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실 入鄕祖 岐峰 柳復起 선생의 壬亂義兵 忠義
1592년 4월 14일 왜군이 동래성을 함락, 성주 송상현을 죽이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이해 6월 1일 기봉은 외종 김 용, 진사 배용길과 의거를 공모하고 7월 17일에 장정 200명 명부를 작성, 8월 9일 전법사에서 관청의 장부에 성명을 쓰고 서명하고 "임금이 도성을 비우고, 몽진하였으며, 국토가 왜구의 비린나는 먼지로 더럽혀졌는데 내몸 죽는것을 어찌 애석다 하겠는가!" 라고 맹세하고 맨손으로 처절한 회맹을 했다.. 8월 12일 안동 의진을 편성 대장 김윤명. 부장 배용길 정재유사 이형남 공은 향군도감 을 하셨다. 8월 20일 예안 의성 군위 등지의 의병을 통합하여 안동열읍 향병을 편성하여 예안의 김 해(근시재)를 대장으로 생원 이정백, 진사 배 용길(금역당)을 부장으로 추대하고 공은 솔선하여 전투장을 담당하는 본진의 군기정재장의 중책을 담당했다.
조직이 완료되고 출병할 때 맏아들 우잠(호 도헌)을 대동하고 부자분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예천 松邱 전투에서 공은 간병장으로 발 빠른 장사를 선발하여 특수훈련을 시키고, 요지에 매복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상주 반암에서 왜마 2필을 빼았고,
1593.1.1. 설날을 맞아 왜병이 휴식하고있는 것을 복병이 탐지하여 그날 밤에 관군과 연합하여 당교의 적진을 급습하여 . 다수의 적을 포살하고 창검과 장비를 빼았고, 진천뢰를 연달아 쏘아서 크게 놀라게 했다.
1월 2일 밤에도 같은 방법으로 왜병 1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로부터 4월까지 8차에 걸쳐 복병의 활동으로 왜병 20수의 목을 베고, 왜장 1인을 생포했다. 진지를 옮겨 밀양에서 적의 첨봉을 막았으며, 1593년 5월 경주전투에서 김 해 대장이 순사하고 사기가 저하되어 안동의병은 그 명을 다하고 해산되었다. 이때 명나라와 일본이 화의를 추진하면서 전쟁은 소강상태에 들었다. 1596년 기봉은 팔공산 상암에서 영남의병장 32명이 말의 피를 나누어 마시고 얼굴에 발라 회맹하여, 목숨을 바쳐 왜적을 몰아내고 조국을 구출하는데 앞장서기로 맹세했다.
이 때 공이 지은 한시 하나를 읽어보자.
하늘은 이 땅에 나쁜 運을 내렸는가?
섬 오랑캐가 우리나라를 감히 어지럽히는구나.
누가 나라위해 干城將 능히 되어
三都에 一隊의 왜군을 모조리 소탕할까?
임금의 수레가 서쪽으로 간 것은 어찌 차마 말할 손가?
신하된 자가 일어나 복수할 때가 되었구나.
창과 칼을 가진 우리들이 무궁한 憤恨으로
강물이 쓸어버리듯이 한 번에 씻어버리자.
❲天以東方値否運 島夷敢擾小中華 誰能爲國干城將 掃盡三都一隊倭 忍說鸞輿西路幸 爲人臣子復讎時 枕戈蹈刃無窮恨 欲決江河一洗之❳
1597년 (정유) 왜병이 재침하자 기봉 岐峰先祖께서는 아들 5형제(우잠 23세 , 득잠 20세, 지잠 15세, 수잠 13세, 의잠 10세)분을 대동하시고 경남 창녕의 화왕산성에서 망우당 곽재우 장군을 도와서 1598년 12월 전쟁이 승리할 때까지 산성을 지켰다.
기봉 선조께서는
6세에 아버지 (시정공 휘 城) 가 요절하셨으며 9세에 아버지 3년상을 마치고는 어머니(의성김씨 증 판서 璡의 女학봉 김성일 자씨)께서 음식을 끊고 수절하시어 외조부와 외숙 학봉의 도움으로 교육을 받았다. 1592년 왜군이 강토를 짇밟으매 충성으로 효도를 대신하신 것이다.
2010년 영남충의단. 향사는 우리 문중에서 주관하였다. (나는 앞줄 좌에서 2번)
충성은 동서 고금을 막론하여 중요덕목이지만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하는 일이고 보면 실행에 옮기는
극히 어렵다.
임란 때에도 많은 의병이 활동했으나 동생과 아들 5형제가 모두 의병활동을 한 사례는 岐峰 公 뿐이었다.
