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아의 아트 스토리-(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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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3편) ♣
(KAIST 서양미술사 교수)
1
평화로운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둔덕이다.
엄마는 아기를 조심스레 무릎에 앉히고 바닥에 둔
바구니에서 꺼냈을 포도송이를 아기에게 쥐여준다.
신이 난 아기는 발가락을 꼬물대며 앙증맞은 두 손
으로 포도를 집으려 하고, 그들이 타고 온 당나귀
는 나무에 묶인 채 얌전히 서 있으며, 아빠는 멀
찍이서 아기와 엄마에게 줄 밤을 따는 중이다.
청명한 하늘빛, 온화한 땅의 질감과 바람에
한들대는 아기의 얇은 옷까지 세밀하게 묘사한
이 서정적인 그림은 16세기 초, 북유럽 르네상스의
대가 제라르 다비드(Gerard David·1460~1523)의
1510년작 '이집트로 피신 중의 휴식'<그림>이다.
중세로부터 많은 미술가가 기적을 행하는 예수의
신성을 증명하기 위해 이집트로의 피신 장면을 그렸지만,
다비드는 도중의 휴식에 초점을 맞추고 로마시대가 아니라
당대 유럽의 풍경을 배경으로 성가족의 정감 어린 면모를
보여주었다. 아름다운 전원의 한가로운 피크닉에서는 도
피의 긴장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림 중앙
을 차지한 포도는 성찬식의 포도주, 즉 십자가형을 받고
흘리게 될 예수의 피를 상징한다. 다비드가 그린 진짜
기적은 자식에게 다가올 비극을 알면서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어머니, 마리아의 인내다.
2
미술사에는 '과연 이것이 미술인가'를 두고 벌어진 송사가
여럿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루마니아 출신의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 1876~1957)의
'공간 속의 새'〈사진〉에 얽힌 재판이다. 추상 미술에
익숙한 현대인이라면 유려한 곡선을 이루며 하늘을
향해 날렵하게 솟아오른 이 청동 조각에서 속도감
있는 새의 비상(飛上)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한 세기 전의 사정은 그렇지 않았다.
1926년 미국의 사진작가 에드워드 스타이켄은 파리에서
이 작품을 구입해 돌아오면서 면세품인 미술품으로 세관
신고를 했다. 그러나 '새'라면 마땅히 부리와 날개, 깃털이
있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던 세관원의 눈에 뾰족한 쇳덩이가
미술품으로 보일 리 없었다. 미국 세관은 이를 '주방용기와
병원용품' 항목으로 분류하고 230달러의 관세를 매겼다.
스타이켄은 세관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미술에 대해
보수적인 이들은 이 작품에 대해 "새처럼 보이지 않고, 별
로 아름답지 않으며, 작가가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므로 미
술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브랑쿠시는 "평생토록 나는
비상의 본질을 추구했다"고 증언했으며, 스타이켄은 "미술
가가 '새'라고 했으니 이것은 새"라 주장했다. 판사는 스타
이켄에게 "만일 사냥을 나갔는데 나무 위에 저 물건이 있었
다면 '새'라고 여기고 쏘았겠느냐"고 물었다. 당황한 스타이
켄은 대답을 못했지만, 어쨌든 재판정은 '새를 연상하기엔
어렵지만 전업작가가 만든 작품이며 보기 좋기 때문에
미술품'이라고 판결하고 스타이켄의 손을 들어주었다.
'공간속의 새'는 미국 법원의 인정을 받은
최초의 추상 조각이다.
3
서양 미술에 등장하는 수많은 여자들은 세 부류로 나뉜다.
예쁜 여자 비너스, 나쁜 여자 이브, 그리고 어머니 마리아.
그런데 특이하게도 비너스에겐 아들 큐피드가 있고, 이브는
카인과 아벨을 낳았으며, 성모 마리아 역시 늘 아기 예
수를 안고 있지만, 미술의 주인공으로 정작 임산부가
등장한 적은 거의 없었다. 여성은 유혹적이거나 혹은
거룩해야 했을 뿐,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자연
그대로의 여체를 드러내는 것은 미술에서
금기시되었기 때문이다.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가 만삭이
된 모델을 스튜디오로 불러 '희망 Ⅱ(Hoffnung Ⅱ·사진)'를
완성했을 때, 평론가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부
풀어 오른 가슴을 드러낸 채 커다란 배를 한껏 내밀고 서
있는 이 여인에게서 관능적인 매력과 신성한 모성애를
동시에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둘은 당시의 윤리
기준으로는 결코 양립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실 이 작품은 관능적이지도, 신성하지도 않다.
여인은 황금빛 배경을 뒤로하고, 따스한 원색이 화려하게
펼쳐진 문양 속에 파묻힌 채, 배 위에 얹어둔 회색 해골을
내려다보고 있다. 여인의 발치에서 두 팔을 들고 고개를
숙인 세 여인 또한 죽음의 상징이다. 클림트는 이 작품
을 통해 삶과 죽음이 끝없이 반복되는 무심한
자연의 섭리를 드러낸 것이다.
죽음의 공포마저도 매혹적으로 포장했던 클림트는 풍요로운
물질의 향연 속에서 암울한 종말을 상상하던 19세기 말 유럽
의 세기말적 분위기를 대표하는 화가다. 그러나 죽음 앞에 냉
정했던 그도 앞으로 태어날 새 생명 앞에서는
'희망'을 떠올렸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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