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글/遺事

선비 평산신씨 유사

록야綠野 2011. 6. 19. 16:34

 

      

                 

                    

                        先妣 孺人 平山 申氏 遺事

 

   어머님(先妣)申氏이고, ()는 후남(後男)이시다. 본관(本貫)은 평산(平山)이며 고려(高麗) 개국공신(開國功臣) 신숭겸(申崇謙)을 시조(始祖)로 한다. 13代 孫인 문정공(文正公) 신 현(申 賢)은 운곡(耘谷) 원천석 (元天錫) 선생의 스승이며, 영해군(寧海君)으로 봉()한 분인데 이 분을 중시조(中始祖)로 한다.

   고조(高祖)의 휘()는 목()이며, 증조(曾祖)의 휘()는 두진(斗鎭)이며, 는 태영(泰永)이고 조모(祖母)는 영양(英陽) 남씨(南氏) 곤수(崑壽)의 따님인데. 일남(一男) 칠녀(七女)를 출중(出衆)하게 길러 명문대가(名門大家)로 출가(出嫁) 시키고, 칠녀가(七女歌)를 지어 후세(後世)에 남기셨다. 는 세휴(世休)이며, ()를 학하(鶴下)라 하셨는데, 향중(鄕中)의 큰 선비로 명망(名望)이 높았으며, 큰살림을 전부(全部)은행(銀行)에 담보물(擔保物)로 제공(提供)하고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돈을 빌려 조국(祖國)의 독립운동자금(獨立運動資金)으로 비밀리(秘密裏)에 보내시고, 1931년에는 세계경제대공황(世界經濟大恐慌)이 오면서 부동산가격(不動産價格)이 급속히 떨어지고 담보물로 제공된 전() 재산(財産)은 은행(銀行)에서 압류(押留)하여 경매처분(競賣處分)하는 바람에 일시(一時)에 빈민(貧民)으로 전락(顚落)하셨으나, 조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으며, 큰 기와집을 빼앗기고 삼간두옥(三間斗屋)에서 떳떳하게 운명(運命)하신 분이시다. 전비(前妣)는 무안박씨(武安朴氏) 처사(處士) 재형(載衡)의 따님이고 후비(後妣)는 영양(英陽) 남씨(南氏) 처사(處士) 진수(鎭壽)의 따님인데 어머니는 후비(後妣) 소생이시다.

   어머니(先妣)께서는 1912(壬子)년 음력 815일에 영덕군(盈德郡)신안면(新安面) 묘안에서 나셔서 여섯 살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한지(韓紙)에다 외증조모(外曾祖母)님께서 지으신 칠녀가(七女歌)와 외조부(外祖父)께서 쓰신 기천가 등을 붓글씨로 옮겨 쓰면서 한자공부도 같이 하셨는데 문자해독이 빠르고 글씨와 문장력도 좋아서 큰 오라버님(병기)의 많은 칭찬을 받으셨다.

외조모님의 음식 솜씨와 길쌈하고 바느질하는 여공지사(女工之事)를 거침없이 능숙(能熟)하게 배워서 어른들이 놀라워하셨다.

   16()되던 1927년에 아버님(柳 東鐸)을 배우자로 맞이하여 17()에 안동(安東) 한들로 신행(新行)을 오셨는데 아버님과 시부모님께서 많이 사랑해 주셨고, 특히 아버님 3형제분의 스승이신 야사(野史) 류승춘(柳承春) 이 어머니의 고종(姑從)이시고, 내앞(川前)의 고종(姑從)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선생께서는 만주(滿洲) 독립군(獨立軍)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셨고, 상해(상하이) 임시정부(臨時政府)의 국민대표자회의(國民代表者會議) 의장(議長)을 지내신 분이어서 국민(國民) 모두의 존경(尊敬)을 받는 분이었기에 큰 힘이 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어머님의 인품(人品)과 재능(솜씨)이 돋보여서 집안 어른들이 모두 좋아하셨다.

   어머니(先妣)께서는 20 전에 시댁(媤宅)에 오셔서 어떤 일에도 못한다고 하시질 않았다. ‘모르는 것은 배워서 하면 된다.’는 자신감(自信感)이 있으셨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하면 되는데 뭐가 어려우냐?”는 말씀을 자주 쓰셨다.

