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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류복기(柳復起)의 임란창의록(壬亂倡義錄)

록야綠野 2018. 11. 28. 20:09






의병장 류복기(柳復起)의 임란창의록(壬亂倡義錄)

                                                                      류 중 영

1. 들어가는 글
 이 고문서(古文書)는 20 x 101 cm 크기의 한지에 작성된 임진왜란 초기(1592 ~1593)에 안동의병을 태동하여 안동열읍향병으로 발전 시켜서 경상도 북동부지방에서 왜군과 싸운 과정과  전과를 한문으로 기록한 일기체 문서이다.

  400여 년간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의 전주류씨(全州柳氏) 수곡파(水谷派) 종택(宗宅)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으로 볼 때 기봉(岐峯) 류복기(柳復起(1555-1617)가 안동의병(安東義兵)의 향군도감(鄕軍都監), 안동열읍향병(安東列邑鄕兵)의 정제장(整齊將)과 간병장(揀兵將)의 직책(職責)을 수행(遂行)하면서 기록을 남긴 것으로 당시에 활용하였던 동국지도(東國地圖)와 함께 보관(保管)되어있었다.



            < 창의록이 보관되어온 무실 종택 사진>


  1986년 임하댐 건설로 세거지(世居地)가 수몰되면서 종택(宗宅)에 보관했던 고문서의 대부분을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탁(寄託)하면서 우리 곁을 떠나버렸다가 작년(2011)에 종손 류승우(柳承佑)씨가 한국학 중앙연구원에 가서 원본의 복사본을 가져와서  국역(國譯)을 하면서 우리 곁에 오게 되었다.
  원문에는 문서의 제목이 없었는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창의록』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 고문서를 국역하면서 감동이 큰 몇가지 내용을 발견하였다.

첫째  1592년 음력 6월 1일에 안동에서 가장 빨리 배용길(裵龍吉), 김 용(金 湧), 류복기(柳復起)는 거의(擧義)할 것을 공모(共謀)하고, 여러 가지 준비를 하였고

둘째  8월 9일 전법사 송정에 향중의 선비들이 모여서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 “내 몸 죽는 것을 어찌 애석하다 하겠는가?”   “성패(成敗) 강약(强弱)은 가히 계산(計算)할 수 가 없다..고 하고, 서로 더불어 서명(署名)하여 맹서(盟誓)했다.’
는 부분은 그날의 비장(悲壯)한 정황(情況)을 눈으로 보는 듯 살점이 떨리고 울분(鬱憤)을 느끼게 하였으며,

셋째 8월 12일 임하에서 생원(生員) 김윤명(金允明)을 대장(大將)으로, 진사 배용길을 부장(副將)으로, 이형남(李亨男)을 정제유사(整齊有司)로 류복기(柳復起)를 향군도감(鄕軍都監)으로 추천하여   안동의병(安東義兵)이 출범(出帆)하였고,

네째 8월20일에 예안(禮安), 의성(義城), 군위(軍威) 사람과 연합의진(聯合義陳)을 구성(構成)할 것을  일직현(一直縣)에서 회맹(會盟)하여 안동열읍향병(安東列邑鄕兵)으로 재편성하여,

다섯째  11월 초5일. 순찰사(巡察使)가 김윤사(金允思)와  류복기(柳復起)를 간병장(揀兵將)으로 하여 필사즉생(必死卽生)의 굳은 정신력을 갖인  정병(精兵)을 골라내고,
○ 이로부터 예천(醴泉) 송구(松邱)로 진지를 옮겨 적진(敵陣)과 대치(對峙)하면서 소수의 정병(精兵)으로 하여금 1592. 11. 5.부텨 1593. 4 월까지 매복(埋伏)과 기습(奇襲)으로 왜적을 공격하여 이룩한 많은 전과를 소상히 기록했고,

여섯째 그 실적을 안집사(安集使)가 임금님께 보고한 계문(啓聞)에는 안동향병은 金 沔 김 면<1541-1593  고령, 거창 의병대장 경상우도병마절도사>
  郭再祐 곽재우<1552-1617  의령 의병대장, 경상좌도방어사 >
 등과 성세가 상응하다 했고,

일곱째  권응수(權應銖) 권응수<1546-1608  의병대장, 경상도 병마절도사겸 방어사>




,가 진소에 보낸 글에는 ‘ 안동창의 후에 영남의 10여 읍에는 적이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이는 향병의 힘이다. 라고 평가된 내용이 소상히 기록되어  1592년 4월 안동 향병의 출범부터  1593년 4월까지의 위대한 업적을 웅변해 주는 향기롭고 통쾌한 역사적 자료라 생각했다.
  이 문서에 기록은 없으나 임진왜란 당시에 류복기의 동생과 아들 5형제의 충성스러운 활동을 덧붙이고, 이러한 조상의 숭고한 정신과 가르침을 후손들이 계승한 구국애민의 사례들을 모아서 세상에 널리 알림으로써
 오늘날  우리 국민에게 애국심의 본보기가 되도록 하고자 한다. 

