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글/번역

5대조 한수당 류혼문 묘지

록야綠野 2014. 7. 27. 15:59

 

柳渾文 墓誌

  족숙(族叔) 관호(觀鎬)씨가 일찍이 슬픈 낯빛으로 나에게 말하였다.

   "왕고부군(王考府君)<돌아가신 조부를 높이는 말>은 우리 집안에서 기업(基業)<기초가 되는 사업>을 열고, 넉넉함을 드리운 은택(恩澤)<은혜와 덕택>이 있으시네, 게다가 숨은 덕망(德望)<덕행으로 얻은 명망>과 심오(深奧)<속 깊은>한 행실(行實)이 있어서 민멸(泯滅)<없어짐>되어서는 안 되는데도, 불초배(不肖輩)<못난 저희들>가 끝내 한 편의 사적(事蹟)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 적요(寂寥)<적적하고 고요함>한 묘표(墓表)나 묘지(墓誌)<죽은 사람의 이름, 신분, 행적, 자손에 관한 기록>로 구릉과 골짝이가 뒤바뀌는 근심陵谷之虞에 대비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며, 또한 병필가(秉筆家)<글씨쓰는 사람>의 가문(家門)을 장대(長大)하게 하려하지 않으니, 자네는 어찌하여 힘쓰지 않는가?”

  나 연집(淵楫)은 감당할 수 없어 사양하였으나, 질책(叱責)이 더욱 부지런하여 마침내 감히 손을 씻고 아래와 같이 대략 서술한다.

  공은 휘가 혼문(渾文)이요. 자가 경관(景貫)이다. 일찍이 그 당실(堂室)을 한수당(閒睡)이라 하였으나 실로 자조(自嘲)<자신을 스스로 비웃는>한 것이었다.

  ()씨는 본관이 전주(全州)이며, 고려말(高麗末)에 완산백(完山伯) 휘 습()이 상조(上祖)가 되신다. 4세는 집현제학(集賢提學) 휘 의손(義孫)으로 호가 회헌(檜軒)이고, 경태(景泰)<명나라 대종(代宗)의 연호1450~1456>연간에 전주(全州)의 황방산(黃方山)에 퇴손(退遜)<겸손히 물러남>하여 소와정(笑臥亭)을 짓고는 시()를 지으면서 뜻을 나타내 보이셨다. 9세는 휘 복기(復起), 예빈시정을 지냈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호는 기봉(岐峯)이시다. 이때 비로소 수곡(무실)에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하였고, 외숙(外叔)인 학봉(鶴峰) 김선생((金誠一)을 따라 학문을 하셨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義兵)을 일으키셨다. 휘 지잠(知潛)은 호가 용암(龍巖)으로 효도(孝道)로써 명성(名聲)이 알려지셨다. 그리고 휘 간(), 휘 완휘(完輝)가 계시다. 이 분들은 공의 5대 이상이다. 고조부(高祖父)는 휘가 영시(永時)이고, 증조부(曾祖父)는 휘가 화현(和鉉)으로 호가 송음(松陰)이며, 덕망이 있으셨다. 조부(祖父)는 휘가 충원(忠源)이다. ()는 휘 소휴(韶休), 진사(進士)이고, 학식이 정밀하고 해박하여 백씨(伯氏) 대야옹(大埜翁)<建休>과 함께 침상을 맛대고 박약(博約)한 공부가 있었다. ()는 안동(安東)()씨 처사 익필(益弼)의 따님이다. 생고(生考)는 휘가 정휴(挺休)이며, 는 반남(潘南)씨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사표(師豹)의 따님이다.

  ()은 순조(純祖) 임술년(1802)에 태어나셨고, 계유(癸酉)(고종 10. 1873) 320일에 졸()하셨다. 묘는 예안면 계곡리 압시골 모과나무등에 있는 生考 挺休의 묘 앞 계좌(癸坐)에 임해있다. ()는 영양 남()씨 처사 경묵(景默)의 따님으로, 묘는 임당(林塘)의 뒷골 각시당(覺是堂)의 유좌(酉坐)에 있다. 아들은 치덕(致德)과 후사(後嗣)로 나간 치락(致洛)이고, 나머지 아들은 치순(致恂)이며, 딸은 권상철(權相哲)에게 시집갔다. 致德 은 아들이 진호(震鎬)와 관호(觀鎬)이고, 딸은 정래원(鄭來源)과 신상익(申相翼)進士 이춘구(李春九)에게 시집갔다. 致恂은 아들이 벽호(辟鎬)이고, 딸은 권병걸(權炳傑)과 김병화(金炳華)에게 시집갔다. 震鎬는 사남(嗣男)<대를 이은 아들>이 효연(孝淵)이고, 나머지 아들은 재연(在淵)과 학연(學淵)이다. 觀鎬는 아들 孝淵伯氏 震鎬의 양자(養子)로 들어가 집안의 제사를 이었고, 교연(敎淵)을 사남(嗣男)으로 삼았다. 辟鎬의 아들이 厚淵이다. 孝淵은 아들이 동수(東銖)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敎淵은 아들이 어리다.

