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시와 (사)기산충의원(이사장 류목기)이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을 한 안동지역 인물을
재조명하고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한‘안동충의역사체험장’이 2016년 10월 8일 오전 11시 문을 열었다.
안동충의역사 체험장은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산62번지 일원의 5,000㎡
부지에
35억원의 예산으로 지난 2013년 3월에 착공해 2015년 5월에 준공했으며 사당과
강당,
동·서재,
문루 등의 건축물과
역사교육관과 교육체험관 등이 있다.
이날 안동충의역사 체험장 개원으로 우리 역사
속에 큰 고비인 임진왜란에 의병장 활동을 한 기봉 류복기를 비롯한 호국선현에 대한 재조명과 충의역사의식 제고에 도움이 될 것으로 전망되며 주변
임하호의 수상레저 관광과 연계한 관광벨트화로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기산충의원 충의사에 배향된 인물*** (1) 류복기(1555~1617) 류성(柳城)의 장자(長子)로서 자는 성서(聖瑞), 호는 기봉(岐峯)이며, 외조부는 청계 김진(靑溪 金璡), 외숙(外叔) 김성일(金誠一)의 문인(門人)이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한 뒤, 6월 초1일 안동지역에서 제일 먼저 동지들을 모아 창의하였는데 그 당시 나이 38세였다. 공이 기록한 임란 창의록에 임란 초기의 중요 활동이 기록되어 전해오고 있다.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향중에서 죽기를 각오한 선비[死士] 를 모집하였는데, 장남 우잠과 차남 득잠이 배행하겠다고 나서자 3남 지잠, 447) 누문(樓門) : 다락집에 있어서 그 다락 밑으로 드나들게된 문(門).고직사(庫直舍) : 사당 또는 서원의 제반 업무를 관리하고 식사를 준비하기 위한 건물.남 수잠, 5남 의잠도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분기하여 참전하였다

이에 따라 아들형제를 모두 대동하고 창녕군 화왕산성의 방어사 곽재우 장군 휘하에 합류하여 성을 지켰다. 전후(戰後)에는 흉년이 겹쳐 굶주린 사람들이 거리에 가득하였는데, 길가에 가마솥을 걸고 죽을 쑤어 많은 사람을 구휼하였다. 공은 광해9(1617)년 2월 사복시정에 제수되었으나 노환으로 그해 3월 22일 별세(別世)하였다. 그후 숙종19(1693)년 10월 5일 손자 류지(柳榰)가 경주부윤이 됨에 따라 승정원 좌승지에 추중되었고, 고종30(1893)년 8월 이조참판에 가증되었다.

(2) 류복립(1558~1593) 자는 군서(君瑞), 호는 묵계(墨溪), 기봉공[류복기]의 아우이다. 1588년 무렵 큰댁인 한성우윤 류윤덕(柳潤德)의 아들 참봉 류지(柳墀)의 양자(養子)로 출계(出系)하였는데,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35세 나이에 무실에 있는 생가(生家)의 형님댁에 가솔(家率)을 의탁하고 형님 류복기를 따라 창의하였으며, 이어서 외숙(外叔) 학봉 김성일 선생을 따라가 참전하여 사천, 고성 등을 수복하였다. 1593년 4월 29일 학봉공이 진주성에서 순국(殉國)할 때 공에게 수성(守城)을 부하자 창의사 김천일, 복수장 고종후, 경상우병사 최경희 등과 힘을 합하여 성을 사수하기로 맹세하였다.

60여일의 항전 끝에 진주성이 함락되자 김천일, 고종후, 최경희 등은 모두 강물에 투신 자결을 하였고, 주부(主簿)로서 수문장을 한 공(公)은 오직 단신으로 칼을 들고 적에게 달려들어 분전하다 36세 나이로 같은해 6월 29일 순절하니 향년 36세이다. 그후 숙종45(1719)년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영조5(1729)년에 정려가 내려졌으며, 순조2(1802)년 진주 창렬사에 추향되었다. 고종29(1892년에는 이조판서에 가증되었다.

(3) 류우잠(1575~1635) 기봉공[류복기]의 장자(長子). 자는 상지(尙之) 호는 도헌(陶軒)이다. 1592년 임란시 부친 기봉공이 6월 초1일 안동에서 가장 먼저 창의하고, 8월 20일 안동열읍향병의 참모로 참전하자 당시 18세의 나이로 부친을 따라 상주, 예천, 경주의 의병 진영에서 활약하였고,

1594년 팔공산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창녕의 화왕산성을 수비하였다. 그후 병자호란 때 1636년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후금의 만행에 비분강개하였고, 삼전도굴욕 이후 후진을 양성하면서 의기를 실천하였다. 1606년 영가지(永嘉誌)를 만들때도 권기(權紀)와 함께 안동 선비 10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4) 류득잠(1578~1652) 기봉공[류복기]의 차자(次子). 자는 열지(悅之), 호는 연암(燕巖)이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15세의 나이로 부친 류복기와 형 류우잠을 따라 창의하였고 팔공산 회맹에도 참가하였다. 정유재란 때도 부친을 따라서 화왕산 수성에 참가하였다. 전후에는 부친과 함께 기민들을 구휼하는데 힘썼다.

