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상대의 조상

완원군 종릉 류빈

록야綠野 2015. 4. 6. 18:35

 

           완원군(完原君)    濱 (1367~1448)(영흥대도호부사)

 1388년 16세 소년으로 이방원(태종대왕)함께 동방진사.  조선을 개국하는데 공헌하였다.

통정대부 영흥대도호부사를 역임했다.

돌아가신 후 세종대왕께서는 임금의 예절에 준하는 장례(葬禮)를 치르라는 어명(御命)을 내렸다.

관군을 동원하여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승문리에 명당을 잡아, 8각형 능()을 조성하였다. 이 능을 종릉(鍾陵) 또는 류릉(柳陵)이라 부른다. 영천(영주)군에서 제향토록 명함. (陵 : 영주시 문수면 종릉산 ) 

 <서울에서 관군이 운구할 때 쓰던 상여가 최근까지 보관되었으나 집이 퇴락하여 철거하고 현재는  영주시 순흥 소수서원박물관에 상여의 彫刻 장식품 수십여 점이 보관되고 있음>

                                        配 : 정부인 수원 李씨        配 ; 정부인 단양 禹

 

 

영흥대도호부사(永興大都護府使) 류빈(柳濱)의 부친은 직제학류극서(柳克恕), 모친은 추밀원사

수평군(水平君) 이인수(李仁壽)의 따님 증숙부인 수원이씨이며, 조선왕조실록 세종28년 2월 12일에
“신[류의손]의 아비[류빈] 나이는 지금 77세이오며, 신의 어머니는 75세인데”라는 기록에 의하여 출생연대를 역산(逆算)하면 공민왕19(1370)년이 된다.
공(公)은 고려 말기에 진사(進士)로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진보(珍寶) 현감(縣監), 예빈시 주부(主簿), 사헌부 감찰(監察), 지평(持平), 경주부(慶州府) 도사(都事), 관찰사 경력(經歷), 사헌부 장령(掌令), 영천군(永川郡) 지군사(知郡事)를 거쳐 영흥대도호부사를하였는데 조선개국원종공신으로

 세종30 (1448)년에 별세하니 수(壽) 79세이다. 후에 둘째 아들 의손(義孫)의 귀(貴)로 이조 참판
(參判)에 추증(追增)되었다.
묘소는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승문리 산173번지에 있는데 종릉(鍾陵) 또는 류릉(柳陵)이라 불리고 있으며, 왕릉에 준하는 팔각묘로서 그 형상은 소백산의 옥녀봉(玉女峰)이 탄금대(彈琴臺)를 바라
보는 형상이라 하여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이라고 한다.
종릉(鍾陵)의 상계(上階)에는 분묘와 그에 부속된 호석(護石),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이 있고 계체석(階砌石)을 경계로 하여 그아래 배계절(拜階節)에는 문인석(文人石), 무인석(武人石)이 있는데
이들은 560년이 된 것이며, 상계(上階)에 있는 묘갈(墓碣)은 약400년 된 것이다.
종릉재사는 1993년 2월 25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8호로 지정되었고, 특히 이 분묘(墳墓)는 조선시대의 왕릉(王陵)에 준하는품격(品格)인 팔각묘(八角墓)로 조성(造成)되어 있는데 신하(臣下)
의 분묘(墳墓)가 능(陵)으로 불리고 있어 역사적인 사적지(史蹟地)로서, 학술적인 연구대상(硏究對象)으로서 향토문화재(鄕土文化材)의 가치(價値)가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능(陵)은 국왕(國王) 및 왕비(王妃)의 무덤을 말하며, 신하의 분묘를 능으로 봉하는

조례(條例)는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국가에 공적이 아무리 큰 사람이라도 능(陵)으로 봉해지는 경
우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류릉은 경남(慶南) 기장(機張)에 있는 차릉(車陵)과 함께 능(陵)으로 불리고 있다.

 그 예로서 영조시대 암행어사의 절목(節目)에는 종릉(鍾陵)으로, 영천군수의 완문(完文)에는 류릉(柳陵)으로 능(陵)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영흥대도호부사 류빈(柳濱)은 태종 임금보다26년 후에 별세하였으므로 이 분묘는 태종이 개국원종공신으로서절친(切親)한 류빈을 특히 아끼어 생전(生前)에 유언(遺言)을 하여
세종 임금이 종릉(鍾陵)이란 능호(陵號)를 하사(下賜)한 것으로 보이며, 영천군수에게 명하여 해마다 제사를 올리게 하였으나 임진왜란 후에 중지되었고 한다.
한편 종릉(鍾陵)에 예장(禮葬)시 한양(漢陽)에서 이곳까지 운구
(運柩)한 상여(喪輿)의 잔해(殘骸) 30점(点)은 영주시문화원에 기증
하였는데 귀중한 문화재 가치가 있다.

