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류씨(全州柳氏)
일세조 휘(諱): 류 습(柳 濕), 완산백(完山伯) 묘소: 전북 전주시 덕진구 인후동 안골 축좌원에 비위 삼한국대부인 전주최씨 묘소와 합폄<전에는 전주시 고산면 율곡리 산 10번지 해좌 원에 있었으나 공단 조성으로 이장>
전주 류씨(全州柳氏)는 습(濕)이 고려(高麗)말에 전주(全州)로 이거(移居)하여 봉정대부(奉正大夫)로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추증되고 완산백(完山伯)에 추봉되었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전주(全州)를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
일세조 습의 아들 5형제중 둘째 극서(克恕)가 고려조에서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중현대부(中顯大夫)로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 提學)과 지제교(知製敎)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빈(濱)과 손자 의손(義孫)이 크게 현달(顯達)하여 명문(名門)의 위치에 올랐다. 조선(朝鮮) 세종조(世宗朝)에서 문장(文章)이 뛰어나 남수문(南秀文), 권채(權埰)와 더불어 <집현전 삼선생(集賢殿三先生)> 으로 일컬어졌던 의손(義孫)은 세조(世祖)가 왕위(王位)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전주(全州) 황방산(黃方山)으로 내려가 시문(詩文)으로 생을 마쳤으며, 그의 아우 신손(信孫)은 참판(參判)을, 말손(末孫)은 순창 군수(淳昌郡守)를 거쳐 집의(執義)를 역임했다. 한편 판관(判官) 경손(敬孫)의 손자 숭조(崇祖)는 18년간 성균관(成均館)에 재직하는 동안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공부하여 경사(經史)에 통달했으며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실현하려는 최초의 학자로서 문하(門下)에서 조광조(趙光祖) 를 비롯한 대학자(大學者)를 배출하여 명성을 떨쳤다. 말손(末孫)의 손자 헌(軒)은 연산군(燕山君) 때 삼사(三司)의 벼슬에 있으면서 난정을 극간하는 만언소(萬言疎)와 임사홍(任士洪), 류자광(柳子光)의 방자함을 탄핵하는 소(疎)를 올렸다가 제주 도(濟州道)로 귀양보내지고, 화가 난 연산군은 사간원(司諫院)을 귀찮고 말이 많은 기관이라 하여 폐지해 버림으로써 헌은 연산조의 마지막 대사간이었다. 그의 아들 세린(世麟)은 기묘 사화(己卯士禍) 때 성균관의 유생들을 이끌고 조광조를 구제 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말손(末孫)의 세째 아들로 중부(仲父)의 의손(義孫)에게 출계(出系)한 계동(季潼)은 충무위 부사직을 역임했고, 그의 손자 윤덕(潤德)이 부제학(副提學)을 지냈다. 정유재란 때 연안 부사(延安府使)로 활약했던 영 길(永吉:대사간 헌의 증손)은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이르러 치사(致仕)했고, 그의 아우 영경(永慶)은 선조(宣祖) 때 소북파 (小北派)의 영수로 정유재란에 공(功)을 세워 호성이등공신(扈聖二等功臣)으로 전양부원군(全陽府院君)에 봉해지고 좌의정 (左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으며, 선조(宣祖) 말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광해군에 대신하여 세자로 옹립하려 했으나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경흥(慶興)에 유배되어 사사(賜死)되었다. 그외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외숙(外叔)인 김성일(金誠一)의 휘하에서 전공을 세웠던 복립(復立)이 진주성(晋州城)을 방어하다가 함락되자 의병장(義兵將) 김천 일(金千溢)과 함께 투신자결하여 충신정문(忠臣旌門)이 세워졌고, 인조(仁祖) 때 전창위(全昌慰)에 습봉된 심은 송설체 (松雪體)로 유명했다. 1623년(인조 1)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한 질(秩)은 영성(永成)의 셋째 아들로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철원 부사(鐵原府使) 청병에게 살해 되었으며, 즙(楫)의 맏아들 경창(慶昌)은 인조(仁祖) 때 등과(登科)하여 홍문 관 부정자(弘文館副正字)를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지내고 예조참판(禮曹參判)을 거쳐 현종(顯宗) 때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대사간과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영조(英祖) 때 대사간(大司諫) 을 지내고 제자백가(諸子百家)와 천문(天文), 지지(地支)에 정통했던 정원(正源)은 병률(兵律)과 도학(道學)에도 능통하여 삼산문집(三山文集)과 하락지요(河洛指要)를 저술했고, 의양(義養)은 정조조(正祖朝)에서 춘관지(春官志)와 영희전지(永禧殿誌) 를 편찬하고 승지(承旨)가 되어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수찬에 참여하여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정조조에서 홍주목사(洪州牧使)로 선정(善政)을 베풀었던 의(誼)는 대사헌에 이르렀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홍산(鴻山)에서 일본군(日本軍)과 싸우고 3·1운동 때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던 준근(濬根)과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한 인식(寅植)이 가통(家統)을 이어 전주유씨(全州柳氏)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 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전주유씨는 남한(南韓)에 총 11,365가구, 47,383명 살고 있는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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