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무실 입향 이후 행적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함

록야綠野 2010. 7. 20. 16:18

 

 1.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구국운동에 앞장선 문중

 우리조상이 무실에 입향한 시기는 확실한 기록을 찾지 못하였으나 입향조 시정공(휘 城)께서 1550년 천전의 증 判書 靑溪 金璡 공의 따님과 혼인하셨고 1557년에  영주시 외내에서 부친상을 당하셨고 당신께서 1560년에 무실에서 졸하셨으니1558~1560년 경으로 추산된다.

 기봉공은 6세에 안동 수곡으로 오셔서 그해 (1560)에 부친상을 당하고 1563년에는 어머니께서 순절하시니 세 살 아래인 동생과 함께 고아가 되었다.

외가인 내앞으로 가셔서 외숙 학봉선생의 보살핌을 받고 공부하였다.

20여년 후인 1592년(임진) 4월 13일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동래부사 송상헌 부산참사 정발이 잘렬히 순절하자 각 고을의 군수, 현감, 부사 등은 풍지박산 달아나나고 불과 보름도 못되어 한양의 임금마저 몽진길에 올랐을때 영남의 선비들은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일으켜 적의 후방을 공격하여 보급로를 차단하는 기습전(게릴라전)을 펼쳤을 때

기봉 선조께서는 안동의병을 앞장서서 일으켰으며, 아우 복립(묵계)은 경상 우도 관찰사이신 외숙  학봉 김성일을 돕도록 진주로 달려갔다.

 
            

          壬亂 倡義錄 (20 x 101) 

임진(壬辰)<1592>414 계묘(癸卯). 동래(東萊)가 왜구(倭寇)에게 함락(陷落)

   되고  부사(府使) 송상현(宋象賢)이 전사(戰士).

  ○ 순찰사(巡察使) 김수(金晬)는 열읍(列邑)에 군사를 모아 거사(擧事)할 것을

  전령(傳令).

6월 초1 己丑. 배용갈(裵龍吉), 김 용(金 湧), 류복기(柳復起)거의(擧義)할 것을

  공모(共謀).

  며칠 후 안집사(安集使) 김 륵(金 玏)이 명()을 받들고 와서 선비(章甫)

  마을의  장수(里將)로 하여, 각기 기거하는 마을에서 군사가 될 장정 (軍丁)

  점고하게 함.

717 甲戌. 배용길(裵龍吉)이 구린촌을 찾아가서, 낮에는 산

 꼭대기에  숨었다가 밤이면 집에 돌아와서 잠자는 틈을 타서 그 부형의 동생과

 아들을 불러 기군(起軍)하여 200여명을  대오(隊五) 를 편성하여 분정(分定했다.

19. 병사(兵使) 박진(朴晉)이 본부(本府)-安東에 들어왔고,

  배용길(裵龍吉)이 점고한 명부를 넘겨줬다.

85 壬辰.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초유문(招諭文)이 왔다.

  배용길(裵龍吉)은 즉시(卽時) 일읍(一邑)에 통문(通文)을 내어 여강서원

  (廬 江書院)에 모이게(約會)했는데, 김윤명(金允明) 김윤사(金允思)가 더불어

  왔을 때, 오직 류복기(柳復起), 정조(鄭 操) 만 미리 와 있었다. 또 통문을 내는

  데는 전법사(全法寺)에 모이도록(約會) 했다.

9丙申. 전법사(全法寺)송정(松亭)에 모여서 더불어 맹서(盟誓) 하기를,

  ‘임금님(國王)이 몽진을 떠났고, 국토는 왜적의 비린내나는 먼지로 더럽혀졌는데,

  내 한 몸이 죽는 것을 어찌 아끼겠는가?{身死何惜}’ 하면서,

  군사를 모두 관청 문서에 등록(登錄)하고, ‘경험도 없는 유생들이 아무런 장비도 없는 맨몸으로 분발(奮發)만 하면 어찌하겠는가?’ 싶었으나,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 렀으니 성패(成敗) 강약(强弱)은 가히 계산(計算)할 수 가 없다.’고 하고, 서로 더불어

  성명(姓名)을 쓰고 서명(署名)하여 맹서(盟誓)하였다.

12 己亥 - 임하(臨河)에서 회맹(會盟)하였다.

  한 고을의 선비들이 기약은 하지 않았는데 찾아온 자가 100 여명이었다.

