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부 유사
祖父 遺事
府君의 諱는 효연(孝淵), 字는 순여(舜余) 호는 묵와(黙窩)다.
우리 柳씨의 본관은 전주이며, 완산백 휘 습(濕) 을 상조로 한다. 그 3세 휘 의손(義孫) 호 회헌(會軒)은 집현전 학자로 뽑혀서 당시 집현전 3 선생 중 1인으로 칭송됐다. 9세 휘 복기(復起) 호 기봉(岐峯) 은 무실(水谷)에 처음으로 터를 잡아서 덕업을 쌓았다. 14세의 휘 화현(和鉉) 호 송음(松陰)은 은덕 (隱德) (숨은 덕)을 쌓았다. 두 아들 중 장자 충원(츙원)의 차자 소휴(韶休)는 성균관 생원인데 후사가 없었다. 숙부 민원(敏源)이 재종숙부 지현(至鉉)의 양자로 갔는데 그의 아들 정휴(廷休)는 종숙부 연원(淵源)에게 양자 가서 그의 아들 혼문(渾文)이 또 우리 집 生員公의 양자로 되돌아왔다. 그의 아들 휘 치덕(致德) 호 근암(近庵)은 일찍이 우뚝한 실력을 갖추어 한들(大坪)에서 문중의 대문으로 명망을 얻었다. 그의 아들 진호(震鎬) 관호(觀鎬)가 있었느데, 부군(효연)께서는 관호의 아들로 백부 진호의 양자로 가통을 이었다. 양어머니 의성김씨는 칠봉선생 희삼(希參)의 후예로 진사 호수(浩銖)의 따님이다. 또 생모 의성김씨는 청계선생 진(璡)의 후예로 장진(長鎭)의 따님이다.
府君은 고종(高宗) 병자(丙子)(1876)년 3월 17일 생이며 어릴 때는 한들에서 살았다. 심중(深重마음이 깊고 무게가 있음) 과묵(寡黙입이 무겁고 말이 적음)했고, 유희를 즐기지 않았다. 8세에 취학하여 족형 대유(大酉)公 연각(淵覺- 동암 류장원 선생의 주손)에게 배웠는데 말이 둔하고 깨우침이 늦었으며 불리하면 입을 열지 않았으나, 깊이 탐구하며, 생각이 깊었고, 공부하는 모습이 근면(勤勉)했다. 대유공 께서 말씀하시기를 서로 다른 것을 의논할 때는 예사롭지 않다고 했다.
임진년(1892) 혼인을 하여 처가 의 장정들이 심하게 장난질을 할 때에 논의가 상서롭지 못하고 큰 소리로 웃고 떠들며 윽박질렀으나 부군께서는 여유롭고 침착하게 공손히 대답하여 자신의 인격을 단 한 번도 손상하지 않고 어른스럽고 무게 있는 모습을 보였으므로 모두가 존경하고 사랑(敬愛)했다.
을미년(1895)에 안동 향중에 의거가 있었는데 공은 營中에서 군사들의 동태를 살피는 임무를 수행하는 날 종사자 모 씨가 옥경(玉鏡)일좌를 사(私)적으로 가지라고 주었는데, 부군께서는 공손한 말로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 사람이 말씀하기를 내가 잘 못했다. 하고는, 이 어찌 20세의 약관으로서 능히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라고 감탄했다.
갑진년 (1904)에 대유공(스승)이 세상을 떠났다. 이에 한 두 동지와 더불어 전(奠)을 올릴 때에는 반드시 스승을 섬기는 성의를 한 결 같이 하면서도 여유로운 시간에는 학문을 다듬는 일을 버리지 않았다.
을사년 (1905)에 생가 사랑채가 무너지고 기울어지는 환란이 생겼다. 이에 생양가 두 어른께 계책을 상의 드려서 집을 바로 세우고 지붕은 기와를 걷고 이엉으로 덮는 등 크고 작은 뼈대가 되는 일은 모두 부군께서 밤낮으로 성심을 다한 결과 반듯한 집이 되었다.
기유년(1909)년 양가 아버님께서 갑작스럽게 상을 당한 후에는 초종(初終)의 의례를 극진하게 삼가고 성심을 다하였다.
