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대통령의 두번째 편지 <이휘소박사님, 안녕하십니까?
지난 번 편지를 받으셨을 것 입니다.
무례한 것 여러가지 용서하십시요. 제가 박사님께 편지를 띄운 후 이십 여일 동안,
미국은 저나 한국정부에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미사일부대 완전철수에 이어, 지상군 17.000여명을 철수했습니다. 주한미군은 해체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박사님께서 지금이라도 귀국하여 주십시오. 박사님이 한국에 계시다면, 미국은 그렇게 함부로 하지는 못합니다. 박사님의 귀국만이 조국을 구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시간은 절박하고 상황은 급박하여 졌습니다. 다시는 미국측에 비굴할 수도 없고, 비굴하지도 않겠습니다. 박사님, 다시 청하오니, 귀국하여 주십시요.> 1977년 4월 8일 대한민국 대통령 박 정 희 배상. 이휘소는 하얗게 밤을 새웠다. 그리고 스케줄을 더듬어 보았다. 4월 8일 하바드대학특강. 5월 20일 동경제대학술회의 참가등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완성단계에 있는 "히고스입자에 미치는
강작용의 영향"이란 방대한 논문도 며칠내로 마쳐야 한다. 이휘소는 광적으로 논문에 매달렸다.
이 논문은 특히 Dimuon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Quigg Thacker와의 관계를 명쾌하게 논리적으로 전개한 논문이다. 4월 25일 탈고를 끝낸 이휘소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하버드대학에서의 특강을 끝내었다. 그리고 그는 조용한 마음으로 5월의 동경대학에서 있을 학술회의를 기다렸다. 1977년 5월 15일, 이휘소는 시카고 변두리에서
외과의 개업을 하고 있는 김박사를 찾아갔다.
이휘소는 김박사에게...
"사실은...의논을 드릴 것이 있습니다. 이휘소는 김박사에게 솔직히 그 동안의 상황을 털어 놓았다.
그리고 조국의 현실과 북한이 가지고 있는 미사일의 성능까지 설명했다.
북한은 소련에서 수입한 사정거리 50Km가 되는
미사일을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50Km라면 휴전선에서 서울은 물론 수원 인천까지 미치는 거리다.
휴전선에서 한강다리 전부를 파괴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1분이다.
그럴 경우 무기가 없거나, 상대에 못 미치는 무기를 가지고 덤빈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미군은 한국에서 철수를 이미 시작했고,
다시 미국에 사정하고 애걸하는 것은 한국정부에서도 할 일이 아니며, 그런 꼴을 이휘소도 보고 싶지 않다.
74년에 귀국했다가 박대통령의 부탁으로 당시 미국내에 있는 과학자들에게 주한미군철수정책을 시정하여 달라고 편지도 하고, 전화도 하고 찾아다니기도 한 나로서도 다시 그럴 수는 없다. 이휘소는 대강 이런 설명을 하고, 투명용지에 쓴 서류를 내밀었다.
가로 10여센티 세로 4센티 정도로 밀봉이 되어 있는 문서였다.
그것은 이휘소가 따로 정리한 것을 다시 50분의 1로 축소하여 만든 정밀하고 치밀한 계산서였다. "이것을 다리의 뼈 속에 넣어 주십시오. " "건강에나 몸에는 지장이 없겠지요 " "얼마 동안은 지장이 없겠습니다만.. ." "박사님이 완벽하게 처리하여 주십시오." 김박사는 침통하게 이휘소를 바라보았다.
김박사가 만류한다고 이휘소가 자기의 결심을 포기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리고 자기를 찾아온 것도 평소부터 믿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다.
무엇보다 이휘소가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이 항상 교포사이에는 긍지와 자랑이었다. 김박사는 다른 의사와 간호부까지 출입을 금지시킨 가운데, 이휘소의 다리에 마취주사를 꽂았다. 살이 베어지고... 소독이 된 서류를 안치하고... 수술은 생각보다 빠르고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이휘소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휘소가 발표한 "히고스 입자에 미치는 강작용의 영향"은 물리학계에
또 다른 파문을 일으키었다. 살람교수(78년 노벨상수상)는 물리학에 새로운 경지의 논문리라고 극찬했고,
세계의 핵과학자들은 다투어 이휘소의 논문을 구하려고 하였다.
1977년 5월 19일 동경에 도착한 이휘소...