밭에다 목화씨앗을 심어 100여 번의 손길을 주어 가꾸고 거두어 목화를 장만하여 실 뽑고 베 날아서 풀 먹여 베 매고, 베 짜는 과정이나, 대마(大麻) 씨를 뿌려서 가꾸어 그 껍질을 수없이 손질하여 삼베를 짜고, 뽕나무를 가꾸어 누에를 쳐서 얻은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서 명주를 짜는 일과, 길쌈에서 얻은 옷감을 염색하고 푸새하여 손바느질을 하여 옷을 만드는 일들은 어렵고 힘들고 잠시도 쉴 틈이 없고, 잠잘 시간도 없었지만 어머니는 그 많은 일들을 두레를 하고 품앗이를 하면서 거침없이 솜씨나게 다 해내시고, 디딜방아 찧고, 100m가 넘는 우물에서 물 길러 밥해먹고 빨래하면서 우리 5남매를 남들 못지않게 길러내셨다.

음식 솜씨도 그랬다. 모든 음식의 바탕이 되는 장맛이 좋기로 알려졌으며 엿이나 약과(藥果)나 유과(油果) 만들기, 술이나 감주 빚기, 일상에서 먹는 비빔밥도 맛이 좋아서 매년(每年) 정월(正月)에 마을 사람들의 윷놀이도 우리 집에서 열었다.

   계절(季節)이 바뀌면 시부모님의 옷을 지어 올렸으며, ()을 당해서도 상복(喪服)을 만드는 일부터 복잡한 상례(喪禮)를 수행함에 있어서 예절에 어긋남이 없으셨다.

아버님께서 효도(孝道)하고 우애(友愛)하고 화목(和睦)하는 일과 손님을 맞아 대접하는 일에서부터 농사짓고 소 기르는 일에까지 어머님의 내조(內助)가 진실(眞實)로 컸다고 사료(思料)된다.

   19347월에는 시어머님 상을 당하고, 1939년에는 형님(大榮)이 소아마비로 오른 손이 불편(不便)함을 발견(發見)하시고 치료(治療)에 전념(專念)하셨으나, 별 효험(效驗)을 못보고 간장(肝腸)을 녹이시던 중에 8월에는 시아버님께서 교통사고(交通事故)로 돌아가시는 큰 변을 당하시고, 유월장(踰月葬)으로 장례(葬禮)도 치르기 전인 9월에 소생(小生)이 출생하여, 산후조리(産後條理)가 바르지 못하셨다. 그리하여 1941년에는 큰 병이 나셔서 몸을 움직이지 못하시면 서도 첫돌 지낸 불초(不肖)를 배 위에 올려놓고 돌보셨는데, 선친(先親)께서 지극정성(至極精誠)으로 투약(投藥)하신 효험(效驗)이 있어서 치료(治療)는 하셨으나, 그 후유증(後遺症)으로 평생토록 신경통(神經痛)으로 고생(苦生)을 하셨다.

우리 5남매 키우시면서 크고 작은 병이 났을 때 마다 어머님께서는 손수 조약을 달여 먹여서 치료(治療)를 하셨다.

   1937년 중일전쟁부터 제 2차 세계대전의 혼란기(混亂期)에 일제의 착취(搾取)와 광복(光復) () 민족(民族)혼란기(混亂期)19506.25 한국전쟁의 과정에서 겪은 고생은 이루 형언(形言)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집에서 기르던 소를 팔고, 길쌈해서 얻은 무명과 삼베를 팔아 앞들에 논 한 마지기를 사셨다.

‘51 ~ 52 양년 흉년(凶年)은 너무나 혹독(酷毒)하여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延命)하는 몸부림이었다.

   1960년에는 불편하게 살았던 토담집을 뜯어내고 새로 다섯 간 반침의 목조 시멘트 기와집을 지어 주거(住居)의 불편을 많이 개선(改善)하셨고, 5.16 군사혁명 이후 경제개발(經濟開發)이 시작되면서 아들 형제가 직장(職場)을 얻고, 일군을 고용(雇用)하여 마늘농사를 짓고 차차 농장을 늘여서 소작농(小作農)을 면()하는 수준에 이르렀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당하셨으니 1974(갑인)년 아버님의 서거(逝去)였다.

평생을 전란(戰亂)과 빈곤(貧困)에 허덕이면서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아 여행도 한 번 못해보시고 앞만 보고 열심히 일만하시다가 자신을 위해서는 불고기 한 번 못해 드시고, 향년(享年) 63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신 그 한스러움을 어머님은 평생토록 가슴에 담고 계셨다. 당시(當時)에는 의료(醫療)수준이 너무나 열악(劣惡)하여 요즈음의 수준만 되었다면 치료도 가능했지 않을까?

오호(嗚呼) 통재(痛哉)! 생각해 보면 안타깝기 한량없고. 선친(先親)께서 해로(偕老)하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꼬 !

