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和鉉 墓誌
부군(府君)의 휘(諱)는 화현(化鉉)이요, 자(字)는 해백(諧伯)이요, 호(號)는 송음(宋陰)이다.
전주(全州) 류(柳)씨는 국초(國初)<조선(朝鮮)초기(初期)>에 현달(顯達)하였는데, 집현선생(集賢先生) 휘 의손(義孫)에 이르러 더욱 드러났다. 그 뒤 예빈시정(禮賓寺正) 휘 복기(復起)는 학봉선생(鶴峰先生)을 사사(師事)하였고, 호(號)는 기봉(岐峯)이며, 좌승지(左承旨)에 추증(追贈) {壬亂倡義로 吏曹參判에 追贈} 되셨다.
高祖父 휘는 지잠(知潛)으로 호가 용암(龍巖)이며, 증조부(曾祖父)는 휘 간(檊)이며, 조부(祖父)는 휘가 완휘(完輝)이며, 고는 휘 영시(永時)이고, 비(妣)는 봉화 금(琴)씨 성호(聖頀)의 따님이다.
부군(府君)은 숙종(肅宗)임진년(1712) 10월 1일에 태어나셨다. 어려서부터 총민(聰敏)하여 독서(讀書)를 좋아하고, 문예(文藝)를 일찍이 성취하여 선친(先親)인 처사(處士)공이 위대한 재목이 될 것이라 기대하셨다. 무신년(영조4, 1728)에 부친의 명(命)으로 족형(族兄)인 양파(陽坡)공에게 수학(受學)하셨다. 양파공의 계자(季子)인 동안(東巖)공은 부군보다 십여 세가 적었는데, 무릇 의심이 나거나 모르는 곳이 있으면 같은 연배(年輩)처럼 여기며 자문(諮問)하여 결정하셨다.
병진년(1736)에 모친(母親)상을 당하셨고, 무오년(1738)에 부친상을 당하셨는데, 슬픔을 극진히 다하고, 장례(葬禮) 절차를 삼가면서 삼년상을 마치셨다.
일찍 어버이를 여왼 것을 종신(終身)토록 한스러워 하여, 매번 기일(忌日)을 만날 때마다 슬퍼하고 사모(思慕)하는 마음을 가누지 못하셨으며, 생신(生辰)날 아침을 당해서는 요아시(蓼莪詩) 를 세 번 반복해서 외우며 풍수지탄(風樹之歎)의 감정을 풀어내셨다.
평소의 성품(性品)은 염담(恬澹)<조용함>하여 분화(紛華)<어지럽고 화려함>한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으며, 산수(山水)를 매우 좋아하여 때때로 벗을 부르고 나막신[屐]을 손질해서 소요(逍遙)<산보>하고 시를 읊조리며 훌쩍 속세(俗世)를 벗어나고자 하는 뜻을 품으셨다. 그러나 선인(先人)이 남기신 경계로 인해 여러 차례 응거(應擧)<과거에 응시>하여 향시(鄕試)에는 합격했으나, 예부시(禮部試)에는 번번이 합격하지 못하셨다. 몽학(蒙學)을 가르칠 때는 성의(誠意)로 힘써서 감동시키셨으며, 일찍이 회초리를 가한 적이 없으셨다.
정조(正祖) 임인(壬寅)년( 1782) 10월. 병으로 자리에 누워, 27일에 고기를 물리라고 명하시며 말씀하시기를, “명일(明日)은 어버이의 기일(忌日)이니 한 숨이라도 아직 남았다면 어찌 차마 고기를 먹을 수 있겠느냐?” 하셨다.
30일 신시(申時)에 부축을 받고 일어나 진다(進茶)하시고는, 자리를 똑바로 하여 누우신 채 손자(孫子)인 나 건휴(建休)를 부르시어 학문(學問)을 부지런히 하라고 권면(勸勉)하셨다. 말을 마치고 임종(臨終)하셨는데, 향년이 71세이시다. 그해 12월 2일에 숲당 교목동(橋木洞) 선영(先塋)의 왼쪽 기슭 묘향(卯向)의 언덕에 받들어 안장(安葬)하였으니, 정신이 맑을 때 내리신 유명(遺命)을 따른 것이다.
아아! 부군은 타고난 자질이 강직(剛直)하고 과단(果斷)하셨으며, 의모(儀貌)가 단정(端整)하고 정결(淨潔)하셨다. 내면(內面)으로는 기교(機巧)가 싹트지 않으셨고, 외면(外面)으로는 다른 사람과 경계(境界)를 구분하지 않으셨다. 충후(忠厚)함이 넉넉하셨고, 탄이(坦夷)하여 얽매이는 게 없으셨으며, 여러 사람과 무리지어 있어도 상리(常理)에 어긋나는 언행(言行)을 하여 세속의 명예(名譽)를 구하려하지 않으셨다.
평소의 일상생활(日常生活)을 살펴보면, 어버이를 섬길 때는 효도(孝道)를 다하고 제사(祭祀)를 지낼 때는 정성(精誠)을 다하셨으며, 종당(宗黨)에게는 은혜(恩惠)로 처신하고 빈우(賓友)에게는 공경(恭敬)으로 접대하셨으며, 분수(分數)를 편안히 여기고 곤궁(困窮)함을 굳게 지켜서 사는 거처(居處)가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고 먹는 음식이 명아주나 콩잎조차 이어지지 못해도 태연(泰然)하게 여기셨다.
서책(書冊)의 경우에는 읽지 않은 것이 없으시어, 시서(詩書)와 전기(傳記)는 왕왕(往往)길을 가거나 잠자리에 누워서도 읊으셨으며, 만년(晩年)에는⟪周易⟫을 손수 抄錄하여 고개 숙여 읽어보고 고개 들어 생각하면서 부지런히 노력하여 피로한 줄도 잊으셨다.
天文, 地理, 복서(卜筮), 산수(筭數)와 같은 것에도 두루두루 널리 통달하고 익히셨으며, 잠잠히 연구하고 묵묵히 이해하신 것을 일찍이 지필(紙筆)로 형언(形言)하지 않으시어 다만 시문(詩文) 약간펀(若干篇)이 집안에 보관되어 있을 뿐이다.
배(配)는 안동(安東)권(權)씨 재인(載仁)의 따님으로, 유순(柔順)하고 인자(仁慈)하고 선량(善良)하셨으며, 군자(君子)를 봉양함에 잘못된 행실이 없으셨다. 무자년 (숙종 34, 1708)에 나시고, 정해년(영조43, 1767) 3월 7일에 졸하셨다. 묘는 부군의 묘 아래로 10여 보(步)의 유좌(酉坐)에 있다.
아들 둘을 두셨으니 충원(忠源)과 후사(後嗣)로 간 민원(敏源)이다. 충원은 아들이 建休와 생원(生員)韶休이고, 여서(女壻)가 朴世維,∙李魯賢∙黃中穆이다. 敏源은 아들이 정휴(挺休) ∙同休 ∙景休 이고, 여서가 참봉 李家發∙李文坤∙申相東이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나 建休는 어려서 슬기롭지 못해, 조부를 모시던 15년 동안을 대락 이라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중에 신빙성(信憑性)이 있는 저 한두 가지를 삼가 써서 광(壙) 남쪽에 들여서 구릉과 골짝이 뒤바뀐[陵谷易位] 뒤에 고증(考證)할 자료로 대비(對備)한다.
孫子 建休는 삼가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