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유일도사민문(招諭一道士民文)
鶴峰 金誠一 선생이 초유사로서 1592년 5월 4일 함양에 당도하니 고을은 비었고 수령과 늙은 아전 몇 사람이 있는데 전부터 알았던 전군수 조종도와 전 직장 이노를 만나게 되었다. 선생은 두 사람과 더불어 의병창기에 뜻을 같이하고는 “내가 趙, 李 二公을 만남은 하늘이 나를 도운바이다.”라 하면서 즉석에서 붓을 들어 ‘초유일도사민문’을 草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직까지 있어본 적이 없는(未曾有) 國難을 당하여 방벽과 간성(干城)이 바람결에 달아나고 무너졌으니, 우리 백성은 누구를 믿어 흩어져 도망가지 않겠는가!
이때가 지사(志士)는 창을 베개삼을 때다. 충신은 국가를 위해 죽을 날임에도 끝내는 아무런 호신의 보장이 없는 산골에 숨었으니, 설사 적을 피해 몸을 보전한다 해도 열사는 오히려 부끄러이 여길진대, 군신대의는 하늘과 땅의 참된 기강(天經地義)이며, 떳떳한 백성의 길(民彝)이다.
임금님이 몽진하고 종사가 거꾸러지려 하고 만백성이 썩어 문들러지고 나라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이때에 머리를 싸매고 쥐 숨듯 하지 말고, 떨쳐 나와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함께 살아남을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찌 백성의 도리를 다한다 할 것인가?
영남은 본시 인재의 창고라 일컬어 왔으며 글래에 퇴계(退溪)와 남명(南冥)이 한때에 나서 도학을 창명하고 인심을 맑게 하니, 삶의 기강을 바로 잡는 것으로 자신의 책무를 삼았고, 선비 된 자의 가르침(薰陶)으로 사숙자(私淑者)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으나 은근히 존경하고 가르침을 따르는 자>가 점점 많아졌으며, 평일에 성현의 글을 많이 읽어 스스로 넉넉하다고 자부하였다. 옛날 충신열사는 성패(成敗)로 뜻을 바꾸지 않았고 강약으로 기가 꺾이지 않았다. 마땅히 할 바 의(義)라면 비록 백전백패(百戰百敗)라도 오히려 빈주먹으로 시퍼런 칼날과 맞서 만 번 죽어도 후회치 않았는데, 적이 비록 강하다고 하나, 이미 깊이 들어와 전술상 잘못을 범했으니 어찌 쉽게 돌아가겠는가!
우리가 비록 겁탈 당하였다 하더라도 어찌 한결같이 당할 수야 있겠는가!
충의가 격하면 약함이 오히려 강하여 지고, 적은 것으로 많은 것을 대적할 수 있으니, 이때 한번 움직임(一轉)에 달렸다.
격문(檄文)이 도착하는 날에는, 수령은 일읍(一邑)을 효유(曉諭)<알아듣게 일러줌>하고, 변장(邊將)은 사졸(士卒)을 격동(激動)시키고, 문무조관(文武朝官), 부로유생(父老儒生) 등은 각기 사람에게 서로 전하여 동지를 불러모으고, 충의로 결속하라. 돈이 있는 백성(富民)은 수레로 곡식을 나르고, 용사(勇士)는 충갑(冲甲)의 병(兵)과 같이 분연히 일어나면 군의 함성이 크게 떨쳐 용기백배(勇氣百倍)되어 괭이 고무래도 예리한 무기로 바뀔 것이다.
당직(當職)은 한 낱 썩은 선비(腐儒)에 불과하다. 비록 군의 기예는 못 배웠으나, 군신대의(君臣大義)는 조금 들었으니 일도(一道)가 쓰려지려는 때에 소임을 받아 옛 충신열사(忠臣烈士)의 뜻을 높이 추모하는 바이니, 의사(義士)들은 힘을 내어 빨리 공을 세우기 바라노라.
조정의 상격(賞格)이 뒤에 있을 것이니 마땅히 잘 알지어다. (자료제공 류중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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