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카펠라
아 카펠라
여류수필가 윤 상 희(12사우 대구회원)
나팔꽃이 트럼펫을 부는 아침이다. 새벽 길 걷는 사람이 첫 이슬을 턴다고 했던가. 길게, 그리고 깊게 숨을 들이 마신다. 숲을 헤집고 쏟아지는 아침 햇살과 산새 소리, 인적 없는 숲길을 걷는다. 사부작사부작 걸어가는 발길에 싱그러운 바람의 냄새가 묻어난다.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 소리는 혈관을 타고 내 몸 전체로 오케스트라의 조화로운 음을 들려준다. 오케스트라의 생명은 각 악기가 내는 음률의 어울림에 있다. 악기들은 개성이 뚜렷한 자기의 소리를 내지만 전체 소리는 어긋남이 없이 부드러운 화음으로 살아 숨쉰다. 온갖 새들이 찾아와 제각각의 노래를 부른다. 하나도 혼란스럽지가 않다. 숲에 들면 영혼을 어루만지는 자연의 소리에 순화되어 마음은 깊어지고 삶은 활력을 느끼게 된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바람이다. 숲은 온갖 새들과 풀벌레들을 불러 모아 품으며 각양각색의 음률과 음색을 조율하고, 자연의 코러스를 들려준다. 그것은 아 카펠라다. 단 한 번의 연습도 없었을텐데 서로의 믿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무반주로 부르기 때문에 어느 한 마리의 새소리라도 음정이 흔들리면 합창은 와르르 무너지기 십상이다. 그런데도 어디쯤에서 소리를 내야 하는지를 직박구리, 뻐꾸기, 찌르레기까지도 높고 낮은 환상적인 어울림을 만들어낸다.
바람이 엮어내는 코러스는 경건하기까지 하다. 화음은 물론이고 리듬감까지도 보석처럼 빛난다. 나뭇잎에서 나뭇잎으로 건너가는 빗방울이 새들의 소리를 타고,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순한 말들을 옮기는 바람의 혀는 조곤조곤 오래된 시간의 악보를 가지 끝에 내걸었다.
바람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노라면 아버지가 들려주던 합창곡이 멀리서 은은하게 들려온다. 아버지는 아 카펠라를 지휘하셨다.
악보도 반주도 없는 소리를 잘도 엮어 내셨다. “간다. 간다. 떠나 간다. 문전 옥답 다 버리고 .......” 행상(行喪)이 나갈 때 머리 부분에서는 망자의 구겨진 삶을 굽이굽이 펼쳐내어 듣는 이의 가슴을 시리게 했고, 이어지는 뒷부분에서는 자식들의 안타까움을 구슬프게 풀어내어 남은 자들의 애간장을 후벼 팠다. 상여를 메고 가는 상두꾼들도 휘청거렸다. “어허~어 어허~어 어화 넘자. 어허~어” 슬프고 애잔한 상엿소리는 긴 여운을 남겼다. 길 옆에 늘어선 조상객들까지도 망자와의 아릿한 배웅으로 자리를 뜨지 못했다. 아버지가 선소리를 매기면 상여를 맨 상두꾼들은 추임새로 화답했다. 화음은 그 어떤 악기로도 흉내 낼 수 없는 천상의 합창이었다. 대본도 없는 대사를 한 순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잘도 이어갔다. 나는 그런 아버지가 부끄럽고 싫었다. 하필이면 저승길을 안내하는 일에 왜 앞장을 설까 원망스러웠다.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아버지께 여쭈어 보았다. 어떻게 아버지는 가신 분의 일생을 훤히 꿰고 계시느냐고. 다시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아버지의 대답은 의외였다. 사람의 저승길은 매한가지라고. 다시 돌아올 수 없기에 누구든 먹먹하고, 모든 사연들을 풀어내고 가야 그 길이 험난하지 않을 거라고 . 망자의 걸음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질 수 있도록 아버지가 도와주신다고.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왈가왈부하지도, 생존에 집착해야 할 이유와 의미도 공허하다. 다시는 세상을 줍지 않아도 좋다. 평생 하늘을 향해서라도 큰 소리 한 번 제대로 질러보지 못한 삶의 남루와 회한도 모두 내려놓고 훨훨 날갯짓으로 오를 수 있도록 염원을 담아서 빌어드리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 때는 너무 어려서 당신의 말씀이 무슨 의미를 지녔는지 잘 알아 듣지도 못했다.
봉분을 만든 후 꼭꼭 밟으며 달구질하는 구슬픈 소리에 산천도 울고 나무도 흐느꼈다. 이름 모를 새들도 날아와 아 카펠라는 세상 어떤 진혼곡보다도 깊게 새겨져 있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한(恨)을 토해내는 아버지의 얼굴은 꾸밈없고 참되었다. 아마도 천국의 문을 두드리는 의식이 아니었을까.
바람에는 마음이 있나보다. 바람이 슬픈 마음이 들 때면 촉촉한 눈물을 여름비에 담고, 이 산 저 산 나무를 정처 없이 걸으며 운다. 바람은 내 가슴에도 비를 뿌린다. 세월은 흘러 아버지도 숲의 품에 안기셨다. 이제 당신도 바람이 되어 나뭇가지 끝에서 화음을 만들고 계실 것만 같다.
외롭게 선 한 나무가 보인다. 이정표처럼 서 있는 늙은 오동나무가 꼭 아버지를 닮았다. 오동나무는 천년을 늙어도 그 음률은 간직한다고 했던가. 수줍은 뱀딸기처럼 어느 틈에 꿈꾸듯 나도 기대 앉아 있다. 기억의 갈피 속에 숨었다가 잊었다 싶으면 고물고물 기어 나오는 , 속 깊이 묻어둔 아픔들이 선명하게 돋아난다. 지워지지 않는 기억의 언덕배기에 서 있는 오동나무. 깊게 생긴 흔적이 가슴을 휘젓고 지나간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다시 천천히 걷는다. 소나무 숲이 이는 솔바람 소리에는 신비로움이 가득하다. 온 세상을 잠재울 듯 무아의 경지로 스며들게 한다. 근원적 안락함이라고 할까. 엷은 바람과 마주하면
흐르지 않는 시간이 거기 있다. 분명 때 묻지 않은 청아한 솔바람 소리는 욕망의 사단(四端)을 부뜰어 매고 찌든 마음을 추스르게 하는 힘을 지녔다. 성찰의 바람이 등을 스친다. 바람이 만들어내는 하모니 속에서는 비참과 죽음까지도 넘어서는 생명의 강렬함이 전해져 온다. 그 순수한 숨결은 감히 희열을 느끼게 하는 행복감으로 출렁인다. 그것은 천국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노래인가 싶다.
별난 딱따구리의 부리도 음악이 되어 장중한 자연의 아 카펠라에 더해진다. 나는 들풀처럼 솔바람에 등을 기댄다. 조심스럽게 내 노래도 얹어본다.
바람이 적어 보낸 나뭇잎 악보가 어깨에 배달된다.
(2018 경북일보 문학대전 입선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