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이야기/부모와 형제자매

부모님의 기록

록야綠野 2010. 5. 15. 17:07

 

 

                                

 

            

 

 

 

 

 

아버지 류동탁(柳東鐸) 字 경필(警必)

                 1912년 2월 18일생 - 1928년 신후남과 결혼 - 1974년 11월 15일  별세 (음력) 향년 63세

 

  - 1932년 10월 10일 장자 大榮 출생 

                                         - 1936년 8월 10일 장녀 貞基 출생

- 1939년 9월 22일 차남 仲榮 출생 

- 1943년 8월 25일 차녀 信基 출생 

  - 1950년 11월 18일 삼녀 淑熙 출생 

 

                                                어머니 신후남(申後男)

               1912년 8월 15일생  - 1928년 류동탁과 결혼 - 2006년 9월 4일  별세 (음력) 향년 95세

 

                             先親 遺事

 

   부군(府君)의 휘(諱)는 동탁(東鐸) 자(字)는 경필(警必)이다.

 우리 류(柳)씨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완산백(完山伯) 휘(諱) 습(濕)을 시조(始祖)로 한다.

그 3세 휘(諱) 빈(濱)의 군호는 완원군(完原君)이고 조선의 태종(太宗) 과 동방급제(同榜及第)며, 영흥(永興)대도호부사를 지내고 증 가선대부(嘉善大夫)이조참판(吏曹參判) 행(行) 통정대부(通政大夫)로서 돌아가신 후(後)  릉(陵)을 봉(奉)했는데 영주(榮州)의 종릉(鐘陵)이다. 4세 휘(諱) 의손(義孫) 호(號) 회헌(會軒)은 집현전(集賢殿) 학자로 당시 집현전 3선생의 1인으로 칭송됐다.  9세 휘(諱) 복기(復起) 호(號) 기봉(岐峯)은 安東무실(水谷)에 터를 잡아 임란(壬亂) 때 안동(安東)에서 의병(義兵)을 최초로 창의(倡義)하여 7년간 많은 전과(戰果)를 거두었으며,   기양서당(岐陽書堂)을 창건하여 후손(後孫)이 공부하는 터전을 만들고 많은 덕업(德業)을 쌓았다.  10세 휘(諱) 지잠(知潛) 호(號) 용암(龍巖)은 선친(先親)을 따라 5형제(兄弟)분이 같이 사사(死士)를 자청(自請)하여 정유(丁酉)~무술(戊戌)(1597~98)년 방어사(防禦使) 곽재우(郭再祐) 휘하에서 화왕산성(火旺山城)을 守城했다.

부군의 5대조 휘(諱) 소휴(韶休)는 성균관(成均館) 생원(生員)이며, 고조(高祖)는 휘(諱) 혼문(渾文) 호(號) 한수당(閑睡堂)이고, 증조(曾祖) 휘(諱) 치덕(致德) 호(號) 근암(近庵)은 일찍이 우뚝한 실력을 갖추어 한들에서 문중의 대문(大文)으로 명망(名望)을 얻었다. 조부는 휘(諱) 진호(震鎬) 호(號) 대졸재(大拙齋)이며 아버지는  휘(諱) 효연(孝淵) 호(號) 묵와(黙窩)며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 병곡선생 구(榘)의 후예로 처사(處士) 준국(準國)의 따님이다.

  부군(府君)은 임자(1912)년음력 2월 18일 생이며, 한들에서 평생을 살았다. 마음이 깊고 무게가 있었으며, 입이 과묵(寡黙)했고, 유희(遊戱)를 즐기지 않았으며, 양지양능(良知良能) 하고, 어버이를 사랑하고, 형을 공경했다. 얼굴 모습이 덕성(德性) 스럽고, 성품이 너그러웠다. 한 마디 말과 한 가지 행동도 어른들의 사랑을 받지 않음이 없었다.

 8세에 족숙(族叔) 야사(野史) 공(公) 승춘(承春)에게 배웠는데 소미통감절요(少微通鑑節要)를 시작하여 대학(大學) 중용(中庸) 논어(論語) 맹자(孟子)를 섭엽 하고, 시경(詩經)을 읽었다.   분별하고 민첩하게 깨달음은 조금 늦었으나, 깊이 파고들어 연구하는 데는 여유가 있었다.

