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실/역사탐방

신라의 '천마도'

록야綠野 2019. 2. 8. 18:35



(21) 신라의 '천마도'-하나밖에 못 봤다고요? 웬걸, 여섯 점이나 나왔다던데요 [도재기의 천년향기]

             

[경향신문] 눈이 오는 날, 강원도 인제 원대리의 자작나무 숲에 간 적이 있다. 하늘로 쭉쭉 뻗어오른 새하얀 자작나무 줄기들이 눈과 어우러지니 더 빛났다. 나무색이 아닌 흰색의 나무, 거친 게 아니라 아기 속살같이 부드러운 감촉의 나무. 색다름을 넘어 신비롭다. 고대 북방 민족들이 ‘샤먼의 나무’로, 하늘의 문을 열어 지상과 천상을 연결하는 나무로 여겼다는 게 새삼 다가왔다. 그래서일까, 1500여년 전 신라인들이 하필 자작나무 껍질에 ‘천마도(天馬圖)’를 그린 것이….

하늘을 나는 듯한 흰 말이 그려진 ‘천마도’는 삼국시대는 물론 신라의 희귀한 회화 유물이다. 교과서 등을 통해 꽤나 유명하지만 사실 진품을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워낙 귀중하고 보존도 너무 까다로운 유물이어서 전시장에서 제대로 공개된 것은 발굴된 지 40년이 지났지만 세 번뿐이다. 잘 아는 듯하지만 잘 모르는 문화유산이 천마도다.

흔히 ‘천마도’라 부르는 자작나무제의 신라 회화유물인 ‘백화수피제 천마문 말다래’(국보 207호) 1쌍 2점 중 발견 당시 아래쪽에 있어 보존 상태가 나았던 천마도

■천마도, 1점이 아니라 6점?

우리가 흔히 ‘천마도’라 부르지만 공식 명칭은 ‘백화수피제 천마문 말다래’(국보 207호)다. 백화수피는 자작나무 껍질을, 천마문은 하늘을 나는 말(천마) 무늬를, 말다래는 말 안장 양쪽 아래에 달아 늘어뜨린 네모난 판을 말한다. 즉, 자작나무 껍질에 천마무늬가 그려진 말다래다. 말다래는 장니(障泥)라고도 하는데 장식효과와 말을 탄 사람의 권위를 드러내고, 말과 말 탄 사람을 보호하는 역할도 한다.

천마도가 발굴된 것은 1973년 8월22일이다. 경주의 고분들 중 하나인 ‘황남동 155호분’에서다. 숫자 155호로 불리던 이 고분은 천마도를 비롯, 금관 등 유물이 쏟아지면서 왕릉급 무덤으로 확인돼 명칭 부여가 필요했다. 여러 이름이 거론되다가 천마도가 나온 왕릉급 무덤이란 의미에서 ‘천마총’이라 붙여졌다. 100기가 넘는 신라 고분들 가운데 유일하게 내부가 공개돼 학생 시절 수학여행이나 지금도 경주 여행객이라면 꼭 들르는 곳이다. 천마총에 묻힌 왕의 신원이 확인됐다면 ‘릉’이 됐겠지만 왕릉급임에도 어떤 왕인지를 몰라 ‘총’이 됐다.

천마총은 당초 고고학계가 발굴 경험을 쌓기 위해 ‘연습 삼아’ 발굴한 고분이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의 하나로 경주의 고분 1기를 발굴, 내부를 공개하는 등 관광자원화하기로 하고 가장 큰 고분인 황남대총을 발굴키로 했다. 하지만 고고학계의 발굴 경험이 부족하다보니 그 옆에 있던,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155호분을 시험 삼아 먼저 발굴해보기로 한 것이다. 1973년 4월부터 12월까지 발굴한 천마총에서는 놀랍게도 1만1500여점의 유물이 나왔고, 그중 국보·보물로 지정된 것만 10여점에 이른다.

사실 ‘천마도’도 1점만 나온 것이 아니다. 1쌍으로 제작됐기에 1점이 더 있다. 또 ‘천마도’라 불리는 자작나무제 말다래 2점 외에도 대나무살 위에 금동 천마를 붙인 말다래(죽제 천마문 금동장식 말다래), 옻칠을 한 칠기제 말다래(추정)도 발견됐다. 말 안장 양쪽에 매다는 특성상 말다래는 1쌍으로 제작되니 모두 3쌍 6점인 것이다. 하지만 제작된 지 워낙 오래돼 발굴될 때 이미 상당 부분 손상된 상태였다. 발굴단과 전문가들은 6점 모두 말다래이고, 천마무늬도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들 말다래는 무덤 주인의 머리 쪽에 있던 껴묻거리(부장품) 궤 속에서 쇠솥, 토기 등 각종 유물과 함께 발견됐다.

자작나무제 천마도와 함께 발굴된 ‘죽제 천마문 금동장식 말다래’.

‘죽제 천마문 금동장식 말다래’(81×56㎝)는 금동판에 새겨진 천마가 돋보인다. 1쌍이 눌러붙은 채 발견됐는데, 위쪽 것은 발굴 때부터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여서 사실상 아래쪽에 있던 1점이 남아 있다. 그것도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아 말다래인 줄 몰랐다가 2000년대 들어 국립경주박물관 전문가들이 보존처리 과정에서 말다래인 점과 천마무늬를 확인했다. 그러곤 2014년 3월 특별전을 통해 처음 일반에 공개했다. 이 말다래는 얇고 가는 대나무살을 엮어 바탕판을 만들고, 그 위에 마직천을 댄 뒤 천마를 뚫음기법으로 표현한 금동판 10개를 조합해 금동못으로 부착했다. 달개들을 장식한 흔적도 있어 제작 당시엔 찬란한 금빛을 내며 화려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말다래의 천마는 눈·귀의 표현, 목과 꼬리의 갈기 형태 등이 자작나무제 천마도의 말과 흡사하다.

발견 당시 2점 중 위쪽에 있어 훼손이 심했던 천마도.

‘칠기제 말다래’는 발견 때부터 워낙 손상이 심해 발굴단을 안타깝게 했다. 현재 남아 있는 부분도 매우 적어 형태를 알아보기 힘든 실정이다.

■삶과 죽음의 의미를 되묻다

나머지 1쌍이 천마도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백화수피제 천마문 말다래’(73.2×55.2㎝)다. 2점이 아래위로 눌러붙은 상태로 발견됐다. 2점 중 위쪽에 있던 것은 손상이 심각했고, 아래쪽의 것은 비교적 선명했다. 그동안 알려진 천마도의 이미지가 바로 이 아래쪽 말다래 사진이다. 천마도는 발견되면서부터 학계를 흥분시켰다. 삼국시대의 귀한 회화 유물, 그것도 온전한 것이 없던 신라시대 회화 유물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한반도 회화의 시작, 그 뿌리는 선사시대 작품인 울산 울주의 ‘반구대 암각화’(국보 285호)로 본다. 하지만 고대는 물론 삼국시대 회화 유물도 전하는 게 거의 없다. 다만 평양, 만주 지역의 고구려 고분벽화가 전해져 그나마 다행이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삼국시대의 타임캡슐’로 불릴 만큼 한국 미술사에서 획기적인 자료다. 백제의 회화 자료도 빈약하다. 공주 무령왕릉 옆 ‘송산리 6호 고분’의 사신도나 부여 능산리 고분의 사신도와 연꽃무늬, 공예품 등을 통해 그 발달 과정을 짐작해볼 수 있다.

아래쪽에 있었던 천마도의 실측도.


국립경주박물관이 재현한 천마도 말다래를 부착한 신라 당시 말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