 

 

아래 사진은 종릉의 현재 모습인데,  8각형이며 둘레석은 높이가 45cm 길이는 200cm 의 큰 돌이 8개로 장 8각형 이며 아래 위에 8개의 장대석으로 8각형을 만들고 8개의 돌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직 6면체의 큰돌을 끼워서 릉의 형태를 만들고 내부는 회단석을 견고하게 하여 도굴이 불가능하게 조성하였다. 위에는 흙을 덮고 잔듸를 심었다.  정면에 구 비석과 상석이 있고 좌 우에 문관석 무관석이 있고 왼쪽에 새비석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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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은 조선 세종 때 관군이 영흥공 시신을 운구했는데 그때 사용한 상여가 2000년까지 상여각에 보관되었으나 너무 오래된지라  손상이 심하여 상여는 폐기하고 상여의 장식품은 영주시청 현관의 전시용 유리장 속에 보관 전시된 모습이다. 

 

 

. 묘비명(墓碑銘)
가. 개수비명(改竪碑銘) 2008年
증가선대부호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행통정대부영흥대도호부사류공묘비명
공의 성은 류(柳)요 이름은 빈(濱)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공은 지체 높은 집안에 태어나 태종(太宗;조선 3대왕)과 함께 진사시험에합격하였고 관직이 영흥부사에 이르렀는데 후에 아들이 귀하게 되어 참판으로 추증되었으며 할아버지 습(濕)은 증사헌부 장령이고 할머니는 삼한 국대부인에 봉해졌다.
아버지 극서(克恕)는 보문각 직제학 지제교를 지냈고 어머니 진주하씨는 증영의정 진양부원군 윤린(允潾)의 따님이며, 호정선생 윤(崙)의 누이이고, 어머니 수원이씨는 추밀원사 수평군(水平君) 인수(仁壽) 따님이시다.
공은 윤방익(尹邦益)의 따님 덕산윤씨를 부인으로 맞았고, 부인 단양우씨는 순(順)의 따님이니 곧 성균관 좨주(祭酒)인 탁(倬)의 증손녀이다.
공은 4남을 낳으시니 맏아들 경손(敬孫)은 증참의이고, 다음 의손(義孫)은 참판인데 문장으로 유명하였고, 그 다음 신손(信孫)은참판이며, 막내 말손(末孫)은 집의로서 참판에 추증되었다. 참의는2남을 낳으니 맏아들 맹기(孟沂)는 군수이고 막내 지성(之盛)은 참판에 추증되었다.
군수는 2남을 낳으니 맏아들 장(場)이고 막내 탄(坦)이다. 장의 4대손 담(潭)은 문과로서 정랑이고, 탄의 증손 화(華)는 영천(現 榮州)에 살고있다. 참판의 아들은 숭조(崇祖)와 흥조(興祖)이다.
숭조는 벼슬이 대사성에 이르고 성리학에 통달하여 유림의 존경을 받았으며, 아들은 응태(應台)이고 응태의 증손은 인영(仁榮)이다. 흥조의 아들은 응현(應賢)이고 응현의 증손은 인식(仁植)인데
안동에 산다.참판의 계남(系男) 계동(季潼)은 증승지인데 승지는 4남을 낳으니 장남의 식(軾)은 문과에 부사로 증참판이고, 다음 원(轅)은 봉사이며, 다음 주(輳)도 봉사이고, 다음 곡(轂)은 목사이다. 증참판의
아들 윤덕(潤德)은 문과에 참판이고 다음은 윤선(潤善)이며, 윤선의
손자 복기(復起)는 안동에 사는데 아들 5형제를 두었다.원(轅)의 아들 윤상(潤祥)은 생원이며, 증참판이다. 윤상(潤祥)의손자 지신(止信)은 무과로 부사이다. 주(輳)의 아들은 윤문(潤門)이며, 윤문의 손자 지신(止信)은 윤상(潤祥)의 后로 출계하였다. 곡(轂)의 아들 윤방(潤邦)은 별제이고, 윤범(潤範)은 교관이다.
집의는 3남을 낳았는데 맏아들 계반(季潘)은 참판이고, 다음 계장(季漳)은 첨지중추부사이며, 막내

