팡파르/윤상희 | 尹相姬
드디어 오늘 아침 나팔을 불었다. 천사의 소리인가 거실 가득 은은하게 울려 퍼진다. 옆에 있는 초록 친구들도 덩달아 재잘재잘 들썩거린다. 창가에 앉은 화분들이 한껏 들떠 있다. 오늘은 기쁜 소식을 들
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으로 평소보다 조금 일찍 일어났다. 어제 저녁
꽃봉오리가 벙글어서 밤새 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돌아오지 못할 그 사람을 기다리며 연가라도 부르는 것일까. 꽃이 입을 벌리는 데도 세 시간을 기다렸다. 활짝 웃는 환희의 순간을 카메라에 담아 두기 위해 설레는 마음으로 화분 주위를 맴돈다.
6월 모임에 단독주택에 사는 친구가 꽃모종을 심어서 한 분씩 나누어
주었다. 이제 겨우 본 잎 2개가 나온 나팔꽃 모종이다. 이놈이 자라서 언
제쯤 꽃을 피울 수 있으려나 기대 반, 염려 반인 표정들이었다. 달포가 지나자 여기저기서 나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카톡 방을 뜨겁게 달군다.
집집마다 예쁜 꽃을 사진으로 전송하면 바로 축하 인사로 까꿍, 까까꿍이
이어진다. 꽃 중에서도 하찮게 지나쳐 버렸던 나팔꽃이 이렇게 삶의 활력소가 되리라고는 짐작도 못 했다. 자연은 묘한 힘을 지닌 듯하다.
우리집 모종은 키만 크고 꽃눈은 찾기 힘들었다. 아침마다 실눈을 뜨고 찾아봐도 잎만 무성하고 줄기가 천장에 닿을 만큼 위로만 오르다.
베란다가 없으니 감고 올라갈 창틀도 없고, 시원한 바람도 불어오지 않으니 무슨 재미가 있어 꽃을 피우랴, 종일 들어오는 햇빛도 자외선이 차단된 유리를 건너왔으니 어느 것 하나 꽃눈을 달 수 있는 환경은 아니다.
생각 끝에 바람과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로 자리를 옮겨 주고 긴 막대를
구해서 지주도 세워 주었다. 남편은 애를 태우는 내가 안쓰러웠던지 화분을 아파트 정원에 내놓으라고 했다. 그것도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두 달 넘게 정성을 다해 기다린 시간이 아까워 한 송이라도 꽃을 보고야 말겠다고 버티었다. 어느 날 잎이 난 자리에 꽃눈이 보였다. 나도 얼른 카톡 방으로 소식을 전했다. 우리 집 나팔도 지금 조율 중이라고, 마지막 연주는 내
가 책임지겠다고 큰소리쳤다. 그 꽃눈이 보름을 기다리게 하더니 오늘 아침 이른 시간에 '빵빵' 하고 나팔을 불었다. 꽃잎의 반경이 10센티를 넘는다. 덩달아 큰 눈 작은 눈들이 줄기마다 신이 났다. 같은 시간에 태어났어도 먼저 필 수도 있고, 나중에 피는 꽃도 있다. 거름도 주고 물도 목마르지 않게 부지런히 주는데 왜 꽃눈을 달지 않느냐고 닦달했던 내가 무안해졌다. 꽃을 보기 위해서 정성을 쏟았을 뿐인데 꽃이 삶으로 다가온다. 삶도 그렇지 않던가. 앞서 가는 이도 있고, 느릿느릿 서두르지 않아도 종점 가까
이 갈수록 편해 보이는 이가 있다. 나팔을 먼저 분다고 꼭 좋은 것은 아닐
수도 있겠다. 옆 사람의 나팔 소리에 마음이 급해져서 헐떡거렸다. 짚고
일어설 작은 막대라도 하나 있다면 삶이 얼마나 수월할까 싶었다. 나팔꽃
넝쿨처럼 생(生)을 타고 오르려고만 한 것 같다. 누군가를 위해 나팔 한 번
불어 본 적이 있었던가. 저토록 맑은 웃음을, 목젖이 다 보이는 순수한 웃
음을 건넨 적도 떠오르지 않는다. 속을 채우기보다 키를 키우기에 골몰했
던 부질없는 삶을 살아온 것만 같다.