2. 창의록 원본과 동국지도 사진



  <임진창의록 사진(20×101m)>




 
<창의록과 함께 보관된 동국지도 10장중의 일부(一部) 사진>


 

3. 창의록 국역

壬辰 四月 十四日 癸卯. 倭寇陷東萊 府使宋象賢 死 巡察使金晬 傳令 列邑聚軍擧事
 임진년(1592) 4월 14일 왜구가 동래를 함락하고 부사 송상현(1551-1592)이 전사했다.
순찰사 김수가 여러 읍에 군사를 모아 거사하라는 영을 전했다.
  (* 임란 초기 상황  임란초기의 상황 : 4월 21일 울산성에서 왜적을 지키기로 하였으나 13 고을을 지켜야 할 경상좌병사 金珏이 도망쳤고, 경상좌수사 朴泓이 도망쳤고, 경상감사 김수는 어디엔가 숨어서
열읍에 전령을 보냈다. 안동부사 鄭熙積은 청송 산골짜기로 도망쳤고. 안동판관 尹安性은 풍기로 피신하였다. 예안 현감 申之悌 만이 왜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六月 初一日 己丑. 裵龍吉 金湧 柳復起  共謀義擧 俄而 安集使 金玏 奉命來到 以章甫爲里將 各於所居村 點起軍丁
 6월 초1일일 기축. 배용길 배용길 : (1556-1609 호 琴易堂)
 김용 김 용 : (1557-1620  호 雲川) 김성일의 조카
  류복기 류복기 : (1555-1617 호 岐峯)
가 의거할 것을 같이 합의했다. 얼마후 안집사 김륵이 명을 받들고 와서
그 마을의 선비를 장수로 삼아 각자 살고있는 마을에서 군사가 될 장정을 점고하게 했다.

七月十七日 甲戌. 裵龍吉 向九獜村 起軍人民 竄於山頂䕺薄 因其夜下家宿之隙縻其父兄各招子弟分定隊正二百餘人
 7월 17일 갑술. 배용길이 구린촌에 가서 인민을 군사로 일으켰는데 낮에는 산꼭대기 숲속에 숨었다가 밤에 집으로 내려와서 잠자는 틈을 타서 그 부형을 얽어서 각기 자제들을 불러 200인을 대정을 나누어 명부를 정했다.

十九日 兵使 朴晉 入本府 裵龍吉卽付所起軍于兵使
 19일 병사 박진 박 진 : ( ?-1597)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이 본부(안동부)에 왔다. 배용길이 기군한 명부를 넘겨줬다.

八月 初五日 壬辰. 招諭使 金誠一 招諭文來 裵龍吉卽出通文一邑 約會廬江書院   與金允明 金允思 往會 則惟 柳復起 鄭澡 赴約 又出文通告約會全法寺
 8월 초5일 임진. 초유사 김성일 김성일 : (1539-1593) 號는 鶴峰. 초유사를 지어 관내에 배포. 경상우도관찰사의 초유문