계동(季潼)은 중부후(仲父后)로출계하였다. 참판의 아들 진(軫)은 현감이며, 현감의 증손 조생(肇生)은 무과로 호성공신이다. 첨지는 아들 헌(軒)을 낳으니 대사간으로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판서는 4남을

낳았는데 맏이 세붕(世鵬)은 전부이고, 다음 세린(世麟)은 이조참판으로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그 다음

세구(世龜)는 전첨으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막내 세봉(世鳳)은 사과를 지냈다
전부의 아들 영(寧)은 판관이고, 우(宇)는 사과이며, 판관의 아들 영범(永範)은 지금 직장이고, 사과의 아들 영부(永孚)는 문과로서정랑이다. 찬성은 3남을 두었는데 맏아들 신(信)은 문과로서 좌랑이고, 다음 의(儀)는 참봉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막내 수(脩)는 참봉이다.
영의정은 3남을 두었으니 영길(永吉)은 참판인데 시문으로 유명하고, 영경(永慶)은 지금 영의정으로서 전양부원군이며, 영하(永賀)는 직장이다. 참봉의 아들 영효(永孝)는 지금 감역이며, 참판의 아들 성(惺)은 지금

 문학이고 항(恒)은 수운판관이다. 영의정의 맏아들 열(悅)은 지금 통진현감이고 다음 흔(忻)은 호조좌랑에 추증되고, 다음 업(심(忄業))은 왕자의 스승이고, 다음 제(悌)는 송화현감이며, 막내는 선(愃)이다.
통진현감의 아들 정량(廷亮)은 정휘옹주에게 장가가서 전창위에봉해졌다. 판서는 4남을 낳으니 큰아들 감(堪)은 사인으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는데 성품이 바르고 곧아 뜻을 굽히지 않으니 을사사
화 때 불의에 굴하지 않아 18년간 귀양을 가서도 주역공부를 그치지 않았다.
다음 균(均)은 현령이며, 다음 훈(塤)은 판서이고 막내 연(埏)은부사로서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사인의 아들 영건(永健)은 부사이고, 영립(永立)은 참판이며, 영기(永起)는 지금 마전군수이다. 참판
의 아들 색(穡)은 지금 부수찬이며, 현령의 아들 영성(永成)은 지금청풍군수이다.
찬성의 아들 영겸(永謙)은 의금부의 경력이며, 영근(永謹)은 지금사간이고, 영순(永詢)은 지금 경상도 관찰사이다. 그 밖에 내외 자손이 번성하여 다 기록할 수 없고 대대로 고관이 계속해서 끊이지
않으므로 이는 실로 선대에서 덕을 쌓고 선행을 길러 이룬 것이니
아! 거룩하도다.
공의 묘는 영천군(現 영주군) 남쪽 종릉산 기슭에 있는데 부인덕산윤씨와 합장되어있고, 부인 단양우씨 묘소는 남원시 고죽동 임자의 산기슭에 있다. 옛날에 작은 비석이 있었으나 오랜 세월로 글
자가 닳아 알아볼 수 없어 6대손 영순(永詢)이 성묘를 하고 황송한 마음 금할 길 없어 삼가 작은 비석을 세우고 대강을 기록하여 후세에 알린다.


선조39(1606)년) 3월 일 세우다.
6대손 가선대부 행경상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순찰사 영순(永詢)이 삼가 짓다.
옛 비문이 마모되어 보첩에 따라 보완하여 비문을 고치다.
2008년 9월 25일
북천공 휘(諱) 영순파 종중에서 삼가 세우다.
註) 선조39(606)년에 세운 구비문에 빠진 부분을 보첩에 의거 수정 보완함.

 

