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주교지(戒酒 敎旨)
세종 15년 10월 28일 (정축)
교지(敎旨)를 내리기를, “대체로 들으니, 술[酒]을 마련하는 것은 술 마시는 것을 숭상하기 위한 것은 아니고, 신명(神明)을 받들고 빈객(賓客)을 대접하며, 나이 많은 이를 부양(扶養)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제사 때에 술 마시는 것은 술잔을 올리고 술잔을 돌려주고 하는 것으로 절차(節次)를 삼고, 회사(會射) 때에 술 마시는 것은 읍양(揖讓)하는 것으로 예를 삼는다. 향사(鄕射)의 예는 친목(親睦)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고, 양로(養老)의 예는 연령(年齡)과 덕행을 숭상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건만 오히려 말하기를, 손과 주인이 백 번 절하고 술 세 순배를 돌린다.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종일 술을 마셔도 취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선왕(先王)이 술의 예절을 제정할 때에 술의 폐해에 대비(對備)한 것이 더할 수 없이 극진하였다. 후세에 내려와서 풍속과 습관이 옛스럽지 않고, 다만 크게 많이 차리는 것만을 힘쓰게 된 까닭에, 금주(禁酒)하는 법이 비록 엄중하나 마침내 그 폐해를 구제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한탄스러움을 이길 수 있겠는가.
술의 해독은 크니, 어찌 특히 곡식을 썩히고 재물을 허비하는 일뿐이겠는가. 술은 안으로 마음과 의지(意志)를 손상시키고 겉으로는 위의(威儀)를 잃게 한다. 혹은 술 때문에 부모의 봉양을 버리고, 혹은 남녀의 분별을 문란하게 하니, 해독이 크면 나라를 잃고 집을 패망(敗亡)하게 만들며, 해독이 적으면 성품(性稟)을 파괴시키고 생명을 상실(喪失)하게 한다. 그것이 강상(綱常)을 더럽혀 문란하게 만들고 풍속을 퇴폐하게 하는 것은 이루 다 열거(列擧)할 수 없다.
우선 그 중에서 한두 가지 경계해야 할 것과 본받아야 할 것만을 지적하여 말하겠다. 상(商)나라의 주왕(紂王)과 주(周)나라의 여왕(厲王)은 술로 그 나라를 망하게 하였으며, 동진(東晉)의 풍속은 술 때문에 나라를 망하게 하였다. 정(鄭)나라의 대부(大夫) 백유(伯有)는 땅굴을 파서 집을 만들고 그 속에서 밤에 술을 마시다가 자석(子晳)에게 불태워져 죽었으며, 전한(前漢)의 교위(校尉) 진준(陳遵)은 매양 손님들과 크게 마시기를 좋아하여, 손이 오면 문득 손이 떠나가지 못하도록 문을 닫고 타고 온 수레를 움직일 수 없게 만들더니, 흉노(凶奴)에게 사자(使者)로 갔다가 술에 취하여 살해되었다. 후한(後漢)의 사예 교위(司隸校尉) 정충(丁冲)은 자주 제장(諸將)들에게 찾아다니면서 술을 먹더니 창자가 썩어서 죽었으며, 진(晉)나라의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주개(周豈頁)는 술 한 섬을 거뜬히 마시었는데, 한번은 옛 술친구가 왔으므로 즐겨 함께 술을 마시고 몹시 취했다가, 술이 깨서 손[客]을 가 보게 하였더니, 손은 이미 갈비가 썩어서 죽어 있었다고 한다. 후위(後魏)의 하후사(夏候史)는 성질이 술을 좋아하여 상중(喪中)에 있으면서도 슬퍼하지 아니하며 좋은 막걸리를 입에서 떼지 않으니, 아우와 누이는 굶주림과 추위를 면치 못하였는데, 마침내 술에 취한 채 혼수상태로 죽었다. 이러한 일들은 진실로 경계해야 할 일들이다.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은 주고(酒誥)를 지어 상(商)나라의 백성들을 훈계하였고, 위(衛)나라의 무공(武公)은 빈연(賓筵)의 시를 지어 스스로 경책(警責)하였다. 진(晉)나라 원제(元帝)가 술 때문에 정사를 폐하는 일이 많으니, 왕도(王導)가 깊이 경계하여 말하니, 임금이 술잔을 엎어 버리라고 명령하고 드디어 술을 끊었다. 원(元)나라의 태종(太宗)이 날마다 대신들과 함께 취하도록 술을 마시더니, 야율초재(耶律楚材)가 드디어 주조(酒槽)의 금속 주둥이를 가지고 가서 아뢰기를, ?이 쇠[鐵]도 술에 침식(侵蝕)됨이 이와 같습니다. 더군다나, 사람의 내장[五腸]이 손상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매, 황제가 깨닫고 좌우(左右)의 모시는 사람들에게 칙명(勅命)을 내려 날마다 술은 석 잔만 올리게 하여 끊었다. 