  생원(生員) 김윤명(金允明)을 대장(大將)으로추대하고, 진사(進士) 배용길(裵龍吉)

  부장(副將)으로 삼고, 이형남(李亨男)을 정제유사(整齊有司)로, 류복기(柳復 起)

  향군도감(鄕軍都監)으로 했다.

18 乙巳. 향교(鄕校)에 모여서  김윤명(金允明)이 사임하고 대신 이정백(李庭栢)을 대장(大將)으로 추대하고,  향교(鄕校)를 진소(지휘본부) 로 했다.

20丁未. 예안(禮安), 의성(義城), 군위(軍威) 사람과 연합(聯合)하여 ()

  구성(構成)할 것을 일직현(一直縣)에서 회맹(會盟)하였다.

  예안(禮安)의 김() 정자(正字) ()를 대장(大將)으로 하고, 생원(生員)

  이정백(李庭栢) 진사(進士) 배용길(裵龍吉)을 좌우(左右) 부장(副將) 으로 하고,

   유학(幼學) 류복기(柳復起), 이형남(李亨男)을 정제장(整齊將)으로하고, 이름을

  안동열읍향병(安東列邑鄕兵)으로 ()하고, 안동(安東)을 본진(本陣)으로 했다.

  ○ 이 때 적은 서쪽으로 올라가고 조령(鳥嶺) 이남(以南)에는 매() 30리 에

  1 ()을 설치했는데, 함창(咸昌) 당교(唐橋)의 적()이 가장 강대 (强大)했다.

  적()이 안동(安東), 예안(禮安)()을 함락(陷落)한 후에, 의거(義擧)했 다는

  통지(通知)를 듣고는, 즉시(卽時 용궁(龍宮), 예천(醴泉) 경계지역으로  철수(撤收)하여 돌아가고난 뒤에는 불 지르고, 노략질당하는 일이 없었다.

11월 초5. 순찰사(巡察使)가 김윤사(金允思)와 유학(幼學) 류복기(柳復起)

  간병장(揀兵將)으로 하여 정병(精兵)을 골라내었다.

  ○ 이로부터 예천(醴泉) 송구(松邱)로 진지(陣地)를 옮겨서, 적진(敵陣)

  대치(對峙)하여 장사(壯士)를 매복(埋伏)시키고, ()의 동태(動態)

  살피다가, 상주(尙州) 반암(盤巖)에서 왜군(倭軍)의 말 2()을 쏘아서 빼앗았다.

癸巳(1593)년 정월 초하루. ()이 휴식(休息)하는 것을 엿보고,

  밤중에 적()의 진중(陣中)에 복병(伏兵)이 돌입(突入)하여, 적군(敵軍)

  무수(無數)히 사살(射殺)하고, 그들의 창검을 빼앗고. 연달아 진천뢰(震天雷)

  쏘아, 일진(一陣)이 크게 경동(驚動)했고, 죽은 자가 심히 많았다.

  이튿날 밤에도 같은 방법(方法)으로 10여인을 사살(射殺)했다.

  이로 부터 4월에 이르기 까지 8 번이나 당교(唐橋), 반암(盤巖),송현()

  등지에서 복병(伏兵)을 매복(埋伏)하여, 적의 목을 벤 것이 20여명이며, ()

  우두머리 1명을 생포(生捕)했고, 그 나머지를 무수(無數)히 사살(射殺)했다.

  전후(前後)로 사살(射殺)하고, 포획(捕獲)한 적()을 순찰사(巡察使)에게

  보고(報告)하여, 모두 상훈(賞勳)을 받게 했다.

  순찰사(巡察使)가 제송(題送)<하급기관으로 보내는 공문>에 가로되,

  “사로잡은  적의 목을 베어 바친 보고가 연이어진 실적이 본도(本道) 의병(義兵)의 으뜸이 됩니다." 하였다.

 안집사(安集使)계문(啓聞) (임금님께 보고(報告))하기를

   “안동향병은 김 면(金 沔), 곽재우(郭再祐)등과 더불어 성세(聲勢)상응(相應)

    하고,   ‘적봉이 비록 많다고 해도 장차 근심할 바가 없다.’고 했다.