(5) 류지잠(1583~1653) 기봉공[류복기]의 3자(子). 자는 회지(晦之), 호는 용암(龍巖)이다. 정유재란 때 부친이 사사(死士)를 모집하고 두 아들 우잠, 득잠을 이끌고 창녕 화왕산성으로 향하니 공은 당시 15세의 나이로 떨치고 일어나 함께 따라 가기를 주장하여 부형(父兄)의 허락을 받고 화왕산성 수비에 참여하였다. 당시 진중에는 도내(道內)의 창의명사들이 모두 모였는데, 그는 어린 나이에 참전하였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하였다.

(6) 류수잠(1585~1662) 기봉공[류복기]의 제4자(子). 자는 양지(養之)이다. 정유재란 때 13세 나이로 부친과 백형 류우잠 등 제형을 따라 창녕의 화왕산성 수성에 참여하였고 전후(戰後)에는 부형들을 도와서 기민규휼에 힘을 썼다

(7) 류의잠(1588~1644) 기봉공[류복기]의 제5자(子). 아명(兒名)는 낙잠(樂潛), 자는 의지(宜之)이다. 정유재란 때 10세의 어린 나이에도 부친과 백형 류우잠 등 제형을 따라 창녕의 화왕산성 수성에 참여하였고, 전후(戰後)에는 부형들을 도와서 기민구휼에 힘을 썼다.

입구 기영루도~~

각처에서 보내온 화환도~~

문중에서 안내와 꽃을 달아 주고~~ 
우리가락으로 눈을 즐겁게 해주고~~

멋진 우리춤을~~
<관련사진>
| ▲ 권영세 안동시장
개원사
開 院 辭 歷史에 길이 빛날 柳門의 나라사랑이여 안동충의역사체험장 건립은 나라사랑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절절하게 보여준 柳門 일곱 분의 귀감을 이땅에 백세의 사표로 우뚝 세우는 뜻깊은 일입니다. 이 일에 발 벗고 나서신 기산충의원 류목기 이사장 님과 류승우 종손 등 많은 분들의 노고에 감사를 드립니다. 왜적의 소총에 놀란 조정은 피란길에 올랐고, 宗廟와 社稷을 최전선에서 지켜야 했던 장수마저 산중으로 숨어들어 목숨 부지하기 급급했던 참화의 시절에 오로지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憂國衷情의 일념으로 온 가족을 데리고 전쟁터로 나아간 岐峯 先賢 가족 분들의 義로움은 당대는 물론이고 동서와 고금을 둘러보아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고귀한 나라사랑의 발걸음이었습니다. "전투경험도 없는 우리들이 맨 주먹으로 분을 내어 무슨 소용이리요 마는, 나라 일이 이지경에 이르렀으니 성패 강약을 헤아릴 일이 아니다." 岐峯 先賢 께서 죽기를 각오하고 의병을 모집하자 장남 友潛 차남 得潛 삼남 知潛 사남 守潛 오남 宜潛 五兄弟와 동생 復立이 분기하여 참전하였으니 이때 오남 宜潛은 거우 열 살이었습니다. 조상에 대한 절대 의무인 대를 이어 제사를 받들어야할 혈손 모두를 참화의 전쟁터로 데리고 갔다니 지금도 놀란 가슴을 진정하기가 힘이 들 지경입니다.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보니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고개 숙이며, 尊崇의 마음을 더할 따름입니다. 감히 岐峯 육부자와 兄弟 분의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거룩한 憂國衷情 앞에 어느 누군들 공손하게 두 무릎을 꿇고 고개 숙여 절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러한 위대한 선현이 있었기에 壬亂 칠년전쟁에서 기어코 승리할 수가 있었으며 이 정신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역사왜곡, 북한의 핵 위협 등 역사의 고비마다 나라를 지켜내는 힘이 되고 있습니다. 천만 번 되돌아보고 보아도 가슴에 담고 담아야 할 위대한 선현의 빛나는 정신을 되새기기 위하여 건립된 안동충의역사체험장이 우리 시민들과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忠義思想을 익히고 배우는 터가 되는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기를 기대합니다. 다시 한 번 오늘이 있기까지 고생하신 관계자의 노고에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우리 선조들의 위대한 충의정신이 안동충의역사체험장에 가득 서려지고, 누대에 걸쳐 빛나는 정신으로 찬연히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2016. 10. 8. 안동시장 權 寧 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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