진(晉)나라의 도간(陶侃)이 매번 술 마실 때에 일정한 한계가 있으므로, 어떤 사람이 조금만 더 먹으라고 권하니, 도간(陶侃)이 한참 동안 슬픈 얼굴을 하다가 말하기를, ?소년 때에 술 때문에 실수한 일이 있어서, 돌아가신 아버지와 약속한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감히 그 약속한 한계를 넘지 못합니다.?고 하였다. 유곤(庾袞)은 그의 아버지가 살았을 때에 항상 곤에게 술을 조심하라고 훈계하였더니, 그 뒤에 곤은 취할 때마다 문득 스스로 꾸짖어 말하기를, ?내가 선인의 훈계를 저버리고 어찌 남을 훈계할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아버지의 무덤 앞에 가서 스스로 매 20대를 쳤다고 한다. 이러한 일들은 진실로 본받을 만한 것이다. 또 우리나라의 일을 가지고 말한다면, 옛날 신라가 포석정(鮑石亭)에서 패(敗)하고, 백제가 낙화암(落花巖)에서 멸망한 것이 술 때문이 아닌 것이 없다. 고려의 말기(末期)에는 상하가 서로 이끌고 술에 빠져 제멋대로 방자하게 굴다가 마침내 멸망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도 또한 가까운 은감(殷鑑)이 되는 것이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께서 일찍 큰 왕업(王業)의 터전을 만드시고, 태종께서 이어 지으시어 정치와 교화(敎化)를 닦아 밝히시니, 만세에 지켜야 할 헌장(憲章)을 남기셨다. 군중이 모여 술 마시는 것을 금지하는 조문을 법령에 명시(明示)하여, 오래 물들었던 풍속을 개혁하고 오직 새롭게 하는 교화를 이룩하였다. 내가 부덕(不德)한 몸으로 외람되게 왕업(王業)을 계승하게 되매, 밤낮으로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편안히 다스리기를 도모하되, 지나간 옛날의 실패를 거울로 삼고 조종(祖宗)의 이루어 놓은 법을 준수(遵守)하여, 예로써 보이고 법으로써 규찰(糾察)하였다. 나의 마음 쓰는 것이 지극하지 않은 것이 없건만, 그대들 신민(臣民)들은 술 때문에 덕(德)을 잃는 일이 가끔 있으니, 이것은 전조(前朝)의 쇠퇴하고 미약하였던 풍조가 아직 다 없어지지 않기 때문인 것이므로, 내가 매우 민망하게 여긴다. 아아, 술이 해독을 끼침이 이처럼 참혹하건만 아직도 깨닫지 못하니 또한 무슨 마음들인가. 비록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지는 못할망정, 제 한 몸의 생명도 돌아보지 않는단 말인가. 조정에 벼슬하는 신하인 유식(有識)한 자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거리의 아래 백성들이 무슨 일인들 안하겠는가. 형사 소송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이것에서 생기는 것이 많았다. 처음을 삼가지 않으면 말류(末流)의 폐해는 진실로 두려워할 만한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옛일을 고증(考證)하고 지금 일을 증거로 하여 거듭거듭 타이르고 경계하는 까닭이다. 그대들 중앙과 지방의 대소 신민(大小臣民)들은 나의 간절한 생각을 본받고 과거(過去) 사람들이 실패를 보아서 오늘의 권면(勸勉)과 징계를 삼으라. 술 마시기를 즐기느라고 일을 폐(廢)하는 일이 없을 것이며, 술을 과음(過飮)하여 몸에 병이 들게 하지 말라. 각각 너의 의용(儀容)을 조심하며 술을 상음(常飮) 말라는 훈계를 준수하여 굳게 술을 절제(節制)한다면, 거의 풍습(風習)을 변경시키기에 이를 것이다. 너희 예조에서는 이 나의 간절한 뜻을 본받아 중앙과 지방을 깨우쳐 타이르라.?
이는 예문 응교(藝文應敎) 류의손(柳義孫)이 기초한 글인데, 드디어 주자소(鑄字所)에 명령하여 인쇄하여 중앙과 지방에 반포하게 하였다.
![]() |
이지애 - 내 마음속 푸른 하늘 | |
음악이 안 들리면 '여기'를 클릭해주세요 |
|
음악 바 없이 나옴
'뿌리 > 상대의 조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회헌 류의손 (0) | 2015.04.06 |
---|---|
완원군 종릉 류빈 (0) | 2015.04.06 |
전주류씨 (0) | 2014.04.03 |
회헌공파 직계선조와 조선왕조실록 (0) | 2013.11.01 |
시조부터 직계 계보 및 관련 자료 (0) | 2009.09.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