  권응수(權應銖)는 진소(陳所)에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안동(安東) 창의(倡義) 후에 영남(嶺南) 10여 읍()의 적()은 머리()

  꼬리()가 단절(斷絶)되어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게 되었으니,

  이는 향병(鄕兵)의 힘이다.” 라고 했다.

  이때 서울로부터 영()<조령>을 넘어온 적이 당교(唐橋)에 있던 진지(陣地)

  철거(撤去)하여 치해(治海)에다 설치(設置)하니, 하읍(下邑)에는 왜군이

  꽉  들어차서, 죽이고 노략질하는 근심이 난()의 초기(初期)보다 더욱 심했 다.

                                                                                                                                    - 이상-

       

 

창의록 원본 (복사본) 

 

 

창의록과 함께 보관된 동국 지도

순찰사(巡察使) : 조선시대에 재상(宰相)으로서 왕명을 받아 군무(軍務)를 통찰하던 특임직 벼슬.

안집사(安集使) : 임진왜란 때 김륵(金玏)을 경상좌도 안집사로 하여 경상도 동부지역의

   군사를 위무했다.

권응수(權應銖) : 15932월 순찰사 한효순(韓孝純)과 함께 문경 당교에서 적을 대파하여,

   경상도 병마절도사 겸방어사가 되었다. 이 내용과 진천뢰를 쏘았다는 기록으로 볼 때 안동

  향병은 순찰사와 협조하여  전투를 수행한 것으로 사료된다.

倡義錄20 x 101cm 크기의 종이 한 장에 기록 정리하여 전투에 직접 활용했던 동국지도와

  함께 보관한 것으로 볼 때 , 기봉(岐峯) 류복기 (柳復起) 께서 직접 기록하여 보관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 문서(文書)1987년 임하(臨河)댐이 건설(建設)될 때까지 당시(當時)안동군(安東郡)

    임동면(臨東面) 수곡동(水谷洞) 전주(全州) 류씨(柳氏) 무실 종택(宗宅)에 보관(保管)되어

  있었는데,   수몰(收沒) 직전(直前)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 (韓國精神文化硏究院)에 기탁(寄託)

   하여 문중(門中) 사람들이 볼 수 없게 되었다.

수몰 후에 문중이 흩어져서 관심을 두지 못하여 안동시사(安東市史) 편찬의 자료로 제공하지

  못한 것을 무척  안타깝게 생각한다.       

     끝으로 이 기록을 번역할 때 기꺼이 자문에 응한 權虎基 씨<영덕군 창수면 일량리 거주. 나의 매부>에게 감사드린다.

                                                                                                                -  2011.08.10.       류중영  국역 -


 

           가.  임란호국영남충의단(壬亂護國嶺南忠義壇) 제향 

 

 

 대구 망우공원의 임란호국 영남충의단에는

임란 영남의병 315인의 위패가 봉안되어 매년 향례를 올린다.

그 중에 우리 문중(전주류씨 수곡파) 어른 7위(기봉 류복기, 묵계 류복립, 형제분과 류복기의 아들 5형제 -도헌 류우잠, 연암 류득잠,

 룡암 류지잠, 류수잠, 류의잠)의 위패가 봉안되었다. 2010년 2011년 향사는 우리 문중에서 주관 했다.

 대구 동촌 유원지에 있는 망우공원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 망우당 곽재우 장군을 비롯한 영남 호국 의병  315위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매년 추모의  향례를 올리고 있다. 

 여기에는 우리조상이신 岐峯 柳復起,  黙溪 柳復立 형제분과 기봉의 자제 오형제 분 (柳友潛,  柳得潛,  柳知潛,  柳守潛,  柳宜潛)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1592년(임진)  섬 오랑캐의 침략으로 우리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岐峰 선조께서는 분연히 떨쳐 일어나신 것이다.  안동의진의 주역인 정제장과 군수장을 담당 활동하셨으며 1596년 안동의진이 해산되고나서 도체찰사 류성룡이 소집한 3월 3일 공산회맹에는 기봉 류복기, 도헌 류우잠, 연엄 류득잠, 용암 류지잠이 참석했으며, 그해 9월에는 영남 열읍 의병장 32인이 팔공산 상암에서 왜적 소탕을 다짐하는 회맹을 하고 활동하셨고, 1597년 정유재란 때는 망우당 곽재우장군을 도와서 당신 자제 5형제가 배행하여 6부자 분이 경남 창령의 화왕산성에서 분투하셨다.  전국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이런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전후에 흉년이 들어  굶주린 유랑민이 많았는데 기봉 선조께서 거리에 가마솣을 걸고 죽을 쒀서 유랑인에게 먹도록 하였는데,  그 수가 수천명이나 되었다.  