  글을 짓고  발표하는 데는 능하지 못하였으나, 행동으로 옮기고 실천 독행(篤行)하는 데는 어김이 없었다.  이는 어버이 섬기는 일에서 잘 나타났다.

  몸단장하는 것을 일삼지 않고, 오직 몸을 지키는데 힘썼다.  의복이 많아 여유 있는 것 보다는  마음속으로 꿈꾸어 이루고자 한  바에 어긋남이 있을까 두려워하였다. 일상의 행동을 공손하게 했고,  신체발부를 손상함이 없어 어버이가 근심하지 않게 했다.

   세상살이에서 어떤 일을 처리할 때는 진실(眞實)되게 하다가  이루지 못함이 있더라도, 교묘하게 겉치레로 그 일을 이루려고 획책하지 않았으며, 무능하다고 놀림을 당할지언정 자랑하고 현혹시켜 덕에 손상됨이 없었다.  경제적으로 利得이 되고 損害되는 사이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엉성하게 생각하는 면이 있어도,  일의 완급(緩急)은 반드시 자세히 살피며,  얼굴에는 포악하거나 거만한 빛이 없고, 행실에는 간사하거나 바보스럽지 않았다. 근거 없는 일에 동요되지 않았고, 유행에 달려가지 않았으며, 무사(無事)하다고 일을 발생시키지 않았고, 모르는 것을 안다고 말하지 않으며,  상고할 수 없는 말은 극히 조심하였고, 특히 쓸데없는 말을 싫어했다.

의(義)로운 것이 아니면 비록 얻은 것이라도 소유하지 않았고,  인(仁)을 당하여서는 비록 허비함이 있더라도 이를 계산하거나 비교하지 않고 쫓았다. 자신은 남을 용서하면서도 남에게 용서 받음이 없었고,  남이 자기를 저버릴지언정  자신이 남을 버리지 않았다.

  도량이 넓고, 경직되지 않고, 너그럽고 진밀한 인간관계를 가짐으로써 본보기가 되었다.

생활이 넉넉지 못했으나 지정 간에는 서로 나누었다.

무진(戊辰)(1928)년에 영덕군 신안면 묘안(山內)의 平山申氏 처사(處士) 세휴(世休)의 따님후남(後男)을 배우자로 맞아,  갑술(甲戌)(1934)년 봄부터 분가할 집을 지을 흙벽돌을 찍었다.

 그해 7월에 자친(慈親) 상을 당하고 어린 아이가 젖을 잃은 듯 애처로웠고, 장사(葬事)를 지낸 뒤에 두 누님은 시댁으로 떠나고 동생은 멀리 만주로 떠나고 가끔 동생의 편지를 받아 눈물로 읽었다.

 이듬해 분가하였으나 홀로계신 아버지를 위하여 조석(朝夕)으로  반찬을 만들어 보내고, 계절이 바뀔 때는 의복(衣服)을 마련했는데, 안타깝게도  己卯(1939)년 8월 추석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엄친(嚴親)을 잃었으니 그 슬픔은 형언(形言)할 수가 없었다. 유월장( 踰月葬)으로 10월 19일에 장사지낼 때까지 계속 殯所를 떠나지 않았으며, 朝夕으로 신흥곡(晨興哭)을 했고 3년 동안 喪服을 벗지 않았으며, 朔望에는 墓所를 살폈다.

 1940년 맏아들 大榮이 소아마비 증상이 가볍게 생겨서 동분서주하며 치료했으나 별 성과가 없었고, 이어서 어머니께서 不肖가 나서 첫돌 지나고 아직 수유기 인데 큰 병이 나서 반년이 넘도록 활동을 못했으나 성심으로 약을 써서 다행히 치료 했다.

 그 후로는 오직 백씨(伯氏)와 형제분이 의지하면서 풍상(風霜)과 日帝의 압박(壓迫)에 엎어지고 넘어지면서 살았다.