                        초유일도사민문(招諭一道士民文)  -金誠一
 아직까지 있어본 적이 없는 국난(未曾有國難)을 당하여 방벽과 간성(干城)이 바람결에 달아나고 무너졌으니, 우리 백성은 누구를 믿어 흩어져 도망가지 않겠는가!
 이때가 지사(志士)는 창을 베개 삼을 때다. 충신은 국가를 위해 죽을 날임에도 끝내는 아무런 호신의 보장이 없는 산골에 숨었으니, 설사 적을 피해 몸을 보전한다 해도 열사는 오히려 부끄러이 여길진대, 군신대의는 하늘과 땅의 참된 기강(天經地義)이며, 떳떳한 백성의 길(民彝)이다.
 임금님이 몽진하고 종사가 거꾸러지려 하고 만백성이 썩어 문들러지고 나라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이때에 머리를 싸매고 쥐 숨듯 하지 말고, 떨쳐 나와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함께 살아남을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찌 백성의 도리를 다한다 할 것인가?
 영남은 본시 인재의 창고라 일컬어 왔으며 근래에 퇴계(退溪 - 李滉의 號)와 남명(南冥 -曺植의 號)이 한때에 나서 도학을 밝히고(彰明) 인심을 맑게 하니, 삶의 기강을 바로 잡는 것으로 자신의 책무를 삼았고, 선비 된 자의 가르침(薰陶)으로 사숙자(私淑者)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으나 은근히 존경하고 가르침을 따르는 자>가 점점 많아졌으며, 평일에 성현의 글을 많이 읽어 스스로 넉넉하다고 자부하였다. 옛날 충신열사는 성패(成敗)로 뜻을 바꾸지 않았고 강약으로 기가 꺾이지 않았다. 마땅히 할 바 의(義)라면 비록 백전백패(百戰百敗)라도 오히려 빈주먹으로 시퍼런 칼날과 맞서 만 번 죽어도 후회치 않았는데, 적이 비록 강하다고 하나, 이미 깊이 들어와 전술상 잘못을 범했으니 어찌 쉽게 돌아가겠는가!
 우리가 비록 겁탈 당하였다 하더라도 어찌 한 결같이 당할 수야 있겠는가!
 충의(忠毅)가 격(激)하면 약함이 오히려 강하여 지고, 적은 것으로 많은 것을 대적할 수 있으니, 이때 한번 움직임(一轉)에 달렸다.
 격문(檄文)이 도착하는 날에는, 수령은 일읍(一邑)을 효유(曉諭)<알아듣게 일러줌>하고, 변장(邊將)은 사졸(士卒)을 격동(激動)시키고, 문무조관(文武朝官), 부로유생(父老儒生) 등은 각기 사람에게 서로 전하여 동지를 불러 모으고, 충의로 결속하라. 돈이 있는 백성(富民)은 수레로 곡식을 나르고, 용사(勇士)는 충갑(冲甲)의 병(兵)과 같이 분연히 일어나면 군의 함성이 크게 떨쳐 용기백배(勇氣百倍)되어 괭이 고무래도 예리한 무기로 바뀔 것이다.
 당직(當職)은 한 낱 썩은 선비(腐儒)에 불과하다. 비록 군의 기예는 못 배웠으나, 군신대의(君臣大義)는 조금 들었으니 일도(一道)가 쓰려지려는 때에 소임을 받아 옛 충신열사(忠臣烈士)의 뜻을 높이 추모하는 바이니, 의사(義士)들은 힘을 내어 빨리 공을 세우기 바라노라.
 조정의  상격(賞格)이 뒤에 있을 것이니 마땅히 잘 알지어다. (자료제공 류중영)
이 왔다.  배용길이 일읍에 통문을 내고 여강서원에 모이자고 했다.    김륜명 김윤사가 더불어 여강서원에 왔을 때 오직 류복기와 정조 만 와있었다.    또 통문을 내어 전법사에 모이자고 했다.

九日 丙申. 會于全法寺 松亭 相與盟曰 日馭播越 腥塵汚穢 身死何惜 但鄕閈軍丁 屬盡官簿 白面空拳徒奮何爲 而國事至此 成敗强弱 有不可計也  相與着署而誓
 9일 병신. 전법사 송정에 모여 서로 더불어 맹세하였다.  ‘임금님이 도성을 비우고 몽진을 떠났고, 왜병의 비린 냄새 나는 먼지가 전국을 오염시키는데  내 몸 죽는 것을 어찌 아끼겠는가?’   다만 마을 어귀에 모인 군정을 모두 관청장부에 올리고,  아무런 경험도 없이 맨주먹으로 울분만 터뜨리면 어찌하겠느냐 만, 나라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성패와 강약은 헤아릴 일이 아니다 하고, 서로 더불어 서명하고 서약하였다. 

十二日 己亥. 會盟于 臨河 一鄕士友不期而至者百數 薦生員金允明爲大將 進士 裵龍吉爲副將 李亨南爲整齊將 有司 柳復起 爲鄕軍都監
 12일 기해. 임하에 모여서 맹세하였다. 한 고을의 선비친구들이 약속도 없었는데 찾아온 이가 100여 명이었다.   생원 김윤명을 대장으로 추천하고, 진사 배용길을 부장으로, 이형남을 정제장으로 유사 류복기를 향군도감으로 삼았다.

十八日 乙巳. 會鄕校 以李庭栢 更爲大將 以鄕校爲陣所
 18일 을사. 향교에 모여서 이정백을 대장으로 바꾸고, 향교에 진소를 차렸다.