 

 나. 병자호란 영남소수(嶺南疎首) 도헌(陶軒) 柳友潛

병자호란은 1636년 후금 태종이 2만의 대군을 끌고 압록강을 건너 불과 10여일 후에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항복을 압박하였는데 도헌 류우잠 께서는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고, 의병을 인솔하여 남한산성으로 진격하던 중, 충청도에 이르렀을 때 당시 인조 임금은 항복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귀향하였다.

 

 당시에 남긴 도헌공의 시 - (한시를 국역함)

 

나라가 위급(危急)한데 보답(報答)할 길이 없어

무예(武藝)를 익혀서 바야흐로 범처럼 날세다.

어찌 서생(書生)이라고 본래 담()이 적을소냐?

한바탕 싸워서 오랑캐의 요기(妖氣)를 씻어버리리라.

 

 3. 무신창의의 주도자 용와(慵窩) 柳升鉉

1728년 조선 후기 최대 규모의 역모사건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기위하여 용와 (慵窩) 류승현은 유림 지도자에 격문을 보내어 경상좌도 17개 군현의 의병을 모집하고, 부대를 편성하여 의병대장으로 출병 준비를 하였으나, 역도들이 관군에게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중지하였다. (당시의 편성과 중요 직책을 분담한 의진파록<무진창의록>이 남아 있음)

 

 4.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가 가장 많이 배출된 문중

500여년을 이어온 조선(대한제국)의 허망한 망국과정에서 황제를 비롯한 황실과 조정의 관리들이 그렇게 많았지만 국가가 무너지는 것을 막아내지 못했고, 오히려 나라 팔아먹는 일에 뒤질세라 앞장서는 매국노도 적지 않았다.

참으로 허망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우리 무실 류씨의 조상들은 무너지는 나라를 맨몸으로 버텨내려고 향중의 열사들과 의병을 결성하여 싸웠으며, 1910년 망해버린 나라를 다시 찾아 세우려고 1945년 조국 광복이 되던 날까지  국내와 국외에서 목숨과 재산을 초개와 같이 던져 싸웠던 독립운동유공자가 전국에서 안동이 가장 많았기 때문에 내앞의 협동학교 자리에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이 세워졌으며, 그 중에서도 우리 무실 류문이 어느 문중보다 많았다. 

 

    - 영남 의병의 중심에 정재 류치명의 문인이 주축을 이루었다.

  1895년 안동의소파록(安東義所爬錄)에는 조직과 간부  46명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그 중 8인(參謀- 柳淵博. 中軍將- 柳 琓. 都書記- 柳廷鎬, 柳必永. 書記- 柳淵楫, 柳晦植. 出令- 柳憲鎬, 柳昌植)이 우리문중에서 나왔다.  파록에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당시 70세 노령으로 안동의진을 조직하고 지원하는 본부지도자로  洗山 柳止鎬(정재의 아들) 西山 金興洛(정재문인,학봉 종손) 拓庵 金道和의 활동이 이긍연<진성이씨 주총파 종손>의 일기와 김도현(영양 의병대장)의 기록에 뚜렷이 나타난다. 義兵大將- 權世淵은 定齋 柳致明의 문인이며, 2차 의병대장 金道和 , 안동의소의 參謀- 柳淵博. 都書記- 柳廷鎬, 柳必永. 書記- 柳淵楫, 柳晦植. 出令- 柳憲鎬, 柳昌植  역시 정재 문인이다.

 또 다른 기록에는 류연각, 류연익, 류연영, 류벽호,류시연,  등의 활동이 돋보인다. 진성이씨 주촌파 종손 이긍연의 일기에 류연각이 조총 39정을 가지고 왔더란 기록이 있으며, 1896년 4월 17일(음)자에는 박실에 적병이 들이 닥쳐 柳 세 사람을 잡아가서 두 사람은 총살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류연영, 류연각 두 사람의 제삿날이 4월 17일임을 볼 때 이 두분이 확실한 것 같다고 ‘안동 무실마을’이란 책에 김희곤 교수의 기록이 있다.

