 세극(世極)의 따님이다.
군은 英宗(英祖) 갑오년 (1774)년에 대평리(大坪里)<한 들>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총민(聰敏)하고 자상(慈祥)하여 행의(行誼)<올바른 행동>와 문예(文藝)가 가르침이 엄숙하지 않아도 이루어졌다.
선부군(先府君(忠源))은 군이 위대한 재목이 될 것이라 기대하여 반드시 성취 시키고자 하셨다. 그래서 종이와 붓을 넉넉히 공급하고, 소용되는 물품을 충족시켜 주셨다.
매번 가을 겨울에는 산방(山房)으로 보내어 형제(兄弟)가 함께 공부 했는데 군은 반드시 두 배로 읽었다. 비록 거질(巨帙)<여러 권으로 된 책>이라도 반드시 암송하고 나서야 그만 두었다.과거(科擧)공부를 익힐 때에도 일정한 분량을 정하고 반드시 정해진 수를 채우려고 하였다. 형제가 함께 문회(文會)에 가서 평가를 받으면, 시권(試券)을 반드시 먼저 제출했는데 방(榜)의 앞줄에 이름이 있었다.
병진(丙辰)년(정조 20.1796)에 모친상(母親喪)을 당해서는 손수 상례(喪禮)를 초록(抄錄)하여 절문(節文)<예절에 관한 규정>을 다하는데 힘쓰고, 삼년상을 마치도록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다. 무오 년(정조 22. 1798)에 부친상(父親喪)을 당해서도 모친상처럼 예제(禮制)를 지켰다.
신유(辛酉)년(순조 1, 1801)에 향시(鄕試)에 선발(選拔)되었으나 성시(省試)<향시에 합격한 사람을 서울에 모아 서 거행하던 과거시험. 覆試, 會試라고도 함>에서는 합격하지 못하였다.
을축(乙丑)년 (순조5. 1805, 32세)에 예부(禮部)생원(生員)이 되었으나, 군은 겸퇴(謙退)<겸손히 사양하고 물러남>하여 더 이상 벼슬에 나아가기를 구하지 않고서, 오직 서사(書史)<경서와 사기>를 스스로 즐겼다.
나는 이렇게 말해 주었다.
“이 지방에 거주하면서 대부(大夫) 중에 현자(賢者)를 섬기고, 선비 중에 인자(仁者)를 벗하자면 자네는 마땅히 스승을 따라 학문을 해야 하네.”
군이 말 하였다.
“지금 스승을 따르는 자들 중에는 진실한 마음으로 도(道)를 구하는 자가 드무니, 실상(實狀)은 없이 이름을 도둑질하는 것을 저는 매우 부끄러워합니다. 만일 학문에 뜻이 있다면, 우리 문중(門中)의 덕망(德望)있는 장자(長者)도 모자라지 않는데 하필 멀리 유학(遊學)하겠습니까? 더군다나 날마다 형님과 함께 거처하여 진실로 의심나는 것이 있어도 질문할 데가 없는 걱정이 없고, 다만 뜻이 확립되지 않고 배움이 전일(專一)하지 못하여 의심을 일으키지 못하는 게 걱정일 뿐입니다.”
내가 말했다.
“공자(孔子)는 말씀하시기를 ‘도(道)가 있는 이에게 찾아가서 질정(質正)<수준 높은 질문과 바른 대답>한다면 배움을 좋아한다고 이를 만하다.’ 하였고, 주자(朱子)는 말씀하시기를 ‘문을 닫아걸고 혼자 앉아 있었던 성현(聖賢)은 없다.’ 하였네. 옛사람이 스승을 따랐던 것은 반드시 모두 이름 때문은 아니었네, 저 이름을 구하는 자는 진실로 경계(警戒)할만 하지만, 내 스스로 실질(實質)에 힘쓴다면, 다시 무슨 병폐(病廢)가 있겠는가?”
군이 말했다.
“도(道)가 있는 이에게 질정(質正)<묻거나 따져 바로잡음> 하는 데에는 방법이 있으니, 편안함과 배부름을 구하지 않으며, 말을 삼가고 일은 민첩하게 한 뒤에 진안경(陳安卿)을 경계로 삼아 사방(四方)에서 벗을 취하는 데에 있습니다. 또한 자기 분수(分數)의 일을 이미 이해하였다면 더욱 마음을 두루 넓히는데 힘써야 합니다. 지금 내가 말을 하면 허물이 더욱 많아지고, 행동을 하면 후회(後悔)가 더욱 많아지는 것은 자기 분수에서 본분(本分)을 다하지 않은 게 많아서입니다. 근본(根本)을 북돋아주지 못하면서 지엽(枝葉)이 무성해지기를 구하려 하고, 근원(根源)을 터주지 못하면서 파류(波流)가 멀리까지 도달하기를 구하려 한다면 ,이는 내면(內面)을 비우고, 외면(外面)에 힘쓰는 것이니, 어찌 여기에 급급(汲汲)해 하겠습니까? 끝내 스승을 따르는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에 고조(枯凋)<사물이 시듬>하고, 고고(孤高)함을 면치 못해서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이런 것을 아는 이가 드뭅니다.”