나. 신도비명(神道碑銘) 2008년
朝鮮國 開國功臣 贈嘉善大夫 戶曹參判 行通政大夫 永興大都護府使 全州柳公 神道碑명 幷序


公의 諱는 濱이고 姓은 柳氏이며, 貫鄕은 全州이다. 祖考의 諱는濕으로 全州柳氏의始祖로 받들며, 高麗忠肅王代에 태어나 國家 元勳으로 完山伯에 封爵되었고 祖妣는 全州崔氏로 外命婦의 最高品階인 三韓國大夫人에 受封되었다. 考는 諱 克恕인데 文科에 올라 寶文閣 直提學 知製敎등 淸職을 거쳐 延安府使를 역임하였으며, 妣는贈領議政 諱 允潾의 따님인 贈淑夫人 晉州河氏와 樞密院使 諱 仁壽의따님 贈淑夫人 水原李氏이다.
公은 高麗恭愍王代에 태어나 後日 朝鮮王朝의 太宗이 되는 李芳遠과同榜으로 進士에 入格하고 이어 文科에 及第했다. 그러나 禑王十四年 戊辰(一三八八年)三月 아버지께서 王命에 의해 非命에 돌아가시니 開京에서 慶尙道 安東까지 千里길을 運柩하여 祿轉面 竹松里 山一番地 虎巖골 乙坐에 모신後 廬幕을 짓고 侍墓하니 稱頌이藉藉했고 마을이름도 公의 이름을 따서 柳濱洞이라 불러 오늘에 이르다.
公께서는 三年侍墓를 마치고 歸京하여 李芳遠을 도와 朝鮮王朝建國에 參與하고 開國原從功臣에 錄選되었다. 司憲府 監察 在任時에는 言官들과의 葛藤으로 여러차례 彈劾을 받았지만 公의 忠節을 익히 알고 있는 太宗은 그때 마다 上疏를 不允하였다.持平을 거쳐 外職으로 都事에 부임하여서는 民心을 잘살펴 百姓의 어려움을 仔詳하게 풀어 주었다.  內職으로 義禁府經歷과 司憲府掌令을歷任하고 集賢殿直提學에 轉任하였다가

다시 外職으로 永興大都護府使를 除授받고 建國初期 어지러운 나라의 紀綱을 바로잡아
百姓들의 苦痛을 쓰다듬어주는 등 善政을 베풀어 民瘼收拾에 크게이바지하였다.
公께서는 世宗 初期에 官職에서 물러나 隱居하면서 後進養成과 子姪訓育에 盡力하였으며 次子 義孫의 貴로 戶曹參判에 追贈되었다. 配位는 成均館 祭酒 禹倬의 孫壻인 尹邦益의 女 贈貞夫人 德山尹氏와 또한禹倬의

孫인 順의 女 贈貞夫人 丹陽禹氏이다. 膝下에敬孫, 義孫, 信孫, 末孫을, 두었고 世宗三十年 戊辰(一四四八年)七十九歲를 一期로 壽를 다하니 朝廷에서 明堂을 指定하여 禮葬하게하고 官에서 每年 致祭하였다.
지금 慶尙北道 榮州市에서 남쪽으로 二十餘里 밖 文殊面 繩文里에는 白頭大幹의 正氣가 太白따라 뻗어내려 小白山玉女峯에 머물면서 彈琴臺를 바라보며 玉女彈琴穴을 이룬 아늑한 明處인데 이곳 丑坐原에 鍾陵이

있으니 곧 公의 幽宅이다. 오랫동안 朝廷에서 致祭해 오다가 壬辰倭亂의 혼란 중에 中斷되었으며,

 墓所는 陵으로 불리우고 있다. 오늘날 陵으로 불리우는 士大夫의 墳墓는 慶南機張있는 車陵과 더불어 鍾陵뿐이다.
紹修書院 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는 鍾陵齋直의 부역과 호포의 租稅를 減免하라는 暗行御史의 節目과 榮川郡守의 完文에 鍾陵 또는柳陵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은 世宗께서 鍾陵이라고 賜陵하였기 때문이다.
먼저 棄世하신 贈貞夫人 德山尹氏는 다른 곳에 葬事하였다가 公의 禮葬時 合祔하였다고 전하며 贈貞夫人

 丹陽禹氏는 四男 末孫께서 모시던 중 淳昌郡守 재임시 別世하여 全北 南原市 高竹洞 山三十二 壬坐에 安葬하였다. 子孫이 번창하여 長男 敬孫은 中部令에贈吏曹參議이고 孫 孟沂는 郡守이며, 之盛은 典牲署令에

 贈吏曹參判이다. 曾孫場은 監察에 贈同知이며, 坦은 都事이다. 崇祖는 文科에 大司成이며, 七書諺解와 大學十箴및 性理淵源撮要를 찬집하여性理學者로 명성이 높았으며, 贈左贊成에諡號는 文穆이며, 興祖는

天文學敎授이다.
次男 義孫은 文科 重試로 都承旨 및 吏曹와 禮曹參判을 역임하고 集賢殿 提學으로 世宗朝에 名臣이며, 文名이 높았으나 아들이 없어 아우 末孫의 三男인 季潼을 양자하니 贈都承旨이다. 曾孫 軾은 文科에 府使이고