다음 날 발표할 학술논문을 정리하고는 한국 청와대에 전문을
쳤다. "5월 21일 PM11시 정각 나리다공항 대기" 나리다공항
KAL 안내소에는 몇 명의 안내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휘소가 비행기에 오르자, 바로 출발하였다.
한 시간이 좀 지난 후 김포공항에 내리자, 바로 대기하고 있던 헬리콥터에 올랐다. 헬기는 청와대정원에 내려 앉았다.
박대통령이 밖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고맙소, 이박사" 박대통령은 이휘소의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이었다.
바로 지하실로 내려간 이휘소는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의사 두 사람의 집도로 수술이 시작되었다. 수술은 간단히 끝났다. 박대통령은 이휘소의 다리 속에서 빼어낸 곁에는 피가 번진 문서를 받고... 눈물을 흘렸다. "이박사...고맙소...
이박사" 박대통령은 그 피가 뭍어있는 밀봉된 문서를 얼굴에 갖다대고, 다시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휘소는 바로 헬기를 탔고, 또 지체없이 비행기에 올랐다. 다음 날 이휘소는 동경제대에서 아무 일이 없었던 듯이 강의를 했다. 1977년 5월 27일, 미국에 돌아온 이휘소는 매사에 더 적극성을 보였다.
연구소에서의 역할도 더욱 활발했고, 대학에서의 강의도 가장 충실한 교수로서, 그는 미국과학계에서 가장 능력있고, 존경받는 인물로 공인되어 있었다. 가정에서도 그는 더욱 철저하게 아내 마르안느 (중국계 말레이지아 태생인 미국인), 아들 천, 딸 안에게 정성을 다 했다. 1977년 6월16일 콜로라도주에 있는 국립과학연구소에서 초청강의가 있었다.
가족과 함께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아내와 아들, 딸을 뒤에 앉히고 천천히 차를 몰았다.
![]() 페르미연구소
에는 이휘소에 딸린 전문기사가 있지만 휀만한 일에는 이휘소가 직접 차를 몰았다.
시카고 교외를 지나 일이노이주에 진입하였을때, 앞에서 오는 트럭이 별안간 중앙선을 넘어 이휘소의 차 정면으로 돌진하였다. 운전대에는 어떤 흑인이 타고 있었고, 이휘소는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이휘소의 차는 주행선에 있었기 때문에 중앙선을 넘어 오더라도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트럭은 100m나 되는데서부터 정면으로 이휘소의 차를 향하여 돌진하였다. 차의 앞머리가 부서지고, 이휘소는
쓰러지고... 마르안느, 천이 안이는 삽시간에 일어난 사건에 정신을 잃었다. 마리안느는 직갑적으로 아~소리를 지르며, 상대방 흑인의 운전솜씨가 의도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휘소의 차를 받은 차는 쏜살같이 도망쳐 버리었다. 차가 정지하고, 경찰이 오고... 이휘소를 차에서 끌어내고... 페르미연구소에 비상벨이 을리었다. 이휘소의 차에 설치된 긴급벨이었다. FBI, CIA에서 페르미연구소장에게 긴급전화가 걸려왔다.
"이휘소 교통사고로 사망...상대는 50대 후반의 흑인... 도주했음" 미국무장관실에도 비상벨이 울리었다. ' 이휘소 사망..." FBI, CIA 요원이 삽시간에 주위 400km의 도로를 감쌌다.
그러나 어찌된 것인지 범인에 대한 소식은 전연 발표하지도 않았다. 아니 어떻게 부딪쳤으며, 어디가 어떻게 손상되어 죽었는지 조차 발표하여 주지 않았다. "이휘소 사망..." UPI, AP, 로이터 통신으로 세계 언론계와 각국 대사관으로
속속 전달되었다. 밤 11시 30분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에 있는 긴급 벨이 울리었다. "이휘소 사망..." 박대통령은 전화 속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고, 전화통을 창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박대통령은 지난 번 밤 1시에 청와대에서 잠시 이휘소를 만났을 때 이미 죽음까지도 각오한 그의 눈빛을 읽었었다. 아! 죽음을 각오하고 말없이 다리 속에 숨겨온 피투성이의 메모지를 넘겨 주던 이휘소... 박대통령은 비서실장에게 당장에 미국과의 단교를 선언해,
그리고 국내에 있는 미국놈들을 전원 쫓아 버려...