  을유(乙酉)(1945)년 광복의 기쁨도 잠시! 국토는 두 동강이 나고 좌익과 우익의 권력 쟁취의 피비린 싸움이 계속되면서 무자(戊子)  경인(庚寅)(1948~50)년 큰집은 공비의 야간 습격을 피하여 안동읍으로 피난을 떠나고 홀로 고장을 지켰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전면전이 발생 하여 7월 19일 안동역에 폭격이 감행되고 백씨(白氏)와 계씨(季氏)가 안동에서 한들로 돌아 왔으나 기거(寄居)할 집이 없어 셋집 식구가 모두 우리 집에서 기식(寄食)을 하였으니 더위와 모기 파리 보리방아 찧기 등의 고난이 심했다.

 밤낮으로 인민군들의 밥해주기와 수곡동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억지로 하라고 하니 거절했다간 어떤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워 직무를 회피하려고 다리에 상처를 내고 붕대를 감아 거짓환자가 되기도 하였고, 맏아들 大榮은 의용군에 차출되었는데 재치 있게 도망처서 화를 겨우 면했고,  부군께서는  군량미 운반에 노무자로 동원(動員)되어 청송 - 포항 경계까지 무거운 짐을 지고 가시는  등 당시의 생활은 표현하기 조차 어려운 모습이었다.  

 그해 9월 12일  UN군의 인천(仁川) 상륙(上陸)작전이 성공하면서 9월 28일(추석)에는 한들에도 인민군이 북쪽으로 퇴각하였으나, 부군께서는  인민군 점령 당시에  하기 싫은 수곡동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했다고 해서 안동경찰서 옥상에서 며칠 동안 구금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이때 안동읍(安東邑)은 온통 잿더미로 변했고 파괴와 오염 그 자체였다.

 . 1951 ~52 양년에는 가뭄이 심하여 먹을 양식이 없어서 초근목피로 겨우 연명하면서 자식 교육도 포기해야하는 참혹한 일을 당했다.<당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

 1960년에는 거처하던 흙벽돌집이 너무 부실하여 존고종 이세령씨의 사유림을 산판(山坂) 하는데 현장감독을 하신 대가(代價)로 재목(材木) 몇 차(車)를 얻어 가역(家役)을 시작하여 5간 반침의 반듯한 시멘트 기와집을 지어 입택(入宅)했다.

   1961년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고 국민재건운동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이어서 새마을운동이 농촌경제성장에 큰 힘이 되었다.

  남의 토지를 얻어 소작 농업을 하면서 일군을 고용하여 마늘농사를 하여 목돈을 쥐었고, 아들 형제가 직장을 얻으면서 가사가 조금 여유를 얻었고, 토지를 매입하여 영농규모를 조금 늘였다.

 1963년 不肖 軍에 입대하여 이듬해 병이 나서 6개월간이나 입원하고 수술을 하고나서 원대복귀를 했는데 그간의 마음고생이 심히 많았다.

  1973년 고혈압, 당뇨와 변비 등이 악화되어 몸이 몹시 불편했다. 안동성소병원에 입원 치료를 3회나 받고 한의원의 처방도 다방면으로 받았으나 병을 치료하지는 못하고, 갑인(甲寅)(1974)년 동짓달 보름날 향년 63세로 생을 마치시고. 같은 달 19일 선대의 정자(亭子) 뒷산 조부(祖父) 산소(山所) 계하(階下) 유좌(酉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오호 통재라! 부군(府君)께서는 조국이 일제(日帝)의 무력(武力)과 강압(强壓)으로 합방(合邦)된 3년 후에 나셔서 유교경전을 중심으로 공부하셔서  선비 대접은 받지 못하셨으나, 배운 것을 실천에 옮기는데는 누구보다 앞서셨다. 인성이 너그럽고 온화하며 부모에 효도(孝道)하고 형제(兄弟) 우애(友愛)가 돈독(敦篤)하셨고, 인간관계에서 신의가 있었다.

