壬亂倡義錄(임란창의록)
- 柳復起 -
壬辰 四月十四日癸卯 倭寇陷東萊 府使 宋象賢死 巡察使 金晬 傳令列邑 聚軍擧事
임진년(1592) 4월 14일 계묘일. 왜구가 동래부를 함락시켰다.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이 전사하였다. 순찰사 김수(金晬)가 여러 고을에 명령을 전하며 군사를 모아 거사하도록 하였다.
六月初一日己丑 裵龍吉金涌柳復起 共謀擧義 俄而 安集使 金玏 奉命來到 以章甫爲里將 各於所居村 點起軍丁
6월 초1일 기축일. 배용길(裵龍吉)•김용(金涌)•류복기(柳復起)가 의병을 일으킬 것을 함께 도모하였다. 얼마 후 안집사(安集使) 김륵(金玏)이 명을 받들고 와 장보(章甫)를 향리장수로 삼고 각각 거주하는 마을에서 기군(起軍:봉기한 군대) 병사[壯丁]를 점검하였다.
七月十七日甲戌 裵龍吉 向九獜村 起軍人民竄於山頂䕺薄 因其夜下家宿之隙 縻其父兄 各招子弟 分定隊正二百餘人
7월 17일 갑술일. 배용길이 구린촌(九獜村)으로 향하였는데, 기군과 백성들은 산 정상의 숲속에 숨어 있었다. 그날 밤 집으로 내려와 자는 틈에 그 부형들로 하여금 각각 자제들을 불러 모아 200여명의 대정(隊正)을 나누어 편성하였다.
十九日 兵使 朴晉 入本府 裵龍吉 卽付所起軍于兵使
19일, 병사(兵使) 박진(朴晉)이 본부(안동부)에 들어오자 배용길이 군사를 일으킨 기군[起軍] 명부를 바로 병사 박진에게넘겨주었다.
八月初五日壬辰 招諭使金誠一招諭文來 裵龍吉 卽出通文一邑約會廬江書院 與金允明允思往會 則惟柳復起鄭澡赴約 又出文通告約會全法寺
8월 초5일 임진일. 초유사(招諭使) 김성일의 초유문이 왔다. 배용길이 곧바로 온 고을에 통문을 내어 여강서원(廬江書院)에서 모이기로 약속하고, 김윤명•김윤사와 함께 모임에 가보니 오직 류복기와 정조(鄭澡) 만이 약속에 나왔다. 다시 통문을 내어 전법사에서 모이기로 약속했음을 통고하였다.
九日丙申 會于全法寺松亭 相與盟曰 日馭播越 腥塵汚穢 身死何惜 但鄕閈軍丁 屬盡官簿 白面空拳 徒奮何爲 而國事至此 成敗强弱 有不可計也 相與着署而誓
9일 병신일. 전법사 송정에서 모여 서로 맹서하며 말하기를 “어가(御駕)가 도성을 떠나 피란하시고 국토는 왜구의 비린내와 먼지에 더럽혀졌는데, 이 몸이 죽은들 어찌 애석해하겠는가?"
고을의 군정(軍丁)은 모두 관군의 명부에 기록하고, "백면서생[글 읽는 선비]이 맨 주먹을 쥐며 한갓 분한으로 무엇을 하겠는가마는 나라의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성패와 강약을 따질 수 없는 것이다.” 라 하고, 서로 서명을 하고 맹서하였다.
十二日己亥 會盟于臨河 一鄕士友 不期而至者 百數 薦生員金允明爲大將 進士裵龍吉爲副將 李亨男爲整齊 有司柳復起爲鄕軍都監
12일 기해일. 임하(臨河)에서 회맹하였다. 온 고을의 사우들 가운데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이른 자가 백 수십 명이었다. 생원 김윤명을 추천하여 대장으로 삼고, 진사 배용길을 부장으로, 이형남을 정제장으로, 유사 류복기를 향군도감으로 삼았다.
十八日乙巳 會鄕校 以李庭栢 更爲大將 以鄕校爲陣所
18일 을사일. 향교에 모였다. [김윤명을] 이정백(李庭栢)으로 바꾸어 대장으로 삼고, 향교를 군진의 장소로 삼았다.