" 무슨 일이거나 그렇게 해...OOO들.. . "이휘소가 죽었습니까? 각하..."
"죽은게 아냐 죽였지" "누가 죽였습니까?" "미국이 그랬지, 그 새끼들 청와대를 24시간 도청하지를
않나?" "이휘소는 미국 CIA에서만 24시간 감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련에서도 인공위성으로 이휘소를 24시간 감시한다고 들었습니다.
북한에서도 이휘소 때문에 신경을 쓴다는 정보도 있고..."
"어쨋거나...이휘소는 미국에서 죽였어... 아니, 설령 미국에서 죽이지 않았더라도 보호를 해야지,
OOO들...도덕정치를 한다는 놈들이... 그리고 눈앞에 있는 범인도 안 잡았다는
거야..." "미국대사께서 온다고 전화가 왔습니다." "쫓아버려...쌍놈의 새끼들... 그리고 내일 아침 내가 직접 미국에 항의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겠네" 이튼날 박대통령은 직접 나타나 미국 대사를 불러 항의하고,
내외기자를 불러 성명서까지 발표했다. "미국은 한국의 청와대를 24시간 도청하며, 주권국가로 한국을 대접하는 것도 아니고,
전정한 우방으로 대우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다시 미국에 애걸하지도 않겠거니와 미국과 국방까지도 협상하지 않겠다"
국방까지도 협상하지 않겠다는 박대통령의 발언은 비상한 충격을
주었다.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이미 미사일부대 완전 철수,
지상군 2만여명 철수...연말까지 전 미국 철수 예정... 이렇게 하는 국가를 믿고 국방을 의논할 수는
없다.
미군이나 소련이 가진 무기를 우리도 가지면
된다"라고 청와대국무회의에서 공공연히 말하곤 했다. 이휘소의 장례식이 끝나고,
물리학자들은 일 년만 더 있다 죽었어도, 노벨상을 타고 죽는건데...
이휘소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두 달 후에 박대통령은 보국훈장을 수여했다. 수상식에는 이휘소를 대신하여 이휘소의 어머니가 받았다.
박대통령은 이휘소의 어머니의 손을 잡고, 눈시울을 붉히며
"참 훌륭한 분이었는데...너무 훌륭한 분이었는데...
너무 아까운 분이었는데..." 라고 말하며,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이휘소가 박대통령에기 유도탄 및 핵제조개발원리를 넘겨주고,
의문의 죽음을 당한 후를 전후하여 미국의 원자력정책은 급전환했다. 핵관리의 엄격한 체제구축, 우방국에 대하여 한국과의 핵협정 파기 등을 강력히 요구했을 뿐 아니라, 카-터는 한 술 더 떠서 "한국은 인권탄압을 중지하고, 긴급조치를 즉각 해제하고, 독자적인 핵개발추진을 바로 중지하라"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박대통령은 이러한 카-터의 요구에"청와대를 24시간 도청하며,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주한미군을 데려가는 사람과 대화하고 싶지 않다. 카-터는 근본적으로 도덕성이 결여된 사람으로서 도덕정치를 하는 사람이다" 라고 응수했다. 한국과 미국은 상호의 신뢰가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거기다가 박대통령은 감정적인 발언마저 서슴없이 해 버렸다. "국가에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 그리고 핵확산금지조약도 자기들은 다 만들어 놓고, 남의 나라 보고 만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 패권주의 사상에서나 가능한 발상이다" 박대통령의 이러한 발언은, 카-터에게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카-터는 그런 박대통령에게 "박대통령은 반체제 인사를 즉각 석방하라, 그리고 핵무기개발을 중단하지 않으면 2억9천2백만달러의 미수출입은행 차관약정을 파기하겠다"라고 응수했다. 이러한 한미간의 대립은 박 대통령에게 유도탄개발과 핵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했다. 박대통령이 하도 야단이니까, 한 측근이 핵공장을 비밀리에 만들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공하자 "내가 다 알아서 하고 있어, 관여하지 말게, 곧 돼, 그것만 되면 대통령직을 그만 두고 영남대학에나 내려가 있겠어"라고 말했다. 박대통령은 <한국핵연료개발공단>과 <한국국방과학연구소>에서
합동으로 제작하는 유도탄개발과 핵개발 상황을 알아보기 위하여,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직접 전화로 확인하고, 일주일에 한두 번은 예고없이 들리어 연구원들과 종사자들을 격려했다. 박대통령의 집념은 눈물겨울 정도였다. 박대통령은 집무실에 앉아 한가할 때면 먼 하늘을 바라보며,
이휘소의 영상을 더듬었다. 다리를 베고, 뼈 속에서 메모지를 내 주던
모습... 그 피투성이의 메모지를 받아 들고 감격하였던 대통령 자신의 모습..