  초년부터 농사에 전념하지도 않아서 전문 농사군도 못되고  일군을 두고 상속(相續)받은 좁은 토지에다 소규모 농사를 하시니 경제적 여유는 없었으나  문중과 집안의 조상 받드는 일에는 빠지지 않았으며, 광복(光復) 후에 농지개혁으로 큰집 토지가 크게 줄어져서 큰댁에도 여유롭지 못하고 농력(農力)도 없어서 큰집 종형(從兄) 후영(厚榮)이 성인(成人)이 될 때까지 큰집농사의 대부분을 주관하시다 보니 일만 많고 실속은 없는 모습이었다. 

 선대 묘소의 상석을 놓는 일, 정자 건물의 노후 된 부분 보수공사 등에도 앞장서서 추진(推進)하셨고, 매년 겨울에 짚자리를 짜서 큰집 안방에 깔아 드렸다.  조상의 제수준비나 손님의 반찬을 걱정하셨고,  수박 한 덩이 국수 한 그릇도 큰집에 먼저 보내 드리고 나서야 잡수셨다.

  슬프다! 일제 때 어머님의 고종 一松 金東三 선생께서 상해 임시정부의 초대 國民 代表者 會議  議長을 하셨고, 백부님의 장인 碧山 金道鉉 선생은 영양(英陽) 영해(寧海)의 義兵大將을 하시는 등  항일(抗日) 정신이 남달라서 일제의 식민정치에 저항을 느껴서 신식(新式) 공부를 못하셨기 때문에 광복 후에 사회활동을 하실 기회를 얻지 못하셨다.

 애달프도다! 의료기술이 오늘의 수준으로 발전(發展) 했다면 그렇게 빨리 돌아가시지는 않았을 것이 아니겠는가?

  나의 선비(先妣)는 영덕(盈德) 뫼안(山內)의 평산신씨(平山申氏) 처사(處士) 세휴(世休 호 鶴下)의 따님으로 머리가 명석(明晳)하셨으며,  아내로서의 덕을 잘 갖추었다. 음식 솜씨와 길쌈 솜씨가 우수하셨고,  자녀교육과 가사 제반의 방향을 바로 잡는데 크게 기여하셨으며 선친께서 효도하고, 우애하고, 화목 하는 일에 크게 內助하셨다.  1912년 8월 15일에 나시어 2006년 9월 4일 향년 95 세로 작고(별세)하셨다.

  장지(葬地)는 부군(夫君)과 합장(合葬)이다.

 2남 3녀를 길렀는데 大榮 仲榮 貞基 信基 淑熙 이다.

 장남(長男) 대영(大榮)은 마골 재령이씨(載寧李氏) 병인(秉仁)과 결혼했고, 면사무소(面事務所) 촉탁(囑託)을 시작으로 중고등학교 행정실장(行政室長)과 안동교육청安東敎育廳) 학생도서관장(學生圖書館長)을 역임하고, 정년퇴임(停年退任)했다. 그의 아들 基正 은 崇實大學校 司書팀장 이고,  井山의 安東金氏 台淑과 결혼하여 아들 鍾允 , 딸 秀蓮, 秀慜(碩士)이 있고 秀蓮은 東福吳氏 求鏞과 결혼하여 외손자 吳丞祿 吳胤祿을 두었다.   맞딸 愛辰은 遠村 내삼리 眞城李氏 文聲 -<한솔 참마루 社長>과 결혼하여 아들 李胤龍 딸 李胤慶을 두었다,  둘째딸 玉奎는 忠南 公州 德水李氏 種奉과 결혼하여 아들 李慶烈 딸 李承嬉를 두었다.  셋째 딸 英藝는 慶北大學校 師範大學을 卒業했고, 大邱의 安東權氏 五均 -<會社員>과 결혼, 아들 權奇敏 딸 權奇恩을 두었다.  넷째 딸 美藝는 中等 漢文敎師이고 金泉의 慶州鄭氏 聖植-<哲學博士 敎授>과 결혼하여  아들 鄭昊庚 딸 鄭那淵을 두었다.  다섯째 딸 五辰은 國稅廳 公務員이다.

