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이야기/충성

구한말 의병활동과 독립운동

록야綠野 2011. 5. 17. 15:58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가 가장 많이 배출된 문중

    - 영남 의병의 중심에 정재 류치명의 문인이 주축을 이루었고,

                                                                  안동 의병의 중심에는 무실 류씨가 있었다.

  1895년 안동의소파록(安東義所爬錄)에는 조직과 간부  46명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그 중 8명(參謀- 柳淵博. 中軍將- 柳 琓. 都書記- 柳廷鎬, 柳必永. 書記- 柳淵楫, 柳晦植. 出令- 柳憲鎬, 柳昌植)이 우리문중에서 나왔다.  파록에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당시 70세 노령으로 안동의진을 조직하고 지원하는 본부지도자로  洗山 柳止鎬(정재의 아들) 西山 金興洛(정재의 문인 - 학봉 종손)의 활동이 이긍연의 일기와 김도현(영양 의병대장)의 기록에 뚜렷이 나타난다. 義兵大將- 權世淵은 定齋 柳致明의 문인이며, 2차 의병대장 金道和 역시 정재 문인이다.

 또 다른 기록에는 류연각, 류연익, 류연영, 류벽호,류시연,  등의 활동이 돋보인다. 진성이씨 주촌파 종손 이긍연의 일기에 류연각이 조총 39정을 가지고 왔더란 기록이 있으며, 1896년 4월 17일(음)자에는 박실에 적병이 들이 닥쳐 柳 세 사람을 잡아가서 두 사람은 총살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류연영, 류연각 두 사람의 제삿날이 4월 17일임을 볼 때 이 두분이 확실한 것 같다고 ‘안동 무실마을’이란 책에 김희곤 교수의 기록이 있다.

 의병활동에는 많은 자금이 필요했지만 그 자금은 각 문중에 배정하였는데 그 실적은 무실 류씨, 닭실 권씨, 하회 류씨가 각각 1,000냥,  내앞 김씨 800냥,  금계와 해저의 의성김씨, 법흥의 고성 이씨가 각 500냥,  그밖의 문중은 각각 400냥을 부담했다.

 안동의병으로 星南 柳時淵 장군은 전국에서 가장 장기간에 걸쳐서 적극적으로 투쟁하여 큰 전과를 올렸음을 지나칠 수 없다. 그는 안동 의진의 소모장과 2차 김도화 대장 을 도와 선봉장을 맡았다. 태봉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 그 뒷수습을 감당했고,  영양 의진의 김도현 대장, 영덕 의진의 신돌석 대장과 연합작전을 펼치면서 안동 청송 진보 영양 영해 영덕 삼척에서 1911년 만주로 망명한 날까지 활약하였다.  경주 분황사에서 영남의병 지도자의 회의에서 영남의병대장으로 류시연을 추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성남의 활동은 의병활동 이후에도 만주 독립군 활동을 계속했고 1912년 군자금 모금을 위하여 몰래 귀국했다가 영주 반구 장터에서  체포되어 1914년 1월 29일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그의 의병활동은 병영에서 읽혀지는 ‘육군’이란 월간지에 연재되었고 KBS라디오  국군의 방송 시간에 ‘다큐멘터리 의병대장 류시연’이란 프로그램으로 오래도록 방송되기도 했다.

 

  - 협동학교와 사회계몽운동의 중심에는 東山 柳寅植이 있다.

 동산의 교육과정 개혁운동은 1904년부터 시작하여 1907년 임하면 천전리에서 협동학교(協東學校)를 개교하고 유교경전 중심에서 탈피하여 수신, 국어, 지지, 역사, 외국지지, 한문, 작문, 미술, 대수, 지리, 체조, 창가, 화학, 생물, 동물, 식물, 박물, 등 17교과를 도입한 경북 북부지역 최초의 고등학교였다.

여기에는 보수 유림의 반발이 많았으나 동산의 개혁의지가 크게 작용했다.