삼년 내도록 상복을 벗지 않았으며 대 지팡이를 짚고 집 밖을 나가지 않았다.
기미년(1919) 에는 불초(不肖자신을 낮추는 말)가 전신에 부스럼(담종)이 십여 군데나 생겨서 그 고통이 저승을 드나들고 상여가 출몰하는 등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몸의 안팎을 불태우는 고통으로 황황이 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부군께서는 만나고 따를 만한 의원을 찾아내었으며, 무서워서 떨었고, 언사와 안색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에 힘입어, 털끝만한 희망으로 집안의 모든 사람이 정성을 다하였기에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병인년(1926)에 생가 아버님께서 반년이나 병석에 계시니 미음과 약을 조절하여 공급하고 보살피고 상태를 점검 하는데 마음을 조이면서 애쓴 것이 해포나 되었으나, 결국에는 자식으로서 부모를 사모하는 형상에 이르렀다.
갑술년(1934)에 또 어머니 상을 당하였다. 근심하고 슬퍼하는 한결같은 정성이 아버지 상을 당했을 때와 같았다.
상기(喪期- 27개월) 내도록 스스로 훗날을 생각하며 오로지하는 정신으로 책상을 대하였으니, 이는 책 읽는 소리만 내고 자기주장을 앞세워 기어이 하려고 기를 쓰는 당시의 보통사람과는 같지 않았다.
집 근처의 여염집 사람들이 얼굴을 못 봤다는 사람이 많았다.
기묘년(1939) 8월 15일 향년 64 세로 돌아가시어, 10월 19일 선대 정자 뒷산 해좌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오호 통재라! 부군께서는 침착하고 중후한 성품과 어질고 착한 덕(德)에 삼가고 후덕한 행실에다 정교하고 독실함을 더하였다는 공명을 일찍 부터
떨쳤고, 물질을 떠나서 학문과 사람으로써 떳떳이 지켜야할 도리에 독실한 언행과 서로 조화를 이루려고 부지런히 힘쓰는 모양으로 양쪽 부모님을 사랑과 존경을 갖추어 기쁘고 즐겁게 해 드렸다.
양쪽 집 세 동생 은 10년 20년 아래인데도 하나로 아울러서 우애를 잃지 않도록 진정하여 편안하게 하였다.
여러 누나와 여동생이 친정에 와서 수 삼년, 5. 6년 동안 머물렀다.
나의 고종자매 여럿집이 당시에 불쌍히 여겨 은혜를 베풀었던 일을 오늘날까지도 못 잊겠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생가 매부도 초년에 해마다 살림을 싸서 옮겼는데, 반드시 찾아가서 문안하고, 부탁하는 것에 응했다.
두 외숙부 집에도 흉년에는 어려움을 구원했다.
진휼하는 데는 대개 스스로의 인정으로 도와줄 마음이 솟아나서이고, 여유가 있어서 한 것은 아니다.
종조와 종숙(계곡으로 양자가신 근암 할배 아우 치락(致洛)의 아들과 손자)께서 일찍 돌아가시고 후사가 없어서 동생(學淵)으로 하여금 대를 잇고 제사를 받들게 했다.
선조를 받드는 일에는 정성과 공경을 다했고, 사람을 접하는 데는 두루 인정과 사랑을 쏟아다. 이웃과 마을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웃에 비상(非常) 급난(急難시급한 어려움)이 있으면 반드시 곡절에 따라 빠짐없이 나누어 주는데 오히려 주머니가 작은 것을 한하였지만, 능히 큰 부자 되는것을 그리워하진 않았다.
경술(1910)년 나라의 사직이 망하고 나니, 선비의 큰 숲이 질펀한 늪에 빠진 모습이고, 학문과 덕행이 높은 선비는 국권 회복에 나섰지만, 구차하게 목숨이나 보전 하면서 만족하는 세상 사람이야 말로 통탄 통탄할 모습이었다.