오늘날 중요 공직자 임용을 위한 청문회를 보면 본인이나 아들의 병역 기피가 도마위에 오르지만
임란 당시에도 의병활동을 하신 장수들이 자기는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고라도 자기 아들은 대를 잇기 위하여 피란을 시키고 활동한 사례가 많다.
기봉께서는 몇년간의 전투경험에서 소년도 전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아셨기 때문에
10세인 宜潛公도 함께 데리고 400리 길을 가신 것이다. 화왕산 동고록에는 의잠공의 역할이 여러 장수들의 기록에 남아있다.
기봉 류복기 행장 岐峯 柳復起 行狀
공의 휘諱는 복기復起 자는 성서聖瑞 기봉岐峯은 그의 호號다.
(류씨의 본은 실전이 다소 있은 듯 하나 휘 습濕에 이르러서 완산백 完山伯 으로 전주지방제후의 작위를 받은 후로는 전주류씨全州柳氏로 하였다.
국조國朝에 들어와서 휘 빈濱은 관직이 직제학으로 증 이시랑贈 吏侍郞이고, 휘 의손義孫은 세종조에 집현전 학사로서 남수문, 권채 공과 더불어 집현전 삼 선생이라 칭하였는데 세조가 찬위하니 관직을 버리고 전주로 오셔서 소와정笑臥亭을 짓고 일생을 마쳤다. 아우 집의인 말손末孫의 끝 아들을 후사로 하니 휘는 계동季潼이며 증 도승지다. 이분이 공에게는 고조이며 증조는 휘가 식軾이니 홍문관 전한으로 증 참판이며, 조의 휘는 윤선潤善이니 인의引儀고, 아〮버지의 휘는 성城〮 이며 일찍 돌아가시어 증 판사며, 어머니는 의성김씨 증 판서 진璡의〮 따님으로 남편의 뒤를 따라 순절하니 시관諡官이 정려旌閭하였다.
공은 명종 을묘(1555)생으로 6 〮9세 때 연달아서 아버지와 어머니 상을 당〮하고 외가에서 양육을 받았다.
집상을 하는데 수저나 채소 고기 등의 진설이나, 제사 절차가 잘 못될까 걱정하여 항상 명심하고 있었다. 누구나 음식을 먹으라고 주면 굳이 사양했고, 잠자리는 일정하게 하니 사람들은 기이하다 했다.
초행醮行을 가는데 중도에서 어떤 여인이 “신랑은 좋다만 신부는 귀먹고 벙어리며, 눈 먼 병신(장애인)이라” 하니 상객 가던 어른이 놀라서 “그만 돌아가자.”고 했으나 공은 “의리상 그럴 수는 없다.”하고 신부 댁에 가서 행례를 하고 보니 그 말을 전한 자가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외삼촌 학봉鶴峯 선생에게 수학修學해서 문장과 덕행으로써 존경을 받았다.
꿋꿋한 기상과 굽힘 없는 절개가 있어서 일에 민첩하고 의義에 용기가 있었는데 임진<1592>왜란이 일어나자 공은 여강서원<현 호계서원>에 가서 동지를 모아 의거를 앞장서서 외치니 인근 여러 군郡에서 여러 사람이 뜻을 같이하는지라 드디어 예안의 한림 김해金垓<호는 근시재>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안동의 배용길裵龍吉을 부장으로 해서 공은 전향참모를 하였다가 뒷날 정제장이 되어 서로 협찬하면서 직책 수행을 정당하게 하였다.(장자 友潛이 수행하면서 도왔다) 임진년 겨울에 예천의 송구에서 적을 공격하여 여럿을 사살하는 전공을 세웠으며, 계사년에는 밀양에서 적봉을 막았으며, 경주에서 대장 김해 공이 전몰하자 의병 진영의 사기가 가라앉았으나 공은 더욱 분투노력하여 영남의 여러 의사義士와 더불어 팔공산으로 모여서<32명>회맹會盟을 결의를 하였다.
정유재란<1597> 때는 방어사 곽재우를 따라서 창령의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켰으니 전후에 종군함이 6 〮7년이 되나 조금도 해이하지 않았다.
<아들 5형제(우잠, 득잠, 지잠, 수잠, 의잠)와 함께 화왕산성을 지킴>
병란에 이어 흉년이 들어 굶주린 백성이 길에 가득하니 공은 길 가에 가마솥을 걸고 죽을 끓여 그들을 먹여 살렸으니 그 수가 심히 많았다.
류영경柳永慶 상국相國<영의정>은 족친으로 겨우 열촌인데 공의 명성을 듣고 여러 번 불렀으나 공은 권문權門이라고 해서 마침내 가지 않았다.