 차남(次男) 중영(仲榮)은 寧海 上原의 眞城李氏 大生과 결혼했고, 初等學校 敎師를 시작으로 교감을 거쳐 장학사(獎學士)와 校長을 역임하고 停年退任 했다. 맏아들 基漢은 KAIST에서 理學博士 學位를 받고 英國 런던의 Imperial College 內에 있는 Molecuer Vision 硏究所 責任 硏究員이고 서울에서 安東權氏 五慶 <中等 國語敎師>과결혼하여, 아들 旻錫을 두었다.  둘째아들 基絃은 서울大學校에서  工學博士 學位를 받고 美國 전자회사 AVAGO의 서울 硏究所 首席硏究員이며 大邱의 安東權氏 瑱淑(韓醫師)과 결혼하여.  아들 枝錫 딸 喜瑱을 두었다. <2018년 미국 얼바인의  Lyninan (모회사는 Necsen) 으로 직장을 옮김.>  셋째아들 基赫은 KAIST에서 理學博士 學位를 받고, 大田 大德硏究團地의 엔지노믹스EnzynoMics 硏究所長으로 安東에서 安東權氏  慧英(中等 科學敎師)과결혼하여  아들 範錫 딸 惠星을 두었다.  2012년 메디톡스로 이직했다. 맏딸 基珠는 首看護師 看護學 講師이며 서울에서 蔚津張氏 仁榮 <檢察公務員 法務士>과 婚姻.  딸 張智允 張智睿를 두었다,   둘쨋딸 恩英은 망천리 義城金氏 炳權<대한제당 次長>.<2017년 부장 승진>과 婚姻  아들 金時彧  딸 金叡志를 두었다

  장녀(長女) 정기(貞基)는 臨河의 義城金氏 시일(時鎰) <地方書記官. 安東市 保健觀光局長>과 혼인(婚姻)하여  맏아들 金鍾勳은 工學博士로 敎授 大學院長이며 金璜珠와 婚姻 아들 金璟洙 딸 金孝珍(碩士)을 두었다.  둘째아들 金鍾成은 工學博士로 敎授이며 李侖貞과 婚姻 딸 金恩珍 金瑾永을 두었다.   딸 明淑은  함양 朴敬春과 婚姻,  아들 朴憲益 朴憲震 딸 朴慧娟 을 두었다.

  차녀(次女) 신기(信基)는 영주(榮州)새내(砂川)의 達城徐氏 重九와 婚姻 하여, 맏아들 徐承鏞은 會社員이고 李 珍과 婚姻 아들 徐正源 딸 徐貞仁이 있다.  둘째아들 徐兌鏞은 舞踊學院長인데 金영랑과 婚姻하여 딸 徐智優가 있다. 맏딸 明淳은 간호과장이며 閔鎭基와 혼인 민경호 민지현을 둠.

둘째딸 仁淑은 석사 간호과장이며 吳世一과 혼인 오원석 오나영을 둠.

  삼녀(三女) 숙희(淑熙)는 寧海  安東權氏 虎基 <漢文學者로 成均館大學校 尊經閣 次長, 동아세아 연구소장>과 婚姻해서 아들 權在鉉 딸 權允姬 權明姬는 모두 會社員이다. 재현은 남동희와 혼인하여 딸 권지원 권시원이 있다.   

 오호 통재라! 세월이 흘러 부군께서 돌아가신지 36년이나 지났다.

돌아가시던 날 미세한 말소리로 伯父府君의 文集을 당신께서 손수 만들고 싶었는데...... 라고 하시면서 안타까움을 말씀하셨는데, 1997년 큰댁 종형께서 주선하여 上 下 두 권의 문집을 만들어서 숙제는 풀었으나 수(壽)를 오래하지 못하면서 하시고 싶었던 일이 어디 그일 뿐 이었겠는가?

 세월이 점점 멀어지고 날로 잊어버려서 기록할 자료를 찾던 중 伯父府君께서 남기신 祭文을 살피고 가느다란 기억을 살려 평상시에 보고 들은 만 분지  일이라도 우리 同氣와 子姪들에게 비슷하게나마 전해지기를 바라면서 不肖한 아들 仲榮은 눈물로 삼가 씁니다.        - 2011년 현충일에 -

 

                         

             

            先妣 孺人 平山 申氏 行略

 

   어머님의 申氏이고, 後男이다. 本貫平山이며 高麗 開國功臣 申崇謙13世 孫文正公 申 賢(耘谷 元天錫 先生의 스승 寧海君)을 중시조로한다.

