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무실 입향 이후 행적

근암 류치덕 행장

록야綠野 2015. 2. 10. 18:38

 

近庵 柳致德 行狀.hwp

 

 

近庵 柳致德 行狀

 

인릉(仁陵) 癸未(1823) 726일 대평리(大坪里)에서 아버지 한수당(閑睡堂(혼문(渾文)과 어머니 영양남씨(英陽南氏)로부터 출생하였다.

 

어릴 때의 자질은 신중하고, 놀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말이 좀 둔한 편이었다. 백조(伯祖) 대여(大埜)(건휴(健休)先生께 배웠으나 12세 되던 해에 선생께서 돌아가시고, 족형(族兄) 정재(定齋(치명(致明)先生께 배웠는데 반드시 일찍 일어나서 선생께 나아가 공부하고 맡은 바를 부지런히 하여 선생의 총애를 받았다.

 

신암(信庵) 이병하(李秉夏) 과 같은 방을 쓰면서 중용(中庸)을 공부하였는데 생각이 깊고, 밤잠을 자지 않고 정독하여 다른 사람의 백 갑절이나 읽었다.(인일기백人一其百)<남들이 한 번 읽을 때 자신은 백 번 읽음> 세산(洗山)(류지호(柳止鎬))과 공부할 때는 서로 묻고 토론하며, 의문되는 점을 기록하여 스승께 나아가 뜻을 분명하게 하는데 대단한 열성을 보였다.(분맹지계奮猛之戒) 그리하여 어릴 때의 둔해 보이던 점을 차차 떨쳐버렸으며, 강회(講會)<오늘날의 학회> 가 있을 때 묻고 대답하고 바로잡음에서 조리가 있고 상세하여 앞설 사람이 없었다.

 

족숙(族叔) 수정재(壽靜齋)께서 감탄하여

 

이 사람이야 말로 독서하는 법을 아는구나.” 라고 칭찬하셨다.

 

乙巳(1845)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깊은 슬픔에 빠졌는데,(당시 공은 23) 정재선생(定齋先生)께서 편지를 보내어 마음을 가다듬게 하셨다.

 

乙卯(1855)에 정재선생(定齋先生)께서 귀양 명을 받고 먼 곳에 계실 때에는 서신(書信)을 계속 드렸는데, 선생은 기뻐하시며 답서(答書)에서 한줄기 서기(庶幾(賢人)을 일컬음. 공자(孔子)께서 안회(顔回)를 일컬은 말에서 유래함)의 메아리가 그치지 않는 구나!’ 라고 장학하는 말씀을 하셨다.

 

先生께서 서거(逝去)하심에 三月의 건복(巾服)<두건과 상복>을 입고, 사사로운 모임에 나가지 않았으며, 선생의 기록물을 성심성의를 다하여 뜻과 가르침을 빛내는 일을 종신(終身)토록 하였다.

 

대야유집(大埜遺集)에 미진(未盡)한 곳이 있었는데 선생의 온전한 뜻을 밝혀 번거로운 것은 빼고 모자라는 것은 보태어 누가 봐도 고치거나 평()할 곳이 없게 하였다.

 

파보(波譜)(4全州柳氏 水谷派 壬申譜(1872)) 만드는 일로 원식공(元植公)과 함께 서울에서 체재(滯在)하고 있었는데 비좁은 여관에서 더위를 무릅쓰고 분주히 보청(譜廳) 서무(庶務)를 밝게 하기 에만 정력을 쏟아 많은 어려움 끝에 그 일을 빛나게 끝내고 그 발문(跋文)<편집후기>을 썼다. 그때 박라(博羅) (류긍호(柳肯鎬)께서 벼슬길에 있었는데 연일 보사(譜事)<족보 만드는 일>를 상의하고 간혹 있는 여가에 술잔을 돌리며 가슴속의 어지럽고 빛나는 숫한 감정을 씻기도 했다.

 

癸酉(1873)에 친상(親喪)<아버지께서 돌아가심>을 당하자 두문잠처(杜門潛處)<조용히 들어앉아>하여 바깥일은 사절(謝絶)하고,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주서(朱書), 퇴계학退溪學) 등을 연구하여 이기사칠지설(理氣四七之說)과 태극동정지기(太極動靜之機)를 추구하였는데, 그 줄거리의 대강을 만록(謾綠)’에서 읽을 수 있다.(근암집(近庵集) 권지2(卷之二)에 실린 논문 제목)

 

또 백가(百家)의 서()를 초록(抄錄)하여 책상과 광주리에 넘치게 쌓아놓고 경암(敬庵) 이재목(李在穆) 과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에게 여러 차례 자문(諮問)을 받아가며 다듬었으며 동림(東林), 만산(萬山), 제공(諸公)과는 학문의 토론을 펼쳐서 분명한 결론을 얻지 않으면 돌아서지 않았다.