 의병활동에는 많은 자금이 필요했지만 그 자금은 각 문중에 배정하였는데 그 실적은 무실 류씨, 닭실 권씨, 하회 류씨가 각각 1,000냥,  내앞 김씨 800냥,  금계와 해저의 의성김씨, 법흥의 고성 이씨가 각 500냥,  그밖의 문중은 각각 400냥을 부담했다.

 안동의병으로 星南 柳時淵 장군은 전국에서 가장 장기간에 걸쳐서 적극적으로 투쟁하여 큰 전과를 올렸음을 지나칠 수 없다. 그는 안동 의진의 소모장과 2차 김도화 대장 을 도와 선봉장을 맡았다. 태봉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 그 뒷수습을 감당했고,  영양 의진의 김도현 대장, 영덕 의진의 신돌석 대장과 연합작전을 펼치면서 안동 청송 진보 영양 영해 영덕에서 1911년 만주로 망명한 날까지 활약하였다.  경주 분황사에서 영남의병 지도자의 회의에서 영남의병대장으로 류시연을 추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성남의 활동은 의병활동 이후에도 만주 독립군 활동을 계속했고 1912년 군자금 모금을 위하여 몰래 귀국했다가 영주 반구 장터에서  체포되어 1914년 1월 29일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그의 의병활동은 병영에서 읽혀지는 ‘육군’이란 월간지에 연재되었고 KBS라디오  국군의 방송 시간에 ‘다큐멘터리 의병대장 류시연’이란 프로그램으로 오래도록 방송되기도 했다.

백부(柳東銖)님께서 기록하신 우리 조부 (柳孝淵)의 유사(遺事)를 살펴보니 ‘조부님께서 향중의 을미의병 당시  임무를 띠고 영중을 살피고  있을 때, 모 모가 옥경 1좌를 선물이라면서 주었는데 조부님께서는 겸손하게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이 어찌 약관(20세 청년)으로서 얼마나 신중한 자세였는가?’ 라는 글이 유사에 들어 있어서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 가서 상고해 보았는데  주인공의 자제분이 작성한 자료이므로  다른 문서에서  작은 자료라도 발견되면 확실하게 인정할 수 있다는 답변을 듣고 유사를 복사하여 제공하고 증조부(柳震鎬 , 觀鎬)께서 당시 재력이 상당했고 정재선생과의 世義 (조부 閑睡堂 柳渾文, 선친 近庵 柳致德 부자분이 정재의 문인)가 두터운 관계였으니 의병활동자금을 제공했을 가능성도 포함하여 관계자료를 찾아봐 달라고 부탁하고 왔음.

 

  - 협동학교와 사회운동의 중심에는 東山 柳寅植이 있다.

 東山 柳寅植은 개혁유학자로서 당시 유교경전 중심의  교육과정 개혁운동은 1904년부터 시작하여 1907년 임하면 천전리에서 협동학교를 개교하고 유교경전 중심에서 탈피하여 수신, 국어, 지지, 역사, 외국지지, 한문, 작문, 미술, 대수, 지리, 체조, 창가, 화학, 생물, 동물, 식물, 박물, 등 17교과를 도입한 경북 북부지역 최초의 고등학교였다.

여기에는 보수 유림의 반발이 많았으나 동산의 개혁의지가 크게 작용했다.

 ※ 1910년 7월 18일 오후 3시경  영주 예천지역에서 활동하던 무장 의병 18명이 난입하여 김기수 교감 안상덕 교사 이종화 서기를 살해하는 큰 변괴가 있었으나 용기를 꺾지 않고 교육을 지속 하였으나, 그해 8월 27일 국권이 강탈 달하고 류인식, 김대락, 김동삼, 이상룡 등이 주동하여 12월 말에 100여명이 만주로 망명하면서, 협동학교는 류동태 교감에게 적절히 대처하라 위임하였다.

 ※ 1913년 임동면 수곡동 한들에 정재 종택이 준공되면서 손자이신 水村 柳淵博은 종택을 협동학교 교육용으로 무료대여하셔서  재차 개교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는 정재 종택 건물의 무상제공이라는 크나큰 배려와 교장 柳淵甲, 교감 柳東泰의 지극한 정성으로 1915년 제 2회 졸업식을 맞았다,  만주로 망명하신 류인식은  자금 조달을 위하여 일시 귀국하여 고향의 토지를 매각하는 도중 일경에 체포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으나 건강이 좋지않아서 1917년부터 학교 경영을 하면서 안동지방의 사회운동을 이끌어 간 주역의 위치에 있었다.  1919년 제 4회 졸업생을 배출하고 3 ․ 1 운동의 챗거리 만세운동이 협동학교에서 준비 추진되었음을 빌미로 강제 폐교되었으나, 정재 종택에서 우리 문중이 그 중심에 있었다는데 그 의미는 대단히 크다 할 것이다.