二十日 丁未. 與禮安義城軍威人 會盟一直縣合陣 以禮安金正字垓爲大將 生員李庭栢 進士裵龍吉 爲左右副將 幼學柳復起 李亨男爲整齊將 號安東列邑鄕兵 以安東爲本陣.   〇 時西上 鳥嶺之餘賊 每三十里 設一屯 咸昌唐橋之賊 最爲强大 安禮陷城之後 聞其義擧發通遂撤歸 龍宮醴泉之境 焚掠之患 罔有餘地矣.
 20일 정해. 예안, 의성, 군위 사람과 더불어 일직현에 모여서 합진할 것을 맹세하였다.  예안의 정자 해를 대장으로 생원 이정백, 진사 배용길을 좌우 부장으로 유학 류복기, 이형남을 정제장으로 이름을 안동열읍향병으로하고 안동에 본진을 두었다.
 〇 이때 서쪽으로 올라가고 조령에 남은 적군은 매 30 리에 1 둔을 설치하였는데 함창당교 당교 <현재 상주시 함창읍 윤직리>
의 적이 가장 강대했다.   적이 안동 예안성을 함락한 후에 의병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용궁 예천지경으로 철수하여 돌아갔다. 이후에는 불 지르고 노략질 당하는 걱정은 없어졌다.

十一月 初五日. 巡察使以 金允思 幼學柳復起 爲揀兵將揀擇精兵 自是移陣于醴泉松邱 與賊壘相對遣伏兵壯士 射奪倭馬二匹 於尙州之盤嚴

 11월 초 5일.  순찰사가 김윤사와 유학 류복기를 간병장으로 삼아 정병을 가려뽑아냈다.  이로부터 진을 예천 송구로 옮겨서 적진과 대치하였다. 장사를 복병으로 보내어 상주 반암에서 왜군의 말 두 필을 쏘아서 빼았았다.

癸巳 元朝. 覵敵休息 伏兵乘夜 突入敵陣中 射殺無數奪其槍劍 連放震天雷一陣驚動 死者甚衆   翼夜又如之 射殺十餘人
 계사년(1593) 설날. 적이 쉬는 것을 엿보고 복병이 밤을 틈타 적진중에 돌입하여  무수히 사살하고 그들의 창검을 빼앗았다.  연달아 진천뢰를 쏘아 적진을 경동시키니 죽은 자가 심히 많았다.  

 이튿날 밤에도 이와 같이 하여 10여 인을 사살했다.

自此至四月. 八次設伏兵 於唐橋 盤巖 松峴等處 斬賊 二十餘級 生擒一賊首 其餘射殺無數 前後斬劃 輒報巡使 皆蒙賞格公文巡察使 後題送曰 斬將獻馘頂背相望    當爲本道義兵之首 
 이로부터 4월에 이르기까지 여덟 차례나 복병을 투입하여 당교 반암 송현 등지에서 적의 머리 20여 급을 베고, 적 우두머리 1 명을 사로잡고, 그 나머지를 무수히 사살했다.  전후로 사살하고 포획한 사실을 순찰사에게 보고하여 모두가 상훈을 받도록 하고, 순찰사에게 보고하는 공문이 꼬리를 이어 연달았으니 이는 안동의병이 마땅히 본도 의병의 으뜸이다. 라고 했다.
  安集使 啓聞曰 安東鄕兵 與 金沔, 郭再祐等 聲勢相應 賊鋒雖多 將不足患
  안집사가 임금님께 보고하기를

 ‘안동향병은 김면, 곽재우 와 더불어 명성과 위세가 서로 비슷하여 적봉이 비록 많다고 해도 장차 근심할 바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權應銖遺書於陣所曰 安東倡義後 嶺下十餘邑之賊 首尾斷絶 無所着脚 鄕兵之力也 
 권응수 (1546-1608 영천 신령 의병대장 경상좌도병마절도사)
가 진소(陣所)〔본부〕에 글을 보내 말하기를
‘안동 창의 후에 영남 10여 읍의 적은 머리와 꼬리가 단절되어 발을 들여놓지 못하였으니 이는 향병의 힘이다.’ 라고 했다.
 時 自京踰嶺之賊 幷捲唐橋之柵 設陣治海 充斥下邑 殺掠之患 甚於亂初
 이때 서울에서 영<조령>을 넘어온 적이 당교에 있던 진을 거두어 바다 근처에 설치하니 하읍에는 적군이 가득하여 죽이고 노략질하는 환란이 전쟁초기 보다 심해졌다.


 4. 덧붙이는 글

※ 그해(1593) 5월 19일 대장 김 해 의 순국(殉國)으로 안동열읍향병은 해산(解産)되었다.
※ 그해(1593) 6월 29일  아우 류복립(柳復立)은 진주성이 초토화 되면서 36세의 청년 장수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 1594년부터는 명(明)나라와 일본의 화의(和議)가 추진되면서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 기봉(岐峯) 류복기(柳復起)는 1596년 전국의병장 공산회맹에 아들 3형제를 대동하였으며,
그해 9월 팔공산상암(八公山上庵)에서 영남지방(嶺南地方)의  의병장(義兵將) 회맹(會盟)에 동참하여 다음과 같은 회맹시(會盟)詩)를 지어 결의를 다짐했다.