기축(己丑)년(순조 29 1829) 11월 6일에 병으로 일어나지 못하니 향년(享年)이 겨우 56세였다. 다음해 정월 6일에 본부 금소 윗마을 고곡(古谷) 앞산 사좌(巳座)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아아! 군(君)은 보통사람으로 자처(自處)하고 윤리(倫理)<도덕성>가 독후(篤厚)<매우 두터움>하였다.
어버이를 곁에서 모시고 있을 때는, 음성(音聲)과 형색(形色)에 드러나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어김없이 받들어 따랐고, 지적하여 시킬 필요도 없이 빠짐없이 받들어 행하였으니, 천성(天性)에서 울어 나온 것이요 억지로 힘쓴 것이 아니었다.
선조(先祖)를 봉양할 때는 맏아들이 아니라 하여 스스로 나태하지 않았으며, 찬선(饌膳)<채소나 고기반찬>은 반드시 직접 잘랐고 실과는 반드시 스스로 골랐으며, 제전(祭田)이 넉넉하지 못한 것을 근심하여 여러 해를 경영(經營)하니 대략 두서(頭緖)가 있게 되었다. 이에 명문(銘文)을 써서 자기(瓷器)로 구어 제위(諸位)의 묘(墓) 앞에 묻었고, 또 상석을 조치(措置) 하였으나, 두루 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 하였다.
형(兄)을 섬길 때는 , 연기(年紀)가 조금 뒤질 뿐이지만 아버지처럼 섬겼다. 또한 치산(治山)하는 일에 서툰데다가 거듭해서 상(喪)을 당하고, 시집 장가보낼 일이 이어져 가업(家業)이 장차 파산(破産)할 지경이 되었으나, 군(君)은 일마다 타당한지를 살폈으며, 농사일에 힘쓰고, 비용(費用)을 절약하여, 재물을 증식(增殖) 시키지 않아도 풍족(豊足)하였다.
형제가 분가한 뒤에도 섭리(攝理) 하는 것이 쇠해지지 않아, 무릇 술과 음식이 생기면 반드시 직접 가지고 왔고 비복(婢僕)에게 맡기지 않았다. 형제는 밤낮으로 서로 지키며 떠나지 않았고, 혹 경서(經書)의 뜻을 논하면 꼭 들어맞았으며, 번번이 형에게 겸손하게 미루어주었다.
다른 사람의 서독(書牘)<편지>에 답장할 때는, 곧게 바로잡아 주었는데 조금이라도 잘못된 곳은 군(君)이 대략 손질하여 새롭게 하면 곧바로 광채(光彩)가 생겨났다.
일을 처리함에 막히는게 있어서 세속(世俗)과 조화(調和)되지 못하면 쟁론(爭論)하였고, 쟁론했음에도 따르지 않으면 또한 반드시 온화한 안색(顔色)과 부드러운 음성(音聲)으로 차분하게 설명하여 끝내는 미혹(迷惑)되지 않도록 하였다.
일찍이 이렇게 말하였다.
“의리(義理)가 무궁(無窮)하여 사람의 견해(見解)가 같지 않으니, 반드시 잘하는 게 나에게 있고 잘못하는 게 남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성현(聖賢)도 오히려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르는 것을 귀하게 여겼거늘, 하물며 우리들임에랴!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못이 있다고 일러주는 말을 들으면 마땅히 신속히 고칠 뿐, 어찌 변명(辨明)을 늘어놓으랴! 사람에게 십분(十分)의 비방(誹謗)<남을 헐뜯어 말함>이 있으면 반드시 삼분(三分)의 잘못은 있게 마련이니, 비록 일분(一分)일 뿐이라도 오히려 잘못을 이루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이것은 내가 평소(平素)에 스스로 성찰(省察)하던 부신(符信)<글을 써서 벽에 붙여놓고 반드시 실천하려는 다짐>이다.“
여러 누이들을 위무(慰撫)<위로하고 어루만져 달램>하여 사랑으로 대하였고, 사윗감을 골라 시집보냈는데, 가난으로 자급(自給)할 수 없는 것을 함께 근심하여 그들을 위해 식전(息錢)<돈이나 곡식을 빌려 쓰고 다음 해에 50%의 이자를 붙여서 갚아야 하는 당시의 금리제도> 으로 곡식을 마련하여 보살펴주었으며, 안부(安否)를 물으러 가는 일을 해마다 거른 적이 없었다.