 ※ 1910년 7월 18일 오후 3시경 안동 영주 예천지역에서 활동하던 무장 의병 18명이 난입하여 김기수 교감 안상덕 교사 이종화 서기를 살해하는 큰 변괴가 있었으나 용기를 꺾지 않고 교육을 지속 하였으나, 그해 8월 22일 국권이 강탈 달하고 류인식, 김대락, 김동삼, 이상룡 등이 주동하여 12월 말에 100여명이 만주로 망명하고,

 ※ 1913년 협동학교는 임동면 수곡동 한들의 정재 종택으로 옮겨서 재차개교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는 정재 종택 건물을 협동학교 교실로 무상제공이라는 종손 柳淵博의 크나큰 배려와 결심! 교장 柳淵甲, 교감 柳東泰의 지극한 정성으로 1915년 제 2회 졸업식을 맞았다,  류인식은  자금 조달을 위하여 일시 귀국하여 고향의 토지를 매각하는 도중 일경에 체포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서 1917년부터 학교 경영을 하면서 안동지방의 계몽운동을 이끌어 간 주역의 위치에 있었다.  1919년 제 4회 졸업생을 배출하고 3 ․ 1 운동의 챗거리 만세운동이 협동학교에서 준비 추진되었음을 빌미로 강제 폐교되었으나, 정재 종택에서 우리 문중이 그 중심에 있었다는데 그 의미는 대단히 크다 할 것이다.


  - 3․1 운동의 챗거리 만세운동 중심에는 우리 문중이 있다.

임동면 만세운동은 정재 주손인 류동시(柳東蓍)가 광무황제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서울의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수중에 숨겨서 귀향하여 대책회의를 열고 숙부인 류연성과 협동학교 류동태, 이규호 등과 논의하여 3월 15일 챗거리 공동타작마당에서 류연성, 류교희, 류동수, 박재식, 박진성 등과 洞별 책임자를 정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는 협동학교에서 준비되었다.  그 때 참가했던 어른들의 말씀에 의하면 태극기를 만들기 위하여 안동장에 두 사람을 파견하면서 동시에 점포에 들어가지 말고 두 가지 물감을 동시에 구입하지 말고 한 번에 많은 량을 사지 않도록 당부해서 보냈다고 하였다.

  3월 21일 오후 2시경에 500여 명이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고 일본인 순사 우치다가 시위대를 막아섰으나, 우치다와 권태석 순사보를 제압하고 주재소에 들어가서 경찰의 무기를 모두 빼앗아서 우물에 넣어 못쓰게 만들었으며, 면사무소를 공격하여 각종 서류를 파기하고 건물도 부수었다.

일본인 순사에게 태극기를 들려서 동네마다 찾아다니면서 만세를 불렀다.

시위는  새벽 2시가 넘도록 계속되었으며, 이날 만세를 부른 전체 인원수는 1,000명이 훨씬 넘었을 것이라 전한다.     ☀ (천안 독립기년관에도 안동의 3.1운동 부분에 편항 1,000명. 예안 500명이 게시되었음)

 다음날 임북면(사월) 시위에도 그 다음날 영양 시위에도 참여한 분이 있었다. 이때에도 정재의 손자 류연성의 활동이 가장 두각을 나타냈다.

 柳淵成은 일경에 체포되어 대구 감옥에서 6개월 동안 재판을 받으면서 옥중에서 만세를 여러 차례 불렀다고 한다. 류연성은 징역 7년을 선고받고 7일 만에 순국했으니 그간의 고초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류교희와 류동수는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이는 독립선언서에 기록된 민족대표 33인에게 3년 이하의 형이 선고된 점과 비교할 때 시위가 얼마나 격렬했는지를 감지할 수 있는 대목이다.


  - 파리장서에 서명

3․1 운동 직후 유림단에서 파리강화회의에 우리의 독립을 요구하는 장문의 청원서를 보낸 일을 제 1차 유림단 의거라 하는 데 이 장서에 직접 서명한 사람은 137명이며 안동 사람은 5명(한들에 柳淵博, 삼산에 柳必永, 하계에 李晩煃 내앞에 金秉植 금계에 金瀁模) 인데 우리 문중 어른 2인이 들었음은 주목할 부분이다.


  -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을 지낸 旦洲 柳  林 선생

협동학교를 졸업하고, 챗거리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중국으로 가서 중경의 임시정부 요인으로 활동하다가  국무위원에 취임하여 활동하셨다.  광복 후에  한국독립당 당수로서 자유당 독제정치를 규탄하는데 앞장서서 투쟁했음.  수유리 4․19 묘지에 안장


 ※독립유공 훈포장자 명부 - 전주류씨 류복기, 류복립 후손 -

 

성 명

생몰 년도

마을

훈격

주요 활동

1

류교희 柳敎熙

1886-1965

박실

애국장

임동 31운동. 징역 6

2

류동수 柳東壽

1898-1983

무실

애족장

임동 31운동. 징역 1. 일명 晩秀

3

류동창 柳東暢

1898-1983

무실

애족장

임동 31운동. 징역 2

4

류동혁 柳東爀

1891-1920

무실

애족장

임동 31운동. 옥중 순국

5

류동환 柳東煥

1885-1973

한들

애족장

임동 31운동. 징역 2

6

류 림 柳 林

1894-1961

계곡

독립장

임동 31 운동, 서로군정서, 신한청년단, 아나키스트 활동, 대한민국 임시정부국무위원.