나팔꽃을 앞에 두고 앉았다. 구불텅한 나팔꽃 줄기에는 나비의 못다 춘
춤사위가 나팔나팔 날아오르고, 입을 크게 벌린 것을 보면 할 말이 무척 많은가 보다. 볕살을 마주한 꽃눈은 끝없이 노래를 이어 간다.
심장을 도려내는 아픔을 다독여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러 보는 회한의 연가인가. 저 고운 얼굴은 원님이 빼앗아 간 아내의 초상화였다니.
아래에 묻은 초상화에서 돋아난 꽃이 나팔꽃이고, 그 꽃은 성벽 안에 갇힌
아내를 만나기 위해 벽을 타고 오른다. 아내가 너무 예뻐서 함께할 수 없었던 안타까운 전설 때문에 성벽을 기어오르는 '덧없는 사랑이' 왠지 공허해 보인다.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허상, 나팔꽃은 아픔을 꾹꾹 눌러 담아 사랑으로 승화시킨 화공의 웃음인가. 피를 토하듯 애환을 그려 내
남편의 그 슬픔을 누군들 짐작이라도 하겠는가. 드러나는 겉모습이 전부
가 아니라는 것을 나팔꽃에서 배운다. 사랑은 기쁨보다 아픔인 것을.
나팔 소리 한 번 내보이기 위해 벌도 나비도 오지 않는, 감고 올라갈 지주도 없는 허탕에서 얼마나 안간힘을 썼을까. 그렇다. 좋은 환경에서 불어
주는 나팔 소리보다 안간힘을 쓰면서 얻어 낸 그 낮은 음이 훨씬 울림이
크다. 그것은 과정이 결과보다 귀하기 때문이리라.
찬란한 연주는 하루를 견디지 못하고 입을 닫는다. 활짝 벌렸다가 굳게 다문다. 내일은 또 다른 나팔이 새로운 소식으로 하루를 열어 줄 것을 믿는다. 내 삶도 꽃처럼 한 번 활짝 웃고 싶다. 늦게라도 크게 한 번 팡파르를 울리고 싶다. 누군가를 위해 나팔을 불고 싶다. 감미로운 선율을 만들어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음을 다듬어야 할 것 같다.
평자의 변/김경남
에세이21 | 2020. 봄호
윤상희/ 팡파르
‘팡파르(fanfare)'는 축전이나 의식 등에서 진행을 알리는 트럼펫의 신호
같은 소리다. 친구에게서 겨우 본 잎 두 장만의 나팔꽃 모종을 받아 와서
노심초사, 애간장을 태우며 많은 시간의 흐름 끝에 드디어 나팔꽃을 피웠
다. 환희에 겨워 활짝 핀 나팔꽃을 '팡파르'라고 표현했다. 이는 악기 트럼
펫의 모양이 나팔꽃처럼 생긴 점과 그 악기에서 나오는 '빵빵'이라는 소리
에 착안한 것이리라. 의성어 '팡파르' 하나만으로 나팔꽃 개화의 극대화된
이미지가 마치 개선장군 같은 환희를 불러일으킨다.
나팔 소리 한 번 내보이기 위해 벌도 나비도 오지 않는, 감고 올라갈 지주도
없는 허탕에서 얼마나 안간힘을 썼을까. 그렇다. 좋은 환경에서 불어 주는 나팔
소리보다 안간힘을 쓰면서 얻어 낸 그 낮은 음이 훨씬 울림이 크다. 그것은 과
정이 결과보다 귀하기 때문이리라.
문장 전반에 걸쳐 활유와 의인화로 생동감과 현실감을 높이는 언어 구
사력이 뛰어난다. 황족 꽃으로 일컫는 장미의 개화를 노래했다면 글이 주
는 감동은 청초하지 못하리라. 나팔꽃은 국민 꽃이다. 소박하고 보잘것없
는 꽃이 만개하기까지의 과정에서 개화를 향한 그 고난과 인고의 숭고한
몸짓이 인간 삶의 과정처럼 다를 바가 없다며 인간과 인생과 삶에의 형상
화를 이루었다.
단지 개화의 의미가 성취·사랑· 역경 등 다중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에 주제 구현과 파악에 혼선을 초래할 수 있다는 유의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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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희 니은 수필의 본령에 성실한 작가다. 같은 동아리에 소속되어 있지만 감히 접근할 수 없는 경지에 올라 있다.
나와는 同行이자 한 살 연상이라 통상 '姉氏'라고 부른다. 하지만 合評 때는 안면 몰수(?)한다. ㅎㅎ
글을 대하면 치열해진다.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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