          ❲天以東方値否運 島夷敢擾小中華

            誰能爲國干城將 掃盡三都一隊倭

            忍說鸞輿西路幸 爲人臣子復讎時

            枕戈蹈刃無窮恨 欲決江河一洗之❳
   


          하늘은 이 나라에 나쁜 運을 내렸는가? 
          섬 오랑캐 감히 우리나라를 어지럽히네. /
          누가 나라위해 干城將 능히 되어 / 
          三都에 一隊의 왜적을 모조리 소탕할까?/
          임금님이 서쪽으로 간 것은 차마 말 못하겠고 / 
          신하된 자 일어나 복수할 때 되었구나. /
          창을 베고 칼을 밟는 무궁한 憤恨으로 /
          강물이 쓸어버리듯이 한 칼에 씻어내리‼ /


  ※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기봉(岐峯) 류복기(柳復起)는 향중에서 사사(死士)

 死士 :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의로운 선비
를 모집(募集)하였다..
장남(長男) 우잠(友潛)과, 차남(次男) 득잠(得潛)이 따라 가겠다고 하자, 삼남(三男) 지잠(知潛)과 사남(四男) 수잠(守潛), 오남(五男) 의잠(宜潛)이 떨쳐 일어나 함께 가겠다고 하니, 공은 어린 아들의 요구을 義롭게 여기고 허락하면서 아들 5형제를 대동하고 400리 먼 길을 걸어서 창령군 화왕산성(火旺山城)의 방어사(防禦使) 곽재우(郭再祐) 장군 휘하(麾下)에 합류하여 전쟁이 끝날 때(1598년 12월)까지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 火旺山城 동고록(同苦錄)과 당시 함께 싸운 의사(義士) 수월재(水月齋) 문집에 기록이 남아있고, 김시형(金始炯)의 용사응모록(龍蛇應募錄)에 부화왕수성록(附火旺守城錄) 화왕입성동고록(火旺入城同苦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대구시 망우공원의 임란호국영남충의단(壬亂護國嶺南忠義壇)에 

.  의사(義士)류복기(柳復起)(1555~1617),

.  의사(義士)류복립(柳復立)-(1557~1593) 류복립 : 字는 君瑞 號는 墨溪
, 의사(義士)류우잠(柳友潛)(1575-1635) 류우잠 : 字는 尙之 號는 陶軒
, 의사(義士)류득잠(柳得潛)(1578-1652) 류득잠 : 字는 得之 號는 燕巖
, 의사(義士)류지잠(柳知潛)(1578-1652) 류지잠 : 字는 樂之 號는 龍巖
, 의사(義士)류수잠(柳守潛)(1585-1644) 류수잠 : 初名은 好潛 字는 養之 또는 好之
, 의사(義士)류의잠(류宜潛)(1588-1644) 류의잠 : 初名은 樂潛 字는 宜之
등 7위의 위패가 봉안되었다.



< 임란호국영남충의단에 봉안된 위패[편집한 사진]>
  (봉안된 영남의병의 위패는 총(總) 315위다)


※ 기봉 류복기 행장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왜란 이후에 흉년이 들어 굶주린 백성이 거리를 헤매는지라 류복기는 거리에 가마솣을 걸고 죽을 끓여 그들의 생명을 구했는데 그 수가 대단히 많았다.

* 불과 10촌 兄인 류영경(柳永慶)(1550-1608)이 영의정에 올라 류복기의 명성을 듣고 여러 번 불렀으나 공은 권문(權門)에 출입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는 편지를 보내고 마침내 가지 않았다. 이를  들어 조정의 대신들이 경연(經筵)에서 담대멸명(澹臺滅明) 담대멸명 : 공자의 제자인 자유가 말하는 담대멸명이라는 사람은 길을 가되 지름길로 가지 않고, 공적인 일이 아니면 자유의 방에 오지 않았다. 이 말은 지름길을 가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그 사람의 행동이 바르고 또 일을 급히 서두르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공적인 일이 아니면 자유를 찾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공사를 구별하고 윗사람에게 아첨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과 같다고 평하였다.

* 한강(寒岡) 정구(鄭逑)는 말하되 류복기는 가히 심성을 논할 만하다고 하였고. 식암(息庵) 황섬(黃暹) 공은 안동부사로 있을 때 부내(府內)의 현사(賢士)들을 추천하는데 첫째로 공의 이름을 올리고 "화살 같은 高士 高士 : 인격이 높고 성품이 깨끗한 선비. 특히 산속에 숨어 살며 세속에 물들지   않은 덕망 있는 선비를 말한다.
다" 라 했다

* 뒷날 마을 한 쪽에 기양서당(歧陽書堂)을 지어 후손들의 교육 기반을 조성하고  훌륭한 정신을 계승하였으며, 자신이 스스로 공부하는 장소로 하였다.