7

류세진 流世振

1886-1923

임동면

애족장

대한 통의부 가명일 수 있음.

류시연 柳時淵

1872-1914

한들

독립장

전기, 중기, 후기의병 영남의병대장 사형

8

9

류연건 柳淵建

1892-1951

고천

건국포장

불교청년회, 조선노동공제회, 길안청년회안동기자단, 신간회 안동지회

10

류연덕 柳淵德

1894-1923

고천

애국장

대한통의부, 순국

11

류연박 柳淵博

1844-1925

한들

건국포장

전기의병, 파리장서 서명

12

류연복 柳淵福

1890-1965

수곡

애국장

협동학교 졸업, 임동 31운동, 군자금모집

13

류연성 柳淵成

1857-1919

수곡

애국장

임동31운동 징역 7. 옥중 순국

14

류연익 柳淵益

1901-1992

수곡

애족장

임동 31운동, 군자금 모금. 징역 2

15

류인식 柳寅植

1865-1928

삼산

독립장

교육구운동, 협동학교, 조선노동공제회, 신간회

16

류정희 柳鼎熙

1867-1933

수곡

건국포장

국내항일 금고 5

17

류필영 柳必永

1841-1924

삼산

건국포장

파리장서 서명

18

류후직 柳后稷

1894-1956

박곡

애족장

협동학교졸업, 안동면 31운동 징역 3

19

류동수 柳東洙

1888-1920

마령

애국장

임동면 31운동 징역 6

20

류창식 柳昌植

1859-1912

삼산

건국포장

초기의병

21

류면희 柳冕熙

1916-1940

삼산

애족장

610 만세 주도, 조선하생과학위원

22

류명호 柳命鎬

1876-1920

수곡

애족장

류시연 부대 활동 징역15년 옥중 단식 순국

23

류동범 柳東範

1891-1924

수곡

건굮공로훈장

서로군정서 독립운동 3의사의 1

24

류 완 柳 琓

1860-1903

박실

건국포장

을미 안동의진 중군장

25

류기준 柳基俊

1924- ?

삼산

애족장

임시정부 광복군

26

류기영 柳璣永

1889- ?

계곡

애족장

임동3.1운동. 징역 2. 만주로 망명

27

류춘흠 柳春欽

1879-1951

영양

애족장

삼일운동 징역 26

28

류기만 柳基萬

1906-1950

삼산

건국포장

안동 콩구릅 안동청년동맹 신간회

29

류경발 柳景發

1897-1922

별티

애족장

임동 3.1 운동

30

류 근 柳 瑾

1861-1921

용인

건국훈장단장

황성신문, 동아일보언론인 교육자 국민걔몽

31

류연수 柳年秀

1899-1953

용인

대통령표창

만주에서 징역 1

32

류창호 柳昌鎬

1872-1918

고천

애족장

류시연 장군과 함께 활동 징역 2

 

. 공적은 있으나 자료 미비로 미포상자 62인 명단

- 전 후기의병 19

柳止鎬 柳淵永 柳淵覺 柳淵翊 柳淵七 柳璧鎬 柳孝淵 柳承洛 柳淵玉 柳晦植 柳憲鎬 柳廷鎬 柳璣鎬 柳康鎬 柳三鎬 柳淵楫, 柳丙鎬 柳淵龜 柳德川

- 협동학교 4

柳東泰 柳淵甲 柳周熙 柳鎭河,

- 31운동 14

柳淵泰 柳宗稙 柳東馥 柳淵琦 柳致得 柳東蓍 柳淵和 柳敬欽 柳廣植 柳宜鎬 柳北實 柳谷蘭 柳昇鎬 柳東植

- 파라장서 1

柳萬植

- 청년운동, 노동운동 사회 계몽 운동 15

柳東億 柳浚熙 柳東著 柳震杰 柳敎黙 柳東英 柳基一 柳東瀷 柳基泰 柳基馥 柳俊熙 柳淵述, 柳俊英 柳髼羲 柳淵逑

- 해외항일 3

柳廣鎬 柳東烈 柳萬熙

- 군자금 모금 4

柳湖福 柳樹澤 柳淵燐 柳德永

- 참가분야가 불분명한사람 2

柳根英 柳求學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이 많아서 중복된 경우는 한 쪽에 넣었음.

합 계 94

                                                        - 자료제공 ; 류중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