집의 남쪽 언덕에 서실을 짓고 「기양서당岐陽書堂」이라 액제額題하고 날로 그곳에서 자신이 공부하고 후생을 가르치면서 은거해도 원망이나 후회하지 않았다.
정사<1617> 2월에 예빈시정 교지禮賓寺正 敎旨가 내렸으나 그해 3월 23일 서거하니 향년 63세로 임하현 동쪽 숲당산林塘山 병향丙向의 원原에 장사하였다.
그 후에 좌승지로 증직이 내리고 기양추원사岐陽追遠祠에 전향奠享하였다.
♣ 1892년에 임란창의 유공으로 증 이조참판 교지가 내림
공은 천품이 수오秀悟하고 도량이 심후深厚하여 어릴 때부터 이미 의연毅然하게 성인成人의 기국器局을 가지셨다. 조부大父 인의공引儀公이 영남으로 이사 오시고 선고先考 시정공이 수곡으로 정착하시어 일찍 돌아가시니 불행한 공의 형제 중 아우는 서울 큰댁으로 양자 가시고 고독하게 남았으니, 공은 외로운 심정으로 분발하여 착하고 어진 가르침으로 방향을 잡아 뜻을 세우고 고민하고 부지런히 해서 쉴 겨를도 없었다.
그러던 중에 학문이 깊어지고 지조와 행실이 견고해졌으니, 공의 학습은 인륜을 바르게 함을 으뜸으로 하였고, 충신忠信에는 아무도 비교할 자가 없었다. 자신은 정正으로써 엄격하게 하고 타인에게는 용서로써 대하여 순박한 덕행을 독실하게 실천함이 일상생활의 원칙으로 나타났다.
언제나 일찍 고아가 되었음을 종신의 애통으로 여겨 형제가 서로 생각함을 한 몸같이 하였다. 조모인 박씨는 연로해서 80이 넘도록 힘을 다해서 즐겁게 해 드리고 멀리 떠나지 않았다. 숙모는 과부가 되어 의탁할 곳이 없는지라 집에 모셔다가 생모처럼 섬겼다.
선조의 산소가 예안 범바위虎巖에 있었는데 오래도록 실전失傳 되었으나 공께서 성심으로 탐문하여 봉분을 수축하고, 영주의 종릉도 퇴폐된 것을 수축하는데 경향각지에 있는 종친들과 함께 상의하고 계획해서 구원久遠한 대책을 세웠으니, 이것이 모두 남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곤궁하고 어렵고 힘 드는 시기를 벗어나서는 생활의 조용함을 노래하고 스스로 좋아하는 바에 따르며, 여가로 노복을 가르쳐서 농사를 지으며 세금 내고 제사를 받들며 빈객을 맞이하고 가정을 꾸려서 문호門戶를 세웠다.
근검勤儉하고 순박淳朴하며 돈후敦厚하고 유원悠遠하였도다.
아아!! 그로써 선조를 계승하고 후손을 유족하게 하였으니 모두가 가법家法이 있었던 것이다.
한때 공을 아는 사람 중에 한강 정寒岡 鄭逑 선생은 말하되 “류 모柳某는 가히 심성心性을 논할만하다.”고 하였고, 나의 선조 식암息庵<黃暹>공은 안동부사로 갔을 때 부내府內의 현사賢士들을 추천하는데 첫째로 공의 이름을 말하고 “화살같이 바른 고사高士다.”고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식암공 께서는 일찍이 경연에서 <기봉의 행적을> 임금님께 아뢰었고, 류 문충공文忠公, 김 문정공文貞公, 이송와李松窩도 각기 아뢰었다. 인품을 내세워서 당세 인이 신망하였는데, 일찍이 자유子游가 자기 집에 한번도 오지 않았다는 담대멸명澹臺滅明 (자유가 말하는 담대멸명이라는 자는 길을 가되 지름길로 가지 않고, 공적인 일이 아니면 자유의 방에 오지 않았다는 말은 지름길을 가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그사람의 행동이 바르고 또 일을 급히 서두르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공적인 일이 아니면 자유를 찾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공사를 구별하고 윗사람에게 아첨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에다 바로 비比했으니, 옛적에 높은 관직에 계시던 분들이 어찌 엿본바가 없으면서 <임금님께> 그런 말을 하였겠는가?
배配는 영덕 정씨니 참봉 진晉의 딸로서 증 숙부인인데 계축<1553> 생으로 회갑 년에 몰하여 공의 묘전 오향의 원에 장사하였다.