* 맏아들 우잠은 1592년부터 부친 류복기와 함께 창의하였으며, 1637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말 타고 활쏘기로 단련(鍛鍊)하고 동지를 규합(糾合)하여 거의(擧義)를 도모(圖謀)하며 시를 짓기를

             나라가 위급(危急)한데 보답(報答)할 길이 없어

            무예(武藝)를 익혀서 이제 호랑이도 두렵지 않다.

            어찌 서생(書生)이라고 본래 담(膽)이 적을 소냐?

            한바탕 싸워서 오랑캐의 요기(妖氣)를 씻어버리리라.

하였다.

  얼마 후에 남한산성에서 굴욕적인 화의(和議)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우리는 이제 오랑캐가 되었구나!”   라고 탄식했다.
이리하여 수곡 종택(宗宅)에는  기봉(岐峯)과 도헌(陶軒)의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후손이 되자는 의미로 【기도유업(岐陶遺業)】이란 액자를 걸었다.


5. 기도유업의 계승 발전
* 5대손  류승현 : (1680-1746) 號 慵窩 무신창의 의병대장.  공조참의. 청백리. 불천위
은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영남의 17읍 선비들을 규합하여 무신창의(戊申倡義)

<무신창의 : 당시의 300여명의 파록이 용와종택에 남아있음>


의 주축으로 나서서 의병대장을 담당하였고,
* 구한 말 안동의 을미(1895)의병은 9대손 류치명의 제자가 주축을 이루었고



<의병 주축 : 초대 의병대장 權世淵  2대  金道和. 柳止鎬 金興洛 柳必永 柳淵博. 柳 琓. 柳廷鎬,
 柳淵楫, 柳晦植. 柳憲鎬, 柳昌植, 柳時淵등은 정재 류치명의 제자다.>



 10대손 류지호 11대손 류연박 부자 분을 비롯하여 안동의소파록에는 의병대장을 비롯하여 참모 도서기 중군장 등 46명의 간부 명단이 있는데 기봉 류복기의 후손이 8명 이나 배치되었다.


<8명 : (參謀- 柳淵博. 中軍將- 柳 琓. 都書記- 柳廷鎬, 柳必永. 書記- 柳淵楫, 柳晦植.

 出令- 柳憲鎬, 柳昌植) >


 * 안동의병에는 초기부터 후기에까지 맹렬히 활약한  류시연


< 류시연(柳時淵) : (1873-1914)號 星南 임동면 한들에서 출생. 안동 의진의 소모장과 2차 김도화 대장 을 도와 선봉장을 맡았다 태봉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 그 뒷수습을 감당했고,  영양 의진의 김도현 대장, 영덕 의진의 신돌석 대장과 연합작전을 펼치면서 안동 청송 진보 영양 영해 영덕 삼척에서  활동. 경주 분황사에서 영남의병 지도자 회의에서 영남의병대장으로 류시연을 추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911년 만주로 망명한 날까지 활약하였다.  성남의 활동은 의병활동 이후에도 만주 독립군 활동을 계속했고 1912년 군자금 모금을 위하여 몰래 귀국했다가 영주 반구 장터에서  체포되어 1914년 1월 29일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그의 의병활동은 병영에서 읽혀지는 ‘육군’이란 월간지에 연재되었고 KBS라디오  국군의방송 시간에 ‘다큐멘터리 의병대장 류시연’이란 프로그램으로 오래도록 방송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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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류인식 柳寅植 : (1865-1928) 號 東山 민족운동가. 교육자.
은 유학경전 중심의 교육으로는 20세기의 국가를 움직일 인재를 키울 수 없다는 판단으로 경상도 지역에서는 최초의 고등학교인 협동학교를 창설하여 국어, 한문, 영어, 수학, 과학, 지리, 역사 등 17과목을 교육시키는 선구자가 되었으며, 이에 동참한

. 이상룡 李相龍 : (1858-1932) 號 石州 교육자. 독립운동가. 상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 김동삼 金東三 : (1878-1937) 號 一松 독립운동가. 교육자. 상해임시정부 초대 민족대표자회의 의장
, 김대락 金大洛 : (?-1927)  號 白下 협동핚교 교원과 학생을 위하여 자기 집을 주고 셋방을 얻어 살았고 만주군관학교 개교에 공헌한 독립운동가.


 류인식 등은 만주 독립군의 주축을 이루었다.
* 류인식은 신병으로 귀향하여 국민계몽운동과 협동학교 운영에 매진했다.