.이휘소가 차에 깔려 죽는 영상.. . 지금까지도 의문의 죽음에 한 마디 변명도 없는 미국...
박대통은 이제 이휘소의 영혼을 위해서라도 이휘소가 내어 준 메모지대로는
다 실험을 거쳐야 할 책임을 느끼었다. 유도탄개발과 핵무기개발은 외국의 지원없이 독자적인 기술과 자원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었지만, 박대통령의 열성에 감격한 과학자들과 600여명 직원의
협조에 의하여 해결되곤 하였다. 어려움이 산재하여 있었지만...
핵분열물질의 생산과, 핵탄두의 운반체 개발 등이 문제였다. 미국은 물론 다른 나라들도 한국과 핵협정을 맺으려 하지 않았고,
맺었던 핵원료협정도 미국의 압력에 의하여 중단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막막한 며칠이 지나면서, 다시 이휘소의 메모를 펼쳐 보았다. <실험용>원자로를 대체해도 좋다는 메모를 보는 순간, 연구실의 분위기는 벼란간 달라졌다고 한다. 이러한 어려움은 몇 번씩 반복되었지만, 그 때마다 이휘소의 치밀성에 감탄했다. 이휘소는 천만 분의 일도 실수할 수 없도록 치밀하고 정확한 계산법과,
만약의 경우를 우려한 모든 준비물을 메모지에 준비하여 놓고 있었다. 1978년 8월 26일 @@기지에서 한국국방과학연구소와 한국핵연료개발공단과 공동제작한 중장거리 유도탄발사 실험이 있었다. 과거에 몇 번씩 실패한 경험이 있는 박대통령의 심정이나 과기처장관,
또는 거기 모인 사람들은 초조와 기대섞인 착잡한 심정이었다. 첫 번째 대전차로켓 (3.3인치 로켓을 다시 개발) 실험은 성공이었다. 두 번째 다연발로켓 (28연발 사정거리 20km) 실험도 성공이었다. 세 번째 중거리로켓 (사정거리 50km) 실험발사도 성공이었다.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소련제 미사일의 사정거리와 같은 수준이었다. 이것을 우리의 기술만으로 개발한 것이다. 마지막 관심의 촛점이었던 장거리유도탄발사실험도 성공이었다. 사정거리 150km, 유효사거리 350km로 북한 전역은 물론, 소련과 중공의 일부지역까지 영향권이 미치는 것이었다. 이 성능은 미국이 개발한 최신 장거리유도탄 나이키미사일보다 성능이 우수한 것이기도 하다. 이것을 외국의 도움없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것이다. 이로써 한국은 세계에서 일곱 번째의 유도탄 보유국이 된 것이다.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성능이 좋은 장거리유도탄을 순수한 우리의 기술로 개발한 것이다.
박대통령은 마지막 장거리유도탄발사 실험마저 성공하자,
너무 너무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흘렸다.
![]()
1978년 9월 26일은 국군 역사상 오래 기억되어야 할 경축일이었다. 국산
유도탄(미사일) 발사 성공으로 세계에서
너무 감격하고 있는 박대통령을 바라보던
과기처장관, 국방장관, 관계 과학자들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휘소의 희생과 박대통령의 눈물겨운 나라사랑을 새삼 알게 되면서,
다음날 미국을 제외한 소련, 중국, 일본, 프랑스, 영국, 서독은 물론
특히 소련의 <적성>지에서는 전면 톱기사로 다루고
박대통령은 아예 미국대사와의 면담마저 거절했다.
박대통령은 이휘소를 생각할 때마다 새로운 용기와 결의를 다짐했다.
박대통령과 회담을 끝내고,
같은 해, 1979년 10월 26일 박대통령은
김재규는 정말 미국 CIA요원이였을까?
당시 건설부장관은 ...
이휘소의 죽음과 박대통령의 죽음이 다 미궁 속에 빠진 채,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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