   祖의 휘는 泰永 이고 祖母英陽 南氏 崑壽의 따님인데. 딸 일곱분을 길러 명문대가로 출가 시키고,

七女歌를 지었다. 世休. 鶴下이며 향중의 큰 선비로 명이 나셨으며, 큰 살림을 은행에

담보물로 제공하고 돈을 빌려 독립운동자금으로 비밀리에 보내고 1931년에는 세계경제대공황이 오면서

부동산가격이 급속히 떨어지고 담보물로 제공된 전재산은 은행에서 압유경매처분하는 바람에 일시에

빈민이 되었으나 조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으며 큰 기와집을 빼앗기고 삼간두옥에서

떳떳하게 운명하신 분이시다.

   前妣武安朴氏 處士 載衡의 따님이고 后妃英陽 南氏 處士 진수(鎭壽)의 따님인데 어머니는

后妃 소생이다.

   어머니깨서는 1912(壬子)년 음력 815일에 盈德郡 新安面 山內里(묘안)에서 나셔서 6세에 공부를

시작하여 한지에다 外曾祖母께서 지은 七女歌尊姑母를 대신하여 外祖父께서 쓰신 기천가 등을

붓글씨로 옮겨 쓰면서 한자공부도 같이 하셨는데 문자해독이 빠르고 글씨와 문장력도 좋아서

22년이나 빠른 오라버님의 많은 칭찬을 받았다.

    외조모님의 언문과 음식 솜씨와 길쌈하고 바느질하는 女工之事를 거침없이 능숙하게 배워서 어른들이 놀라워했다.

  16(1927)에 아버님(柳 東鐸)과 혼인하여 17세에 안동 한들로 신행을 오셨는데 시부모님께서 많이 사랑해 주셨고, 특히 아버님 3형제분의 스승이신 野史 柳承春 公이 어머니의 姑從이시고,

내앞의 姑從 一松 金東三 선생께서는 만주 독립군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셨고, 상해 임시정부의

國民代表者會議 議長을 지내신 분이어서 향중의 존경을 받는 분이었기에 큰 힘이 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어머님의 인품과 솜씨가 돋보여서 집안 어른들이 모두 좋아했다.

   어머니께서는 20 전에 시댁에 오셔서도 어떤 일에도 못한다고 하시질 않았다.

모르는 것은 배워서 하면 된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밭에다 목화씨앗을 심어 100여번의 손길을 주어 가꾸고 거두어 목화를 장만하여 실 뽑고 베 날아서

풀 먹여 베 매고 베 짜는 과정이나 대마씨를 뿌려서 가꾸어 그 껍질을 수없이 손질하여 삼베를 짜고

뽕나무를 가꾸어 누에를 쳐서 얻은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서 명주를 짜는 일과, 길쌈에서 얻은 옷감을

염색하고 푸새하여 옷 만드는 일들은 어렵고 힘들고 잠시도 쉴 틈이 없고, 잠잘 시간도 없었지만 어머니는 그 많은 일들을 두레를 하고 품앗이를 하면서 거침없이 다 해내시고, 방아찧고, 100m가 넘는 우물에서

물 길러 밥해먹고 빨래하면서도 우리 5남매를 남들 못지않게 길러냈다.

   음식 솜씨도 그랬다. 모든 음식의 바탕이 되는 장맛이 좋기로 알려졌으며 엿이나 약과나 유과 만들기, 술이나 감주 빗기 일상에서 먹는 비빔밥도 맛이 좋아서 매년 정월에 마을 사람들의 윷놀이도 우리 집에서 열었다.

시부모님의 상을 당해서도 상복을 만드는 일부터 복잡한 상례를 수행함에 있어서 예절에 어긋남이 없었으며아버님께서 孝道하고 友愛하고 和睦하는 일과 빈객을 맞아 대접하는 일에서부터 농사짓고 소 기르는 일에까지 어머님의 內助가 진실로 컸다고 생각된다.