 

  - 3․1 운동의 챗거리 만세운동 중심에는 우리 문중이 있다.

임동면 만세운동은 정재 주손인 류동시(柳東蓍)가 광무황제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서울의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수중에 숨겨서 귀향하여 대책회의를 열고 숙부인 류연성과 협동학교 류동태, 이규호 등과 논의하여 3월 15일 챗거리 공동타작마당에서 류연성, 류교희, 류동수, 박재식, 박진성 등과 洞별 책임자를 정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는 협동학교에서 준비되었다.  그 때 참가했던 어른들의 말씀에 의하면 태극기를 만들기 위하여 안동장에 네 사람을 파견하면서 동시에 점포에 들어가지 말고 두 가지 물감을 동시에 구입하지 말고 한 번에 많은 량을 사지 않도록 당부해서 보냈다고 하였다.

  3월 21일 오후 2시경에 500여 명이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고 일본인 순사 우치다가 시위대를 막아섰으나, 우치다와 권태석 순사보를 제압하고 주재소에 들어가서 경찰의 무기를 모두 빼앗아서 우물에 넣어 못쓰게 만들었으며, 면사무소를 공격하여 각종 서류를 파기하고 건물도 부수었다.

일본인 순사에게 태극기를 들려서 동네마다 찾아다니면서 만세를 불렀다.

시위는  새벽 2시가 넘도록 계속되었으며, 이날 만세를 부른 전체 인원수는 1,000명이 훨씬 넘었을 것이라 전한다. 다음날 임북면(사월) 시위에도 그 다음날 영양 시위에도 참여한 분이 있었다. 이때에도 정재의 손자 류연성의 활동이 가장 두각을 나타냈다.

 柳淵成은 일경에 체포되어 대구 감옥에서 6개월 동안 재판을 받으면서 옥중에서 만세를 여러 차례 불렀다고 한다. 류연성은 징역 7년을 선고받고 7일 만에 순국했으니 그간의 고초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류교희와 류동수는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이는 독립선언서에 기록된 민족대표 33인에게 3년 이하의 형이 선고된 점과 비교할 때 시위가 얼마나 격렬했는지를 감지할 수 있는 대목이다.

 

  - 파리장서에 서명

3․1 운동 직후 儒林團에서 파리강화회의에 우리의 독립을 요구하는 장문의 청원서를 보낸 일을 제 1차 유림단 의거라 하는 데 이 장서에 직접 서명한 사람은 137명이며  안동 사람은 5명(한들에 柳淵博, 삼산에 柳必永, 하계에 李晩煃 내앞에 金秉植 금계에 金瀁模) 인데 우리 문중 어른 2인이 들어있음은 주목할 부분이다.

 

  -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을 지낸 旦洲 柳  林 선생

협동학교를 졸업하고, 챗거리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중국으로 가서 충칭의 임시정부 요인으로 활동하다가  국무위원에 취임하여 활동하였다.  광복 후에  한국독립당 당수로서 자유당 독제정치를 규탄하는데 앞장서서 투쟁했음.  수유리 4․19 묘지에 안장됨.

 

 ※ 독립운동가로 정부포상된 무실 류씨는 32인 

 ※ 자료 미비로 포상되지 못한 무실 류씨는 64인 이다.

 

 

 대구 망우공원

임란 영남의병 315인의 위패가 봉안도어 매년 향례를 올린다.

그 중에 우리 문중(전주류씨 수곡파) 어른 7위(기봉 류복기, 묵계 류복립, 형제분과 류복기의 아들 5형제 -도헌 류우잠, 연암 류득잠,

 룡암 류지잠, 류수잠, 류의잠)의 위패가 봉안되었다. 2010년 향사는 우리 문중에서 주관 했고 나 류중영 (앞줄 좌측 두번째)은

진설에 분정되어 임무를 수행했다.

 

 

음악을 클릭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