 

  아아! 공은 어린 나이 때부터 야정(埜亭)의 노비(爐鞴)<화로> 안과 정야(定爺)의 패불(牌拂)<書堂> 곁에서 훈도(薰陶)를 받아, 그 승습(承襲)<이어받음>한 아름다움과 견문(見聞)의 바름이 규율(規律)과 법도(法度) 밖으로 벗어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가만히 보건대, 용모(容貌)와 행동거지(行動擧止)로 나타난 것이 늘 엄의준정(嚴毅峻整)한 기상이었고, 언의(言議)로 표현한 것이 매번 항직공평(亢直公平)한 뜻이었다.

일찍이 우뚝하여 굴복시킬 수 없는 의지(意志), 확고하여 빼앗기 어려운 절조(節操)<절개와 지조>가 있어서, ()를 듣고 선()을 보면 물이 흘러가듯 기꺼이 나아가셨다. 자제(子弟)들을 가르칠 때는 효제(孝悌)를 근본으로 삼았고, 종족(宗族)에게 처신할 때는 화목(和睦)을 우선으로 삼으셨다. 문사(文詞)는 정밀하고 합당하였고 필한(筆翰)<붓글씨>은 굳세고 힘차서 속류배(俗流輩)가 미칠 바가 아니었으나 일찍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으셨다.

  일찍부터 간고(幹蠱)의 일을 맡아서 생업(生業)을 다스리는 데에 마음을 쏟으셨다. 무릇 선조(先祖)를 받드는 기우(奇耦)<사당에 신주를 뫼시는 순서 즉 상대를 가운데, 다음은 왼쪽에 다음은 오른쪽에>의 품절(品節)과 손님을 대접할 때 돌차(咄嗟)의 수요(需要)는 모두 미리 계획을 세워 조리정연하게 조서(條緖)<품격>가 있게 하였다. 빈척(貧瘠)<몹시 가난함>하여 고달프고 하소연할 데가 없는 사람을 만나면 극진하게 더욱 더 불쌍히 여기며 먹을 것을 공급하였는데, 많고 적음과 풍요하고 간략함은 각각 그 마땅함에 합당하게 하여, 마을의 골목 안에서 먹여주길 기다리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삶을 보살피는 관청[生闈]20 리나 멀리 있어 조도(調度)<정도에 맞게>하는 게 매우 어려웠지만 공()은 매양 창고의 곡식과 푸줏간의 맛있는 고기를 가지고 오가면서 정성(精誠)을 다해, 거의 거르는 달이 없으셨다. 누이 이()씨 유인(孺人)이 또한 가난하고 궁핍하여 생존(生存)하기가 힘들었는데 공이 잊지 않고 보살펴 주며, 계속하여 물품을 보내 주었다.

야옹(埜翁<백부 대야공>)을 부모를 섬기듯 대신 섬겨 혼정신성(昏定晨省) 동온하청(冬溫夏凊)의 절도와 달고 맛있는 음식의 봉양(奉養)을 일찍이 하루도 나태한 적이 없으셨다. 야옹의 상사(喪事)를 당해서는 염()을 하고 봉분(封墳)을 쌓는데 성신(誠信)을 다하여 반드시 마음에 쾌하고, ()에 합당하게 하고자 하셨다. 야옹의 유문(遺文)<생전에 남긴 글>을 수습(收拾)할 때에는 고심(苦心)하고 부지런히 힘써서 서책(書冊)으로 간행(刊行)하기에 이르자, 온 세상 사람들은 모두들 이것은 공()의 성력(誠力)이라고 하였다.