 

   어머님(先妣)께서는 관찰력(觀察力)이 우수하여 제주도(濟州道) 관광(觀光) 후에 관찰하신 화산지형(火山地形)의 특징(特徵)에 대하여 불초(不肖)에게 많이 질문하셨는데 그 수준이 아주 고차적(高次的)이셨다.

기억력(記憶力)이 출중(出衆)하시어 90세 이후에도 처녀 시절에 암기(暗記)하신 가사(歌辭) 3~4편을 유창(流暢)하게 암송(暗誦)하셨으며, 모든 일에서나 판단(判斷)이 정확(正確)하셨다.

   일송(一松) 先生을 자주 이야기 하셨는데, 숭고(崇高)한 애국심(愛國心)을 찬양(讚揚)하시면서 일경(日警)에 체포(逮捕)되시어 비밀(秘密)의 발설(發說)을 염려(念慮)하시어 스스로 혀를 자르셨다는 말씀을 하실 때는 눈물을 머금고 목이메인 모습을 보이시며, 애국심(愛國心)을 가르쳐 주셨다.

  

   젊었을 때 친정(親庭)에 신경 쓸 여력(餘力)이 없었던 것을 애석(哀惜)해 하시면서 외조부모(外祖父母)와 외삼촌(外三寸) 제사(祭祀)에 작은 정표(情表)를 하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

   항상 용의(容儀)를 깨끗이 하시어 품위(品位)를 손상(損傷)하지 않았고, 밝게 웃는 표정(表情)을 유지하셨다. 친구 분과 명쾌(明快)한 의사소통(意思疏通)을 하셨고, 자신의 위치를 돈독(敦篤)히 하여 주변(周邊) 사람의 신망(信望)과 존경(尊敬)을 받으셨다.

 

   2005226일 거처(居處)에서 넘어져서, 안동병원에 입원하여 고관절(股關節) 골절(骨折) 진단(診斷)을 받고, 228일 인공관절 수술을 받은 후 35일 만인 43일 불초(不肖)의 집으로 퇴원하시어 실내에서 걷기 보조구(輔助具)를 이용하여 거실(居室)100바퀴씩 돌면서 걷기운동을 열심히 하시어 건강을 유지하셨으나, 연세가 높으셔서 정신이 혼미하신 때도 간혹 있었다.

슬프다! 2006924일 새벽에 화장실에서 넘어져서 2차 고관절 골절이 발생하여 929일 인공관절 수술을 하시고 병실에서 고생하시다가 욕창(蓐瘡)이 심해지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도래(到來)하였다.

2006(丙戌)1025(음력 94)에 별세(別世)하시니 향년(享年) 95세이셨습니다. 102832년이나 먼저 가신 아버님 묘소(墓所)에 합장(合葬)했다.

   자손(子孫)에 관한 내용은 선고(先考) 부군(府君) 유사(遺事)에 기록하였기에 생략(省略)한.

 

   형님께서 앞들에 논을 사서 좋아하셨고, 서울에 3층 집을 산 것을 기뻐하셨으며, 불초 안동(安東)교육청(敎育廳) 장학사(獎學士)로 발령(發令)된 것을 기뻐하셨으며, 대구(大邱)에서 서실(徐室)이가 아파트에 입택(入宅)하고, 권실(權室)이 서울 중계동(中溪洞) 아파트에 초대(招待)받아 대접(待接) 잘 받은 것을 자랑하셨습니다. 기정(基正)이를 비롯한 여러 친()외손(外孫) 들이 매사(每事)에 흐트러짐 없이 착실하고, 특히 기한(基漢)3형제가 박사학위(博士學位)를 받고, 외손자(外孫子) 김종훈(金鍾勳) 종성(鍾成) 형제가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敎授)로 발탁(拔擢)된 것을 기뻐하셨는데, 이런 기쁨은 어머님의 명석(明晳)하신 두뇌(頭腦)와 판단력(判斷力), 그리고 정직하며 긍정적(肯定的)이고 적극적(積極的)인 행동(行動)으로 본을 보여 가르쳐 주신 올바른 교육(敎育)의 결과(結果)라고 사료(思料)됩니다.

   어머님(先妣)께서  돌아가신지 5년이 되었고, 날로 기억(記憶)이 흐려지는데 그간에 형님께서 돌아가시니, 이에 작은 기억(記憶)을 더듬어 평생(平生)의 이력(履歷)을 만분지일(萬分之一)이라도 동기(同氣)와 자질(子姪)들에게 전()하고자 不肖 仲榮은 눈물을 삼키면서 짧은 글을 마무리 합니다. - 2011.6.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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