지친(至親)<가까운 친척>이 매우 적어 비록 오복(五服) 외(外)의 친척이라도 제삿날에는 반드시 가서 참사(參祀)하였다. 그의 독실(篤實)한 행실(行實)이 이와 같았다.
일찍이 소장공(蘇長公) <소식(蘇軾)(1036~1101 號는 동파(東坡)이다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이며 서화(書畵)에도 능하였다.)에 대한 경칭(敬稱)이다. 소순(蘇洵)의 장자인데 그 문장이 백대의 으뜸이라고 할 만했기 때문에 그를 장공이라 하고, 아우 소철(蘇轍)은 소공(少公)이라 하였다.>의 “만약 나의 소유가 아니라면 비록 일호(一毫)라도 취하지 말아야한다.”<蘇軾의 적벽부(赤壁賦)에 나오는 말> 는 말을 매우 사랑하여, 무릇 공가(公家)의 일을 맡았을 적에 마땅히 얻어서는 안 될 것으로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았으며, 예서(禮書)를 간행(刊行)할 돈을 수십 년 동안 관리하였으나, 일호(一毫)도 범하지 않자, 사람들이 어려운 일이라고 여겼다.
⟪서경(書經)⟫, ⟪주역(周易)⟫, ⟪예기(禮記)⟫에 대하여 잘 이해하고 있어서 발명(發明)한 것이 많았으나, 일찍이 차록(箚錄)해두지 않고서 스스로는 능하지 않다고 여겼다.
시를 지어 읇조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혹자가 화답시(和答詩)를 구하면 부득이하여 지었으나 곧바로 그 원고(原稿)를 찢어버렸다. 그래서 편언척자(片言隻字)라도 후학들에게 전하여 보여줄 것이 없다.
그러나 내가 기록한 것은 태반(太半)이 군(君)의 말과 행실에 따른 것이니, 후세에 나의 글을 보는 사람은 또한 군(君)에 대하여 충분히 알 것이며, 또한 그가 말을 하지 않은 것이 말을 많이 한 것 보다 더 고상(高尙)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군(君)은 일찍이 나를 위하여 서실(書室)을 지으려고 집을 사 들이고, 재목을 모았는데, 군은 갑자기 죽어 조금도 기다려주지 않았다.
지금 이미 그 서실(書室)<大埜亭>을 우뚝하게 낙성(落成)하여 나홀로 그 안에서 거처하다가 매번 바람 좋고 달빛 밝을 때 그를 위하여 서성거리면서 명인(鳴咽)<울먹임>하노라니 아직도 군을 눈앞에 마주하는 듯하다.
군은 안동(安東 )권(權)씨 사인(士人) 익필(益弼)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부덕(婦德)이 있었고 가정(家政)을 잘 처리하였다. 군보다 7년 앞서(순조22. 1822) 졸(卒)하여, 추현(楸峴)의 선고(先考) 묘 앞에 장사(葬事)지냈다.
아들이 없어 종형(從兄) 정휴(挺休)의 셋째아들 혼문(渾文)을 후사(後嗣)로 삼았다. 딸은 김서락(金書洛)과 이욱순(李郁淳)에게 시집갔다. 혼문(渾文)의 일남(一男)은 치덕(致德)이고 딸은 어리다.
군은 고아(高雅)하여 기술(記述)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고 남에게 자랑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으니, 내가 또 어찌 참아 붓을 잡고 그를위하여 말을 하겠는가? 다만 내 나이 70을 넘어 혹시라도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날까 염려되어, 마침내 군의 아름다운 행실과 정교한 지식가운데 민몰(泯沒)<없어짐>되어 전하지 않는 한두 가지를 대략 기록하여 군의 자손들을 위해 보여주노니, 내가 정신이 소산(消散)하고 거의 대부분 잊어버렸으나, 그래도 이 글을 보면 그 사람됨을 어렴풋이나마 알 것이니, 또 어찌 많을 필요가 있겠는가?
癸巳(1833) 년 9월 1일 아침에 형은 ( 柳 建休) 쓰노라
류건휴(1768~1834)호를 大埜라 하였고, 大埜集과 단행본으로 三經集解, 溪湖學的, 異學集辨, 國朝古史, 近思錄集解疑義, 喪禮備要 등 많은 저술을 남긴 大儒學者.
2014년 7월 6대손 仲榮은 매부 權虎基의 한문실력을 활용하여 國譯을 부탁하고 이를 더욱 쉽게 풀어서 싣는다.
각주가 달린 원본은아래의 파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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