 轅은 奉事로 贈參議이며, 輳는 進士에 奉事이고, 轂은 生員에 牧使이다. 三男 信孫은 參判에 자손이 없다.
四男 末孫은 郡守에 執義이고 贈參判이다. 孫 季潘은 文科에 監司이며, 參判이고 曾孫 軫은 縣監에 贈判書이다. 孫 季漳은 武科에折衝將軍 僉知中樞府事이고 曾孫 軒은 文科에 大司諫이며, 淸白吏에 錄選되고 贈吏曹判書이다. 이후로 孫勢는 더욱 번성하여 五代孫塤이 刑曹判書이고 六代孫 永慶은 全陽府院君 領議政이며, 八代孫廷亮은 駙馬로 全昌君이며, 諡號는孝靖이다. 十二代孫 復明은 禮曹判書에 諡號가 貞簡이며, 十三代孫 戇은 工曹判書에 諡號가 孝簡이다. 以下 다 記錄하지 못한다.
一日에 裔孫되는 成均館 曾經室長 重大甫가 泮宮으로 家狀과 參考資料를 갖고 찿아 와 글을 請하니 不佞이 辭讓해 마지 않았으나얻지 못하고 이에 銘하기를,
어릴적에 庭訓받아 學問操行 익혔다네
文科及第 宦路열자 絶痛할손 考位橫厄
千里運柩 三年侍墓 出天孝行 稱頌받고
開國參與 功臣錄選 太宗信任 두터웠네

功成身退 後進養成 子孫薰育 精誠쏟고
壽누려서 明堂얻고 鍾陵이라 襃揚했네
積善之家 必有餘慶 子孫繁昌 가이없고
香氣로운 그이름이 길이길이 傳해가리


檀君紀元 四千三百四拾一年 戊子 九月25日
成均館長 慶州人 崔 根 德 謹撰
二十代孫 東洋마샬(株) 會長 錫基 謹竪


 묘사개축기(墓莎改築記) 1690년
묘사개축기
선조 영흥부사 증참판의 의리(衣履)를 장사 지낸지 오래되었으나연월일을 기록치 않아 지금 대략 계산해

보니 거의 3백년이 된다.
추측하건대 조상의 은덕이 성하게 반복되어 서울과 지방에 있는 자손이 부지기수이고 사람들에게 알려져 대대로 벼슬이 이어졌다.분묘에는 옛날과 다름없이 제사가 끊이지 않고 방백, 수령이 된사람들이 서로 우러러 사모하며, 그 묘소를 살펴 가꾸니 가히 조상의 덕이 무궁함을 보겠도다.
연대가 오래되어 묘소로 가는 길과 사대(莎臺), 환석(環石)이 무너진 곳이 있어 후손 안동부사 류경(柳炅)이 시골에 있는 여러 일가와 함께 상의하여 날자를 정하고 석축이 결손된 곳은 고치고, 사토가 마른 것은

교체하고, 묘역을 새롭게 하여 다시 본래대로 되었으니 조상을 추모하는 마음에 섭섭한 감이 조금은 적어지는구나.
처음에 묘소를 절개할 때 지석을 찾아내어 선대의 계(系)를 잇는일이 중대하여 넓고 깊게 팠으나 끝내 찾지 못했으니 이것이 개탄스럽다.
또한 생각해보니 이전 선조39(1606)년에 후손 류영순이 경상도관찰사일 때 사실을 기록하여 묘갈을 세우고 재실을 지어서 향사할곳을 마련하였고 효종3(1652)년에 후손 심(淰)이 경상도 관찰사를할 때 산직이를 두어 기리 수호케 하였다.
이제 또 크게 개수하였는데 이 모두가 우리 선조의 거듭 생기는경사가 풍요하기 때문이니 어찌 성하지

 않겠는가? 전후의 사실을기록하여 장래에 오늘을 잇는 자에게 알리니 무궁하리라.

1690년 2월8일
10세손 통정대부 행안동대도호부사 류경(柳炅)이 삼가 기록한다.

 


라. 종릉수묘기(鍾陵修墓記) 2008년
鍾陵修墓記

이곳 鍾陵은 全州柳氏 三世이신 諱濱 顯祖님의 幽宅을 모신 곳으로 일명 柳陵이라고도 전한다.