정야(定爺)<정재선생>에 대해서는 , 비록 일찍이 문하(門下)에 있으면서 학문한 것은 아니라고 공이 자처(自處)하였으나, 꿋꿋하게 덕()을 숭상(崇尙)하는 마음과 간곡(懇曲)하게 도()를 보위(保衛)하는 정성을, 일찍이 스스로 온화하고 강직한 태도[誾侃]보다 못하지 않게 하셨다.

여러 부로(父老)들이 윤자(胤子)에게 명()하기를 ()이 일심(一心)으로 부지런히 복무(服務)하고 종사하는 일에 나태하지 않아 끝내 대업(大業)을 마쳤던 것은, 공이 올바른 도리로 가르쳐 인도한 금석(金石)을 꿰뚫는 정성을 다하지 않았더라면 가능이나 했겠는가?”

()이 세상을 떠나신지 이미 50여 년이 되어, 곧 산하(山河)가 예전과 달라졌고 성곽(城郭)이 예날과 달라졌으나, 공의 가문은 여전히 전형(典型)을 지키고 있다. 관호(觀鎬)씨는 담을 쌓으며 나무를 다듬고 깎아[樸斲垣墉] 고익(考翼)의 성법(成法)<만든 법>을 삼가 준용(遵用)<그대로 따름>하고 있다. 효연(孝淵)군은 또 근후(謹厚)<삼가는 태도가 두터움>하고 진밀(縝密)<빈 틈이 없음>하여 집안의 법도를 바꾸지 않았고 아름다운 자질이 매우 많아 온 집안에 가득 넘치고 있다. 여기에서 공이, ()<삼베옷의 원료>의 그늘이 더욱 널리 뻗어갈수록 더욱 잘 자라는 듯하다는 것을 징험(徵驗)<어떤 징조를 경험함>할 수 있다.

연집(淵楫)은 공을 뵈온 것이 수십 년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우리 문중(門中)은 여전히 융성(隆盛)하였다. 이를테면 동림(東林) 과 동와(同窩)와 만산(萬山) 형제(兄弟) 같은 제공(諸公)이 모두 마음으로 서로 허여(許與)<서로 마음을 허락함>하여, 무릇 크거나 작거나 논의(論議)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공과 함께 모여 상의(相議)하였으며, 매번 서로 손을 잡고 기사(岐社)의 홰나무살구나무 그늘과 야정(埜亭)의 오동나무대나무 두둑에서 붉은 지팡이 짚은 백발(白髮)의 모습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연이어 광휘(光輝)를 발하여, 바라보며 기록(綺甪) 의 풍채와 같았던 것이 역역(歷歷)하게 어제만 같은데 점점 시간이 흘러가서 이미 선천(先天)에 속()하게 되었다.

외진 곳의 초라한 집에 업드려 사는 나는 공활(空豁)하고 심원(深遠)한 경지를 우러러보는 감회(感懷)와 잘못 맡겨진 일을 받드는 중책(重責)을 감당하기 어렵지만 이를 회피(回避)할 도리가 없어, 이에 병들어 헛소리하는 틈을 타서 눈과 귀로 보고 들은 것을 대략 글로 엮은 것으로 자손(慈孫)<사랑하는 손자>의 요청에 색책(塞責)<겉만 그럴듯하게 꾸며 책임을 면함>하는 바이다. 이것을 만약숨겨진 광채(光彩)를 천명(闡明)하고 묘도(墓道)를 장식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외람(猥濫) 스러운 일일 것이다.

 

()은 다음과 같다.

 

엄연(儼然)하고도 신중하며 엄밀(嚴密)하고도 굳센 儼恪僩瑟

그 아름다운 위의(威儀)가 도탑고도 순박하시네 令儀之厖而淳也

종족이 화목하고[婣睦] 미덥고 구휼(救恤)하는 婣睦任恤

아름다운 행실은 인륜(人倫)에 돈독(敦篤)하시네 懿行之篤乎倫也

봉분(封墳)은 우뚝 솟아 견고하고 편안하여 宰睪錮謐

형해(形骸)가 진택(眞宅)으로 돌아가 편히 쉬신 다네. 形骸之息于眞也

감히 위약(萎弱)한 붓에다가 먹물을 뿌려서 敢濺萎筆

교교연(嘐嘐然)하게 고인(古人)에 대해 말하는구나. 嘐嘐然曰古人

 

족증손(族曾孫) 연집淵楫은 삼가 짓는다.

 

*각주가 달린 원본은 D드라이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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