특별한 일이 없고 집에 찾아오는 손님이 없는 시간에는 종군(宗君) 선원(鮮原) 정희(鼎熙)씨(무실 종손- 일본의 압제에 굴하지 않고 꾿꾿이 맞섰다)와 족형 야사(野史) 승춘(承春)씨(우리집 선친 3형제분께서 모두 이 어른에게 배웠다)와 더불어 험한 세상에 허물없이 상의할 만한 사람들이 매월 1회 종가 사랑에 모여, 막힌 울타리를 열고 서로 사귀면서 수련에 힘쓰는 아름다운 소리의 울림과 은밀하고 깊이 근심하고 오래도록 즐거워할 자취를 남기면서 두루 사귀었다.
이때 벽산(碧山) 김공 도현(道鉉)이 마침 찾아와서, 한 방의 선비들이 집일과 신도등지(新都等地당시에 충청도 계룡산도읍지에 관한 말이 많았고 그곳을 찾아가는 사람도 많았다)의 분분한 질문을 했다.
부군이 말씀하기를 지금 이 거사는 김 공께서 부인의 상기를 마치지 않았고, 또한 남의 입에서 구할 수 있는 대답이겠는가? 했다.
벽옹이 말씀하기를 과연 그렇습니다.
하루는 외사촌 오인(五寅)이 와서 조선일보에 실렸는데 현재 중화(中華) 총령(總領)이며, 당세 정치의 1인자인 모씨가 부인의 화장대 값으로 몇 만원을 지불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부군께서 한숨 쉬며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이와 같은 무리의 사람을 알고 대공(大功)과 대업(大業)을 이루고자 한다면 이것이 진실성이 있는 일인가? 필경에는 몸을 맡길 나라도 없이 제비처럼 한가로이 색색으로 채색하여 영롱하고 찬란한 저녁노을을 즐기는 모습이구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근래에 놀러 다니는 젊은이들이 겨우 서울의 궁궐에 가서 한껏 사치를 하고 끌신을 끌면서 섬돌 사이를 이동하지도 않으면서 스스로는 삼라만상을 다 관광 했다고 떠들고 있다.
너희 젊은이들은 깊이 삼가는 마음도 없이 사물을 구경이나 하는 모습에 끌려 다니지 마라. 하셨다.
우리 집의 학문은 전에 대야선생께서 열었으며, 뒤에 근암 부군께서 조상의 업을 계승하여 연달아 이어져서 가학으로 발전했는데, 부군께서는 한결같이 조심하여 선대의 업을 추락시키지 않도록 얇은 어름 판을 걷는 모습을 보였다.
천지가 폐색된 세태를 만나서 오직 구하는 바는 자정(自靖스스로 자신을 다스림)하는 것이었다.
이에 말씀하시기를
“옛날의 독서 목적은 현양(과거에 급제하고 출세함)에 있었으나, 오늘날의 선비는 숨어서 사서삼경이나 주퇴절요서(주자와 퇴계 학문의 핵심요약서)를 책상에 두고서 반복하여 읽고, 거두어들이지 않고 새벽부터 야심할 때까지 하루 이틀 1년 2년을 계속하여 이것으로 일생의 사업으로 삼았다.”
'다수가 모이는 장소엔 나가지 않았으며, 시비가 있는 곳에서는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고, 쟁탈지사(爭奪之史싸움의 역사)와 파조지기(葩藻之技아름답고 화려한 기교)와 구이지학(口耳之學입과 귀로 하는 학문)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종종 친구들 중에 서로 허물없이 지내는 자가 의견을 교환하고 나서 힐책하는 말이
“만약 고사에 박식하고 의문(儀文)에 익숙하고 저술에 힘쓴다면 세상에 쓸 만한 것이 많지 않겠는가?”했다.
부군께서 한 번 크게 웃고는 “내가 어찌 그런 것을 구하겠는가?”
이것으로써 사물에 누를 끼치지 않고, 형식에 끌리지 않고, 조금이라도 나의 성령을 보전한다면 다행한 일이 아닌가?
언제나 이것으로 평생 삶의 본분으로 여겼으며, 표방(標榜)에 가까이 하지 않았다.