일반 士大夫家의 분묘를 陵으로 부르고 지도에도 鍾陵으로 표기하고 있음은 실로 현조님의

후예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한다.
일찍이 宣祖39년 6대손 北川公 諱永詢께서 경상도 관찰사 재임시墓碣建竪와 齋舍 창건을 한 이래 修墓와

重補修를 거듭하여 香火를이어 오던 중 현조님의 묘역을 수호 보존하여 후손에게 이어가게하기 위하여

 종인이 뜻을 모아 1992년 6월 25일 前民韓黨 總裁를역임하신 柳致松宗을 초대회장에 推戴하고 종중을 구성 발족하기에이르렀다.
1993년2월25일 齋舍 追遠齋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8호로지정받고 3년여 만에 중수공사가 마무리되었다.
그 후 종중회의에서 현조님의 묘역을 문화재로 신청 할 것과 차제에 신도비를 세워 齋舍와 더불어 명실상부 陵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자는데 의견을 같이하여 이 爲先事에 착수하고 많은 종인에게 동참을 권유하는

통문을 보냈던바 경향각지의 모든 종인께서 적극 참여하여 오늘 莎草와 더불어 신도비를 세우는 등 爲先事에 참여하신종인과 후손의 모선 정신은 후세에 거울 되어 빛날 것이며 빈약한재정난을 극복하고 종인의 힘을

 한데모아 이 사업을 차질 없이 완수한 집행부의 노력과 많은 宗中과 宗賢의 追遠之誠이 답지하니 많으나

 적으나 그 뜻은 하나이니 그 이름을 새김이 아니고 그 뜻을이 돌과 木板에 새겨 기린다.


2008年 戊子 9月 25日
全州柳氏 永興公派宗中
會長 柳 錫 根 謹撰

 

 

관련(關聯) 기록물(記錄物)
 종릉재사(鍾陵齋舍)
선조39(1606)년 3월 1일 
감사(監司) 류영순(柳永詢)의 선영(先塋)이 영천과 예안, 두 고을에 있는데 영순이 재사(齋舍)를 짓고, 돌을 캐서 비(碑)를 세우고 또 그의 일족(一族)을 위하여 거처(居處)도 지었다.

[영주의 문화유산 영주문화원 2005년]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278호(경상북도)
지정일자 : 1993. 2. 25.
소 유 자 : 전주류씨 수곡파문중
소 유 지 : 영주시 문수면 승문리 10


이 건물은 전주류씨의 파조(派祖)인 류빈(柳濱)의 묘소 아래에 있는 재사이다. 1606(선조39)년에 후손 류영순(柳永詢)이 경상감사로 재임할 때 건립하였다. ㄱ자형의 행랑채와 추원당(追遠堂), 정침이튼 口자형을 이루고 있는데, 행랑채 사이로 난 대문을 들어서면 내정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원당이 자리 잡고 있으며 정면에는 정침이자리 잡고 있다.
대지를 경사진 산허리에 자리 잡은 관계로 정침이 기단은 매우높게 조성되어 있으며 추원당은 2층 누마루식으로꾸몄다. 추원당은 정침쪽인 우측에 온돌방 1칸을두고 앞쪽으로 3칸을 연접시켜 우물마루를 꾸몄다.
온돌방이 정침과 같은 높은 기단위에 둔 관계로 앞쪽으로 내민 마루는 단 차이로 인해 자연히 누마루를 형성하게 되었으며그 하부에는 토벽으로 막아 수장 공간으로 꾸몄다.
전면에는 헌함을 설치하였는데 헌함은 좌측의 2칸 반까지만 설치하여 추원재로 출입은 온돌방 옆의 헌함이 없는 부분에서 이루어지게 하였다. 3량가인데 대량 위에는 폭이 좁은 제형판대공을 세워장혀와 종도리를 받게 하였다.