* 1919년  3⚫1 운동 때 임동면 편항(쳇거리) 만세운동 쳇거리 만세운동 :  1919년 3월 21일 오후 2시경에 500여 명이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고 일본인 순사 우치다가 시위대를 막아섰으나, 우치다와 권태석 순사보를 제압하고 주재소에 들어가서 경찰의 무기를 모두 빼앗아서 우물에 넣어 못쓰게 만들었으며, 면사무소를 공격하여 각종 서류를 파기하고 건물도 부수었다.
일본인 순사에게 태극기를 들려서 동네마다 찾아다니면서 만세를 불렀다.
시위는 이튿날 새벽 2시가 넘도록 계속되었으며, 이날 만세를 부른 전체 인원수는 1,000명이 훨씬 넘었을 것이라 전한다.    

 ☀ (천안 독립기년관 3.1 운동관 안동의 3.1운동 부분에 편항 1,000명. 예안 500명이 게시되었음)
 다음날 임북면(사월) 시위에도 그 다음날 영양 시위에도 참여한 분이 있었다. 이때에도 정재의 손자 류연성의 활동이 가장 두각을 나타냈다.
 柳淵成은 일경에 체포되어 대구 감옥에서 6개월 동안 재판을 받으면서 옥중에서 만세를 여러 차례 불렀다고 한다. 류연성은 징역 7년을 선고받고 7일 만에 순국했으니 그간의 고초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류교희와 류동수는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이는 독립선언서에 기록된 민족대표 33인에게 3년 이하의 형이 선고된 점과 비교할 때 시위가 얼마나 격렬했는지를 감지할 수 있는 대목이다.
 역시 공의 후손들이 한들의 양파구려 양파 : 諱 柳觀鉉 號 陽坡  刑曹參議 丁茶山의 목민심서에 모범사례 등재
에서 운영된 협동학교에서 우리 문중이 주관하였다. 국내외(國內外)에서 독립운동에 압장 서서 항일투사로 훈장을 받은 분이 32명이며 미포상자는 64명이나 되니 이는 전국 최고의 수준이다.


*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독립선언서에 기록된 민족대표 33인은 징역 3년 ~2년 6개월인데 비하여 편항 만세운동의 주동자 류연성은 징역 7년, 류교희, 류동수 외 3인은 징역 6년을 선고받았고 집행유예이상이 모두 67명이나 된다.<타성(他姓) 포함>
 

* 파리장서에 서명 -
 이 장서에 직접 서명한 사람은 137명이며  안동 사람은 5명인데 우리 문중 어른 2인(한들에 柳淵博, 삼산에 柳必永)이 들었음은 주목할 부분이다.
* 해외에서 활동한 분으로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을 담당하신 류 림(柳林) : (1894-1961) 독립룬동가, 정치인.경북 안동 출생. 아호 단주(旦洲) 독립노동당 당수
선생을 비롯한 여러분이 있다.
* 그 밖에도 평화시에 학문연구와 수많은 저술활동, 대과와 소과 급제 등의 업적

배출한 인물
 * 불천위(不遷位) 5위(百拙庵 柳 㮨,  慵窩 柳升鉉,  三山 柳正源,  好古窩 柳徽文,   定齋 柳致明)
    * 천사(薦仕) 5인-蘆厓 柳道源,  壺谷 柳範休, 壽靜齋 柳鼎文,   好古窩 柳徽文, 東林 柳致고) 

 * 대과 급제 13인- 乖厓 柳 榰, 涵碧堂 柳敬時,  慵窩 柳升鉉,  陽坡 柳觀鉉,  三山 柳正源, 

 柳之源, 定齋 柳致明,  孔庵 柳致好, 柳章鎬, 무과에는 柳致百,  柳星鎬, 柳 琓.
  *  목민심서에 우수사례가 실린 분   2인   (陽坡 柳觀鉉,   三山 柳正源)
  *  청백리(淸白吏)  2인    (涵碧堂 柳敬時.  慵窩 柳升鉉, )
  *  생원 진사     33인   
  *  정려 (旌閭)    5인 (남편을 따라 목숨을 끊은 고결한 부인에게 내린 교지)
  *  안동좌수  16인      *  안동별감  24인   *  음사(蔭仕)  39인      *  증직 (贈職)  21인
  *  문집(文集)  118인   *  문행 (文行) 32인
  *  영남학맥(嶺南學脈)에 등재 :  6인 (三山 柳正源,  蘆厓 柳道源, 東巖 柳長源,  好古窩 柳徽文,  定齋 柳致明,  西坡 柳必永)


을 남겼으며 특히 학문을 몸으로 실천하여 義 와 禮의 본보기가 되었다.
* 기봉(岐峯) 류복기(柳復起)는 이러한 공로로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의 증직교지(贈職敎旨)를 받았으며, 기양(岐陽)추원사(追遠祠)에서 제향(祭享)하고 있다.
* 묵계(墨溪) 류복립(柳復立)은 외숙부 학봉 김성일을 도와 사천, 고성, 진해를 수복하였고 진주대첩에서 공을 세웠으나 1593년 왜군의 복수전 때에 진주성의 수문장으로 싸우다가 6월 29일 성이 초토화(焦土化) 되면서 순절(殉節)하였다.
 자헌대부(資憲大夫)이조판서(吏曹判書)의 증직교지(贈職敎旨)를 받았으며, 충신 정려(旌閭)가 내려졌고, 진주 창렬사(彰烈祠)에서 제향(祭享)하고 있다. 
     