육남 삼녀를 생하였으니, 장남은 우잠友潛이니 호가 도헌陶軒이고 차次는 득잠得潛, 지잠知潛, 수잠守潛, 의잠宜潛이고 계季는 희잠希潛이니 증 참판이며 사위에 정영방鄭榮邦, 이명원李明遠, 김원金遠은 다 생원이고, 여남은 시잠時潛이다.
백방伯房에 5남이니 숙橚은 호군이고, 직㮨은 진사로 호가 백졸암百拙庵이고 다음은 욱, 학이고 계는 격이니 생원이며, 2방의 2남은 재, 래고, 3방의 2자는 간, 은이며, 4방의 1자는 참이고, 5방의 4자는 강, 장, 양, 방이며, 6방의 2자는 위, 지榰는 문과로 부윤府尹이다. 그러니 손자가 모두 16인이고, 지금 까지 7 〮〮8세에 200년간인데 후손이 천 수백 명이나 되고, 선후先後에 현관顯官이 7 〮8인이나 되고 여러 음보蔭補는 다 열거할 수도 없는 것이다.
유학의 시詩와 례禮로써 더욱 번창하여 지금 높은 과정의 학문을 하는 선비를 보니, 그의 덕을 쌓음이 무궁하여 ‘선비는 오랜 덕으로 식록食祿하고 농부는 밭에서 부지런히 일하여 먹고사는 것’이 어찌 우연한 것일까?
용한龍漢은 어른들을 모시고 있을 때 가만히 들으니 “수곡水谷에는 큰 조상의 기운基運이 미덕美德과 대업大業을 쌓아서 당시當時에는 펴지 못하였으나 뒷날 자손에게 끼쳤으니 자연의 원류源流가 길고도 멀다.”고 하였다.
그리고 윗대 조상에 대한 후손으로서 공이 하신 아름다운 업적을 우러러 사모하였다.
근일에 진사 류약문柳約文이 그의 여러 부형父兄의 명령이라면서 유사遺事 한 통을 가지고 와서 불후不朽하게 행장을 지어 달라는 부탁을 하니 천루淺陋한 나의 할 바가 아니라 사양해도 되지 않아서 드디어 그 큰 것만을 추려서 쓰노니
공은 권력 없는 선비로서 적개심을 갖고 위기에 항거한 보국 충성으로 여러 군郡 인사들의 맹수盟首가 되었음은 크나큰 용기가 있는 자만이 가능한 것이다.
자아의 청백함은 먹물로 염색할 수 없고 자아의 냉철함은 어떤 열기로도 가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궁벽한 시골의 계곡과 구렁을 그의 소박한 삶의 터전으로 하여 거기에서 즐거움을 갖고 만족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공자孔子의 소위 ‘강자剛者’가 아닐까? 성인도 또한 강자剛者는 보지 못했다고 탄식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성인成人이 되고 덕을 쌓은 때의 일에 속하지만 약관弱冠으로서 초행醮行 갈 때는 잠간 사이에 전해준 망언을 듣고서도 혼례의 대절을 폐하는 일이 없이 인륜의 시원始原을 능히 바루었으니 그의 도량이 크고 넓음과 정력定力이 성실하였음은 세상사람 가운데 소년유자少年儒者로서 능히 이렇게 할 자가 몇이나 될까? 정자程子는 말하되
“나는 30이 안 되었을 때 또한 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한 그 일과도 같다 할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조용한 평상시와 다급한 시간에 갑자기 내달은 일에는 난이難易가 다른 것이다.
공이 집에서 하던 일을 자세히 살펴보니 운용運用하던 기미氣味가 모두 자애롭고 어질며 조밀하고 신중하며 너무나 둥글둥글해서 옷도 이기지 못하는 듯하였으나, 그의 하고자하는 바와 그의 하지 않고자하는 바를 생각해 보면 실로 만萬 마리의 소가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능히 움직일 만한 무서운 힘이 있었던 것이다. 이는 그의 천부天賦에서 얻은 힘이 굳세고 힘차며 모나고 곧은 기력이 있었으니 이것이 또한 스승 학봉鶴峯의 심법心法에서 연원淵源한 것일까?
아아 !! 천하의 대사는 무궁해도 일찍이 세상에는 가히 성취할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공과 같이 큰 인물을 대하니 전대의 선비가 오히려 떳떳하지 못한 느낌이 나는구나!
졸문拙文은 참되게 완성되지 못했으니, 후세에 덕을 아는 이의 고정考正이 있기를 기다리는 바이다.
창원 황용한 근장 昌原 黃 龍 漢 謹狀
자료제공 : 류중영
이지애 - 내 마음속 푸른 하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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