대청의 배면에는 좌측 2칸에는 온연귀한 문틀을 설치하였는데 풍소란형의 가운데설주를 세우고 쌍여닫이

띠장널창을 달았다. 좌측면에는 반연귀한 문틀을 설치하고 가운데 설주를 세웠다.
정침은 자연석 난형쌓기한 기단을 5자 가량 높이로 매우 높게 축조하였다. 기단 위에는 덤벙주초를 놓고

기둥을 세웠는데 전면의 3본은 8주각을 사용하였다. 우측 2칸을 통간으로 처리하여 매우 큰부엌을 꾸미고

좌측에는 온돌방을 두었다.온돌방의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퇴간을 두었으며 뒤에는 고방과
퇴간을 설치하였다. 온돌방의 우측간 전면에는 머름없이 문틀을 높이 설치하였는데 문틀의 상·하에는 가운데 설주를 세웠던 홈이 남아있다.
행랑채는 중문간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외양간을 두었으며 우측에는 2통칸의 행랑방을 두었다. 행랑방의 우측에는 부출입문으로 사용되는 문간이 또 하나 마련되었는데 여기에서 축이 꺾여 1칸 반 규모의 온돌방과

고방이 연접되어 있다. 가구수법 등에서 고식의수법을 간직하고 있어 건축사적인 측면에서 귀중한 자료이다.

 류빈(柳濱)의 상여(喪輿)
영흥대도호부사 류빈(柳濱)의 장례 시는 한양(漢陽)에서 이곳까지 운구(運柩)하여 장례를 치렀는데 아래의 그림은 관군(官軍)이 운구한 상여(喪輿)의 잔품(殘品)으로서 상여의 주틀은 없어지고 잔품 30점만 남아 있는데 현재 영주문화원에서 보관하고 있다.의 일부

    암행어사(暗行御史) 절목(節目) [소수박물관 소장]
영구히 시행할지어다. 암행어사가 세금을 결정하는 그 속에는 사대부 묘소 제직은 부역을 감해주도록 하는 것은 법으로 되어있다. 그래서 지금 그 명령을 내리는 것이니 본군 종릉 묘소 제직에게는 호포와 부역 같은 것은 일체 면제하여 주도록 하고 후일에도 영구히 제직에게는 침해할 수 없음을 강조하면서 그 절목을 아래와 같이 적어 주노라. 부역과 세금을 내는 것과 잡부역 같은 것
그 외에도 부역은 없애라. 이 뜻은 절대 침해하거나 거역할 수 없다. 다시 강조하지 않더라도 앞으로는 계속 이대로 시행함이 마땅할 것이니라.

                                                    을유(1885)년 5월 20일 암행어사 (手決)


註)이 문서는 영주군 순흥면 승문리 종릉에 있는 영흥공(류빈)묘소 재직(齋
直)에게 세금과 부역을 면제해 주도록 지시한 암행어사의 절목이다. 당시는 사대
부 묘소 재직에 대한 연역(煙役)과 호포(戶布)의 면제가 법제화되어 있었으나 지
방 수령(군수, 현감)들이 제대로 지키지 않으므로 암행어사를 수시로 파견하여
확인토록 한 후 시행에 어긋남이 없도록 엄명을 내렸던 것이다. 이 암행어사 절
목을 쓴 분은 17세 류의양(柳義養)으로 영조39 (1763)년 황해도 송화현감 재직
중에 증광시에 급제하여 사헌부 정언으로 있을 때 영조 임금의 특명으로 영남어
사가 되어 종능에 성묘하고 묘직이가 세금과 부역에 시달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 절목을 발행하여 면제받도록 한 것이라 한다. 이 절목은 어사가 자필(自
筆)로 쓰고 문서(文書)에 마패(馬牌)로 인(印)을 찍어 영구히 준행토록 하였다.

 

 영천(榮川)군수 완문(完文) [소수박물관 소장]
[류릉(柳陵)이 기록된 영천군수의 완문(完文)]
완 문  
안동의 류치두(柳致斗)가 제출한 민원서를 접수하였다.

 내용인즉 자신들의 선조 참판공 묘소가 읍(邑) 남쪽 돌문동에 있는데 부역(賦役) 문제는 예조
(禮曹)에 이미 등록되어 있어 감면(減免)되었는데 바로 종릉묘소가 된다. 이에 읍(邑)의 호포(戶布)와 잡역(雜役)까지도 함께 감면하여 달라는 뜻으로 공문을 발급하여 주어 영구히 준행토록 하여주고 또한 품정(品定)을 하여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도(道)에 통문(通文)한 절목(節目)이 있고 영문(營門)에서도 판결(判決)이 되었기로 이에 정중히 답(答)하노라.
본동 호포(戶布) 중에서 한 몫의 호포는 류릉(柳陵) 몫으로 감면한다는 뜻으로 공문을 작성하여 주며, 영구히 준행할 것을 확실히 상규로 함을 알려주노라.

을유(1885)년 10월 20일
관 (수결)
註1) 완문(完文) : 조선시대 관(官)에서 발급하던 문서.
2) 호포(戶布) : 호(戶)마다 포(布)를 징수는 세(稅).