     1940년에는 큰 병이 나셔서 몸을 움직이지 못하면서도 첫돌 지낸 不肖를 배 위에 올려놓고 돌보셨으며, 우리 5남매 키우면서 작고 큰 병을 손수 약을 달여 먹여 치료 하셨다.

   1937년 중일전쟁부터 제 2차 세계대전의 혼란기에 일제의 착취와 광복 후 민족혼란기와

19506.25 한국전쟁의 과정에서 겪은 고생은 이루 形言할 수 없는 수준임을 선친 유사에서

밝힌 바와 같고, ‘51 ~ 52 양년 흉년은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몸부림이었다.

  1960년에는 불편하게 살았던 토담집을 뜯어내고 새로 다섯간 반침의 목조 시멘트 기와집을 지어

입택하고   5.16 군사혁명 이후 경제개발이 시작되면서 아들 형제가 직장을 얻고, 소작농을 면하는 수준에 이르렀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당하셨으니 1974(갑인)년 아버님의 별세였다.

   평생을 전란과 빈곤에 허덕이면서 경제적인 여건이 너무나 열악하여,

자신을 위해서는 불고기 한 번 못해 드시고, 의료수준도 너무나 열악하여 현대적인 예방이나 치료는 생각지도 못해 보신 채 돌아가신 그 한스러움을 평생토록 가슴에 담고 계셨다.

   오호 통재라! 선친께서 해로하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고!

 

   어머님께서는 관찰력이 우수하여 제주도 관광 후에 관찰하신 火山地形의 특징에 대하여 不肖에게 많이 질문하셨는데 그 수준이 高次的이었다.

   기억력이 출중하여 90세 이후에도 처녀 시절에 암기하신 가사 3~4편을 유창하게 암송하셨으며, 모든 일에서 판단이 정확하셨다. 젊을 때 친정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던 것을 애석해 하시면서 外祖父母外三寸 祭祀에 작은 정표를 하시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항상 용의를 깨끗이 하여 품위를 손상하지 않았고, 밝게 웃는 표정을 유지하셨다.

 친구분과 명쾌한 의사소통을 했으며, 자신의 위치를 돈독히 하여 주변 사람의 신망과 존경을 받았다.

   2005226일 거쳐에서 넘어져서 안동병원에 입원하여 고관절 골절 진단을 받고, 228일 인공관절 수술을 받은 후 35일만인 43次男 仲榮의 집으로 퇴원하여 실내에서 걷기 보조구를 이용하여 거실을 100바퀴씩 돌면서 걷기운동을 열심히 하시어 건강을 유지하였으나, 연세가 높으셔서 정신이 혼미하여 정상이 아닌 행동을 보이는 때도 간혹 있긴했다.

   슬프다!   2006924일 새벽에 화장실에서 넘어져서 2차 고관절 골절이 발생하여 929일 인공관절 수술을 하시고 병실에서 고생하시다가 욕창이 심해지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하였다.

2006(丙戌)1025(음력 94)에 별세하시니 享年 95세이다. 102832년이나 먼저 가신 아버님 산소에 합장했다.

자손에 관한 기록은 선친 유사에 기록하였기에 생략한다.

 

  맏아들 大榮이 앞들에 논을 사서 좋아하셨고, 서울에 3층 집을 산 것을 기뻐하셨으며, 徐室이가 아파트에 이사가고, 權室中溪洞 아파트에 초대받아 대접 잘 받은 것을 자랑하셨다. 基正이 매사에 흐트러짐 없이 착실하고, 基漢3형제가 박사학위를 받은 것을 기뻐하셨는데, 이런 기쁨은 어머님의 우수한 유전인자와 바르고 정직하며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으로 가르쳐 주신 올바른 교육의 결과라고 생각된다.

   어머님 돌아가신지 5년이 되었고, 날로 기억이 흐려지는데 그간에 형님께서 돌아가시니 이에 작은

기억을 더듬어 평생의 이력을 만분지일이라도 동기와 자질들에게 전하고자 不肖 仲榮은 눈물을 흘리면서 짧은 글을 마무리 한다. - 2011.6.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