 

당시 상변통고(常變通攷)는 가례(家禮)에 국한하여 왕조전헌(王朝典禮)에는 미치지 못하였고, 정재선생(定齋先生)께서도 언급하시지 않았으므로 가례(家禮) 이외의 전례(典禮)는 확실하게 알 수 없었는데, 은 역대례지(歷代禮誌)와 국조전헌(國祖典憲) 등 수백여 서적을 취하여 전례고증(典禮攷證)’ 24권을 편저(編著)<편집하여 저술함>하였는데, 위로는 제왕(帝王)과 궁중(宮中)의 전례(典禮)에서부터 아래로는 성황제나 진()터제<군인이 전투할 때의 진지을 구축하고 지내는 제사>에 이르기까지 해박하게 강조(綱條)를 분류하여 밝혔으니 동암(東巖) 先生께서 편술하신 상변통고에다 날개를 달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여기서 필자가 전례고증에 대하여 약간의 설명을 붙인다면 참고 서적이 218이며 재록성씨(載錄姓氏)104나 된다. 24권인데 1~8권은 통례(通禮)로서 1. 묘제(廟制) 2. 단유(壇壝) 3. 궁실(宮室) 4. 관면의상(冠冕衣裳) 5. 명기(名器) 6. 향수(鄕遂) 전제(田制) 7. 본전(本典) 8. 돈전(惇典). 9~12권은 길례(吉禮)로서, 9. 제전(祭典) 10. 제의(祭儀) 11. 제례(祭禮) 12. 제법(祭法), 13~17권은 가례(嘉禮)로서 13. 관의(冠儀) 혼례(婚禮) 14. 학교(學校) 15. 선거(選擧) 16. 관제(官制) 17. 조회(朝會) 18권은 빈례(賓禮) 19~20권은 군례(軍禮)로서 19. 병제(兵制) 행군(行軍) 20. 사의(射儀) 21~24권은 흉례(凶禮)21.22. 대상(大喪) 23. 복제(服制) 24. 형률(刑律)이다.

 

각권은 綱 條 目 細目으로 분류하여 정리하였는데 目次만 해도 65이나 된다.)

 

또 박물군서(博物群書)를 연구하여 임려문답(林廬問答)’이라는 법제관계(法制關係) 논문 20편을 남겼는데 법제(法制) 전제(田制)로부터 부세(負稅) 전폐(錢幣) 도량형(度量衡) 등속으로 옛것을 참고하여 오늘의 시대를 바로잡으려는 의지가 뚜렷하다. (實學)

 

(논문제목 : *총론(總論) 법제(法制)<법률에 관한 논문> *향수(鄕遂)<지방조직(시도-시군-읍면동-리통-)에 관한 논문> *전제(田制)<논밭 관리에 관한 제도개선을 주장한 논문>. *부세(賦稅)<부역과 세금에 관한 논문>. *적정(籍政)<호적,주민등록 가족관계법 등> *사창(社倉)<물류, 창고에 관한 논문> *조적糶糴<식량관계의 논문> *구황(救荒)<흉년에 식양이 떨어진 백성을 살리는 제도에 관한 논문> *학교(學校)<교육에 관한 논문> *선거(選擧)<관료를 선발하고 등용하는 제도에 관한 논문> *의복(衣服)<머리부터 발끝까지를 보호 장식하는 용품에 관한 논문> *두곡권형척량(斗斛權衡尺量)<도량형에 관한 논문> *전폐(錢幣)<화폐에 관한 논문> *관제(官制)<기관운영에 관한 논문> *고과(考課)<근무평가, 기관평가에 관한 논문> *군제(軍制)<군인에 관한 논문> *형법(刑法)<범죄자 처벌에 관한 논문> * ()<예의 범절에 관한 논문> * ()<음악에 관한 논문>)

 

만년(晩年)에는 집 가까운 숲 속에 작은 서재를 짓고 근암(近庵)이라 이름 하여 종신토록 후생을 기르는 일과 저술에 힘쓰는 장소로 하고자 했음을 이 쓴 [근암소설近庵小說]에서 볼 수 있건만 그 일을 이루지 못한 채 하늘이 무심하여 辛巳(1881) 327일에 병으로 영면하시니 향년 59세였다. 임하면 금소에 장사지냈으며 는 선성김씨(宣城金氏) 락원(樂遠)의 따님이니 문절공(文節公) ()의 후예다.

 

(中略 子孫錄 : 전주류씨 대동보 21328~ 참조)

 

나와는 才質이 월등히 우월하고 능력에 차이가 많았으나, 동지(同志) 동학(同學) 동업(同業) 동도(同道)하여 3년 동안 대야정(大埜亭)에서 같은 방을 쓰면서 백설이 차갑게 깔린 밤에 청등(靑燈)을 밝혔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날 새는 줄 모르고 지내던 정()이 만 섬이나 쏟아지는구나! 더러는 경사(經史)를 토론하고 고금의 서책을 입에 올리기도 했고, 궁상(宮羽)(궁상각치우)을 울창하게 펼쳐 용()이 구름을 만난 듯 서로 마음이 맞아 문 밖 일을 느끼지 못했으니 선경(仙境)에 있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이제 공을 못 본지가 수십 년이나 되고 눈이 침침하고 백발이 무성하며, 정신마저 맑지 못한데 고윤군(孤胤君)<부모를 여읜 남의 아들> 형제(兄弟)가 나에게 행장(行狀)을 부탁하니 문()이 정()과 같지 못하여 더더욱 슬픔을 더하도다! 정우 문소 김도화 장 (情友 聞韶 金道和 狀)


바다를 닮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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