             <류복기를 제향하는 기양 추원사 사진>


< 류복립의 충신 정려각 사진>

<류복립을 제향하는 진주 창렬사  사진> 


6. 마무리하는 글

  이 창의록(倡義錄)은 기봉(岐峯) 류복기(柳復起)가 대장(大將)이 아닌 참모(參謀)의 위치에서 기록했기 때문에 계사년 정월 초이틀 이후의 전과(戰果)는 날짜 별로 쓰지 못하였으며 규모가 크지 않고 매일 쓴 일기도 아니지만 임진왜란 초기 안동의병(安東義兵) 출범 당시의 비장한 결의와 어려운 준비과정, 안동열읍향병의 출범과 안집사, 순찰사와의 협조, 왜군의 동태와 선발된 소규모의 정병(精兵)으로 하여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진(敵陣) 가까운 위치에 진을 치고 잠복(潛伏)과 기습(奇襲)으로 적을 공격하여 전과(戰果)를 올리는 게릴라 전술(戰術), 1593년 정월 초하룻날 낮에 적(敵)이 휴식하는 것을 엿보고 밤중에 적의 진중(陣中)을 복병(伏兵)이 기습(奇襲)공격한 부분을 비롯하여 그 후 4개월 동안의 산발적인 전과(戰果), 왜군들이 불 지르고 노략질하여 백성들이 당한 고통, 그리고 안집사의 계문(啓聞)과 권응수(權應銖)가 진중에 보낸 글을 실어서, 안동향병(安東鄕兵)은 구국애민(救國愛民)의 일념(一念)으로 필사즉생(必死卽生)의 정신을 발휘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한 내용은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활동에 버금가는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 결과로 왜군은 머리와 꼬리가 잘린 모습이 되었고, 안동 인근 10여 읍에는 왜군들이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으며, 안동 인근의 백성들은 왜군의 노략질을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 등을 간략하면서도 소상히 담고 있는 통쾌한 기록임을 읽을 수 있었다.
  의진(義陳)이 해산(解散)된 후에도 기봉(岐峯) 류복기(柳復起)는 외삼촌 김성일과 동생 류복립(柳復立)을 진주성에서 잃었으면서도 영남지방 여러 고을의 의병장(義兵將) 이 팔공산(八空山) 상암(上庵)에 모여 회맹(會盟)하면서 시(詩)를 지어 결의(結義)를 다지는 당당하고도 충성스러운 의병장의 모습을 보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기봉 류복기는 나라에서 벼슬을 받은 것도 아니면서 스스로 향중에서 사사(死士)를 모집하면서 아들 5형제를 대동하고 사지(死地)를 향하여 400리 머나먼 길을 걸어서 화왕산성을 찾아갔다는 것은 오늘날 발달된 교통수단으로 10만 리를 가는 것 보다 더 힘들고 고통스런 걸음걸음이었다고 사료된다.

 특히 아들 5형제와 함께 6부자가 스스로 전쟁터를 찾아간 구국정신(救國精神)은 하늘도 감동할 사례(事例)이며, 세계역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보석보다 찬란한 기록이다.
 후손들이 공의 유업을 계승발전 시켜 대한제국 말엽부터 8.15 광복가지 독립유공자를 무려 96인이나 배출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거룩한 공적은 오늘날 우리 국민 모두가 본받아야할 참으로 참신(斬新)하고도 보석(寶石) 처럼 빛나는 역사적 자료로서 한국정신문화의수도 안동정신의 대표적인 모델이라 할 것이다.
                  

< 안동시는 2006년 7월 4일 특허청에 『한국정신문화의 수도안동』이라는 브랜드 등록을 했다.  

그 당위성으로 

 1.유교문화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한 『추로지향(鄒魯之鄕)』
2. 국내 유일의 『安東學』이 존재하는 곳  

 3. 평생학습도시로서 『선비정신 계승발전』
4. 국내 최다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獨立運動의 聖地』  

5. 전통과 예절이 살아있는 『隣保協同』의 고장 

 6. 『안동국재탈춤페스티벌』의 고장

7.『過去情報의 집대성과 未來비전의 설계』가 뚜렸한 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