二十日丁未 與禮安義城軍威人會盟 一直縣合陣 以禮安金正字垓爲大將 生員李庭栢 進士裵龍吉爲左右副將 幼學柳復起李亨男爲整齊將 號安東列邑鄕兵 以安東爲本陣 ○時 西上鳥嶺之餘賊 每三十餘里一屯 咸昌唐橋之賊 最爲强大 安禮陷城之後 聞其義擧發通 遂撤歸龍宮醴泉之境 焚掠之患 罔有餘地矣
20일 정미일. 예안•의성•군위 사람들과 함께 회맹하였다. 일직현에서 진영을 합쳐서 예안사람 정자(正字) 김해(金垓)를 대장으로 삼고, 생원 이정백과 진사 배용길을 각각 좌우부장(左右副將)으로 삼고, 유학 류복기•이형남을 정제장으로 삼아 ‘안동열읍향병(安東列邑鄕兵)’이라고 부르고 안동을 본진으로 삼았다.
○ 당시에 서쪽으로 조령으로 올라온 나머지 왜적이 30여리마다 하나의 진지를 두었다. 함창의 당교에 주둔한 적이 가장 강대하였지만 안동부와 예안부가 함락된 후에 의병이 일어나 통문을 띄웠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용궁과 예천의 경계까지 철수해 돌아가 불타고 노략질 당할 근심이 더 이상 없게 되었다.
十一月初五日 巡察使 金允思 幼學 柳復起爲揀兵將 揀擇精兵 ○自是 移陣于醴泉松邱 與賊壘相對 遣伏兵壯士 射奪倭馬二匹於尙州之盤巖
11월 초5일 순찰사가 김윤사와 유학 류복기를 간병장(揀兵將)으로 삼아 정예병을 가려 뽑았다. ◯ 이때부터 예천의 송구로 진영을 옮기고 상주의 반암에서 왜구의 말 2필을 쏘아 빼앗았다.
癸巳 元朝 覵賊休息 遣伏兵 乘夜突入賊陣中 射殺無數 奪其搶[槍]劒 連放震天雷 一陣驚動 死者甚衆 翼夜又如之 射殺十餘人
계사년(1593년) 정월 초하루, 적이 휴식하고 있는 것을 엿보고, 복병을 보냈다. 밤을 틈타 적의 진영 가운데로 돌진해 들어가 셀 수 없이 사살하고 그들의 창검을 빼앗았다. 연달아 진천뢰(震天雷)를 쏘니 적의 온 진영이 놀라 동요하였고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다음날 다시 이와 같이 하여 10여명을 사살하였다.
自此至四月 八次設伏兵於唐橋盤巖松峴等處 斬賊二十餘級 生擒一賊酋 其餘射殺無數 前後斬獲 輒報巡使 皆蒙賞格公文 巡察使後題送曰 斬將獻䤋 頂背相望 當爲本道義兵之首
이때[정월]부터 4월까지 당교•반암•송현 등지에 여덟 차례 복병을 설치하여[병사를 매복시켜] 적의 머리 20여급을 베었고, 적의 우두머리[적장] 하나를 산채로 사로잡았다. 그 밖에 사살한 적의 숫자는 셀 수 없었다. 이때를 전후로 목 베고 사로잡은 것을 순찰사에게 보고할 때마다 모두 (임금으로부터) 상격(賞格) 공문을 받았다. 순찰사가 뒤에 제송(題送)에서 말하기를 ‘적장을 목 베고 귀를 잘라[䤋] 바친 보고가 끊임없이 줄지어 이어진 것은 당연히 본도 의병의 으뜸이 됩니다.’라고 하였다.
安集使啓聞曰 安東鄕兵 與金沔郭再祐等 聲勢相應 賊鋒雖多 將不足患 權應銖遺書於陣所曰 安東倡義後 嶺下十餘邑之賊 首尾斷絶 無所着脚 鄕兵之力也 是時 自京踰嶺之賊 幷捲唐橋之柵 設陣治[沿]海 充斥下邑 殺掠之患 甚於亂初
안집사 김륵이 조정에 장계(啓聞)를 올려 말하기를 “안동 향병은 김면(金沔)•곽재우(郭再祐) 등과 더불어 그 명성과 기세가 상응하여 적군이 비록 많다하더라도 장차 근심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권응수(權應銖)는 “안동에서 창의한 후에 조령[새재] 이하 10여 고을의 왜적이 머리와 꼬리가 잘려나가 발을 붙일 곳이 없게 된 것은 향병의 힘이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서울에서 조령을 넘어오던 적이 당교의 진지를 거두어들이고 연해에[바닷가를 따라, 바닷가에 주둔하여] 진영을 설치하여 하읍(下邑)에 대거 몰려들어[充斥:많고 우글거리는 모양] 죽이고 노략질 당할 근심이 난리 초기보다 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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