잠시 눈을 감은 비몽사몽간에 어떤 한 어른이 나타나서 묵와 (黙窩) 두 글자를 써서 보였다. 부군께서 괴이하게 여기고 깊이 생각해 보니
‘나라가 道가 없으니 족히 나의 뜻을 수용하는 듯하다.’
묵묵히 혼자만 알고 남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또 짧은 말로 후세에 남기지도 않았으니 이 역시 처묵지도(處黙之道) 가 아니겠는가? (黙窩는 공의 號)
나의 선비(先妣)는 안동(安東)권씨(權氏) 병곡선생 구(榘)의 후예로 처사 準國의 따님이다. 아내로서의 덕은 가정(家政)을 잘 다스리는 것을 어기지 않는 것이었다. 을해(1875)년에 나서 갑술(1934)년에 돌아가셨다.
묘는 부군과 합장이다.
3남 2녀를 길렀는데 아들은 東銖<한문 학자>, 東鐸, 東銑, 이고 사위는 李源寧, 金棟煥이고, 東銖(金寧金氏)의 아들은 厚榮, 敦榮(出系)이고, 사위는 趙錫駿, 金 木彧(욱)<교사>이며, 東鐸의 아들은 大榮<학생도서관장>, 仲榮<교육학사, 장학사, 학교장,>이고, 딸-사위는 金時鎰<서기관, 국장>, 徐重九. 權虎基<한학자, 성균관대학 존경각 차장, 아세아 연구소장>다. 東銑의 아들은 (系)敦榮<농민신문사 팀장>, 사위는 權寧鎬, 朴龍祥<용문농협장>이다. 李源寧의 아들은 東明이고 金棟煥의 아들은(系)時泳<在美國, 醫師>이다. 厚榮의 아들은 建甲, 建直, 建學이고, 사위는 金錫九, 朴泳澤이고, 趙錫駿의 양아들은 康秀고, 金 욱의 아들은 泰均, 泰淵이다. 大榮의 아들은 基正<숭실대학교 사서팀장>이고, 사위는 李文聲<참마루 판매장>, 李種鳳<한솔 과장>, 權五均, 鄭聖植<철학박사, 교수>이고, 딸은 五辰<국세청 >이다. 仲榮의 아들은 基漢<KAIST. 이학박사>, 基絃<서울대학교 공학박사, AVAGO - 수석 연구원, TriQuint 연구위원>, 基赫<KAIST, 이학박사,EnzynoMics- 연구소장,메디톡스 선임연구원 >이고, 사위는 張仁榮<검찰청 계장, 법무사,金炳權<대한제당 차장>이다, 김시일의 아들은 鍾勳<전자공학박사 교수 대학원장>, 鍾成<포항공대 전자공학박사, 교수>이고, 사위는 朴慶春<농협 팀장>이다. 서중구의 아들은 承鏞, 兌鏞이며, 사위는 閔鎭基<KT 사원, 吳世馹<회사 과장>이고, 權虎基의 아들은 在鉉이고 딸은 允姬, 明姬다. 敦榮의 아들은 志昌<경영학석사-삼성전자 유럽총책>, 志憲<서울대 공학박사-교수>이며, 權寧鎬의 아들은 五洪, 五英 이고, 딸은 熙子다. 朴龍祥의 아들은 振鎬다
세월이 흘러 어버이 잃은 외로운 자식이 된지 40여년이나 지났다.
돌아가시던 날 미세한 말소리와 가느다란 움직임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무엇을 가르치셨는지, 어떤 교훈이었는지?
해와 달이 점점 멀어지고 날로 잊어버려서 가느다란 털끝만큼이라도 잡힐 것 같으나, 그 실제는 장대한 것이 아니었겠는가?
잠시 고개를 숙이고 감히 평안한 마음으로 생각해보니 떠오르고 넘쳐나는 말씀의 진실한 의미를 범하지나 않을까?
다만 두려운 것은 알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전하지 못하는 죄스러움 그것 이다.
평상시에 보고 들은 만분지일이라도 우리 형제와 뒷사람 에게 비슷하게나마 비쳐지기를 바라면서 불초한 아들 東銖는 피눈물로 삼가 씁니다. 끝.
※ 2010. 12. . 손자 仲榮 謹 國譯 ,자손록 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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