 류의손형제화회문기(柳義孫兄弟和會文記 )
세종30(1448)년 경 류빈(柳濱)의 네 아들이 부모 사후에 노비를 화회분집하는 문서이다.

분재기(分財記)는 帖冊分財記로서 분재기를 성첩하는 과정에서 명문(明文), 소지(所志), 초사(招辭),

입입안(立案) 등의 문서를 함께 수록한 자료 중 일부이다.
분재기가 수록된 「첩책분재기」에는 분재기 12건, 명문 2건, 소지 1건, 초사 2건, 입안 1건 등 모두 5종 18건의 문서가 수록되어있다. 이들 문서는 19세기 이전의 어느 시점에 배접하는 과정에서원형이 많이 변형되었

는데, 본 유의손형제 화회문기 역시 본래 1장의 문서였으나 6면에 나누어 배접되었으며 일부는 낙장되었다.
문서의 전반부가 결락되어 정확한 작성시기를 파악할 수 없다.
단지 문서의 말미에 등장하는 인물 중 류의손(柳義孫, 1398-1450)의 관직이 예조판서로 기록되어 있어 연대 추정이 가능하다. 그가 예조판서에 임명된 연도는 세종29(1447)년이며 사망한 연도는 세종32(1550)년이다. 따라서 본 문서의 작성시기는 적어도 1448년에서1550년 사이이다.
분재기에는 380구 가량의 노비가 등장하고 있는 반면 전답에 대한 내용이다.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전기 사회에서는 전답보다는 노비에 대한 재산적 가치를 중시하였는데 이러한 시대적 현상을 일부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들 380구(口) 가량의 노비 가운데 봉사조(奉仕條)로 지정된 6구를 제외하고는 4형제가 가각 80~90구씩 평균 분집하였다. 이 외에도 류빈의 장손인 류맹기(柳孟沂)에게는 노비 10구를 별도로 지급하고 그 이하

류지성(柳之盛) 등 8인에게는 1구를 분재하였다.
이들 중에는 류빈의 손자로 확인되는 인물이 대부분이지만 일부 성격이 확인되지 않는 존재도 있다.

본 분재기는 노비를 중심으로한 자녀균분상속의 양상을 나타내면서도, 한편으로는 화회당사자인
류의손형제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들에게 까지 일정한 몫이 분재되고 있어 일반적인 분재양상과는 차이를 보인다.

류의손형제 화회문기는 현존하는 분재기 중 두 번째로 오랜 것이며 화회문기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자료의 의미가 크다.

 

 

종릉 신도비

 

 # 2008년 종릉 정비 성역화 사업(종회장 류석근)때 본인(仲榮)도 금 1,000,000원을 협조하여 비석에 새겨졌다.

                                                 

 

 

 

영흥공과 범바위 산소 이야기

 영흥공<濱>께서 친상을 당하여 산소 터를 구하는 중에 뒷간에 가셨는데 범이 나타나서 아가리를 벌리는지라 공께서 꾸짖어 가로대

 “아무리 짐승이기로 서니 부모상을 당한 사람을 잡아먹는 것은        의리에 부당하다. 너도 부자간의 은의를 아는 짐승이니 썩 다른 곳으로   가거라.” 하니, 범이 마치 무엇을 구하는 듯 입을 벌리는 지라

 “네가 나를 잡아먹을 테냐?” 하니, 범이 고개를 흔드는지라

 “그러면 입에 무엇이 있느냐?” 하니 입을 손에 대고 답답해하는지라

그제야 손을 입에 넣으니 목에 비녀가 걸려있거늘 곧 집어내니, 범이 감사하단 뜻으로 등을 대고 곧 타라는 모양을 보이거늘 그제야 잡아타니 하룻밤 사이에 송도에서 경상도 예안<녹전면 호암리>까지 와서  범 바위 산소 터를 잡았 나니라.

 영흥공이 그 터에 장사를 지내고 근처에서 거려(居廬)<여막을 짓고 생활 함> 하시니 그곳을 효자 암이라 이르고 산소가 있는 곳을 류빈(柳濱) 골이라 하니 이것은 영흥공의 성휘(姓諱)를 잇거려 지명이 되었느니라.

 <『류빈골』은 2004년 중앙일보가 발행한 전국 상세 지도에도 있고, 2005년 안동시에서 설치한 버스정류장에도 『류빈골』이라 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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